<71화>
“배 비서님은요?”
“잘 곳 구했어.”
서원이 묻자, 도겸이 방 안으로 들어오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저번에 서원이 혼자 섬마을에 왔을 때만 해도 이방인을 받아준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저보다 덩치도 크고 인상도 흉악한 배 비서님을 받아줄 집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잘 곳을 구했다니. 아무래도 도겸의 신분이 명확하기도 하고 돈도 좀 쓴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도겸도 알아서 잘 곳을 구하라고 거절했을 텐데.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서원이 후회하며 도겸을 힐끗 바라봤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머니에게서 받아온 침구를 제 옆자리에 깔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좀 더 떨어트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워낙 방이 좁아 떨어질 공간이 없었다.
이 정도면 이인용 침대에 나란히 누운 것과 비슷한 거리 같은데……. 서원이 복잡한 기분으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도겸이 서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씻었어?”
“……네.”
“그럼 자자. 내가 불 끌 테니까, 먼저 누워.”
도겸의 배려에 서원은 쭈뼛거리다, 제 자리에 몸을 눕혔다.
섬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이른 시간 잠들기도 하고, 인공적인 빛이 별로 없는 동네이다 보니 불을 끄니 정말 캄캄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의 어스름한 빛이 고작이었다.
잠을 자기에는 좋은 요건이었으나, 서원은 옆자리에 도겸이 있어서 그런지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지만, 방 안을 맴도는 도겸의 페로몬이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어서 점점 더 정신이 또렷해져만 갔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그가 신경 쓰이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제가 알기로 도겸은 평생을 침대에서 잤던 사람이었다. 그것도 싸구려가 아닌 혼수로나 최고급 호텔용으로 나갈 법한 비싸고 좋은 침대. 그런 그가 바닥에서 잘 수 있을지 신경 쓰였다.
베개가 모자란다고 해서 도겸의 자리에는 베개조차 없었다. 바닥에 깔 요랑 이불은 있는데 베개가 없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서원은 그나마 어렸을 적에 딱딱한 바닥에서 많이 자 봐서 이런 게 익숙했다. 서원은 고민하다, 제 머리맡에 있는 베개를 빼 도겸에게 내밀었다.
“도련님이 베개 쓰세요.”
눈을 감고 있던 도겸이 눈을 뜨고 서원을 바라봤다. 그는 베개를 쳐다보다 서원을 보더니, 다시 시선을 천장으로 돌려 버렸다.
“필요 없으니까 너 써.”
“바닥에서 자는 것도 힘드시잖아요. 그냥 쓰세요.”
“신경 쓰지 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는 걸 보니, 힘들긴 한 모양이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말에 오히려 더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서원은 그가 베개를 받든 말든 저와 그의 사이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을 감아 버리자, 도겸이 이상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너 쓰라니까?”
“도련님도 제가 베개를 베든 말든 신경 쓰지 마세요.”
“하…….”
서원이 새초롬하게 대답하자,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헛웃음을 터트렸다.
더 뭐라고 티격태격할 줄 알았는데, 도겸은 이내 베개를 가져갔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순간 그가 등 뒤에서 제 몸을 확 끌어안았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접촉에 서원이 다 잠든 늦은 시간이라는 것도 잊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
누가 말도 없이 등 뒤에서 끌어안는 것만으로도 놀라는데, 상대가 도겸이기까지 해서 더 놀랐다. 꽉 끌어안은 팔을 물리치려 몸을 비틀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더 바싹 몸을 밀착했다.
가, 갑자기 왜 이런 짓을……. 서원이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는데 도겸이 뒤에서 입을 열었다.
“서원아.”
평소엔 윤서원, 하고 부르면서…….
서원아, 하고 부를 때마다 곤란한 말을 하곤 해서 더 긴장됐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등줄기에 힘을 뻣뻣하게 주고 가만히 있는데 도겸이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
“나 밀어내지 말아 줘, 제발. 부탁이야.”
도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제가 그를 밀어내는 게 너무나도 두렵다는 듯이. 처절하고 비굴하기에 가까운 애원이었다.
그에 서원은 측은함을 느꼈다. 어쩌다 도겸이 저렇게까지 됐을까. 어렸을 때부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 세상에서 가장 멋있고 꼿꼿한 사람이었는데.
고작 저라는 사람 때문에 그가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그까짓 각인이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건지…….
“내일 해 뜨면, 돌아가세요. 중요한 회의 있으시다면서요.”
“안 갈 거야.”
“저 때문에 일을 망치시겠다고요? 그러실 분 아니잖아요.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네가 여기 있는데 어떻게 돌아가.”
“…….”
“나 이해하기 힘든 거 알아. 그렇지만…… 예전부터 좋아했다는 건 사실이야.”
서원이 다시 단호하게 그를 밀어냈지만 도겸은 아까 했던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설득하려 들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라며 못 들은 척 지나치고 싶어도, 왜 자꾸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각인 전 그의 행동을 돌아보면 절대로 저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는데……. 제가 그걸 믿을 정도로 어리숙해 보이는 걸까 발끈하기도 했다.
“그걸…… 믿으라고요?”
“내가 너한테 뽀뽀했잖아. 생각해 보니까, 유학 가기 전부터 널 좋아했더라.”
유학 전? 그때쯤부터 저를 좋아했다면, 저와 비슷한 시기에 서로를 좋아했다는 말이 됐다. 입맞춤했던 그 날에 제 마음을 깨달았었으니까.
그때부터 계속해서 마음고생 했던 것이 영 쓸데없던 일은 아니었다고 좋아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 제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서원은 동요했다는 것이 티 나지 않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싸늘하게 가라앉히며 대꾸했다.
“그러고 저를 피해 다니셨죠.”
“그건 나도 혼란스러워서 그랬어.”
도겸이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거리며 이전의 제 태도에 관해 설명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우성 알파들은 열성 오메가에게 끌리지 않는다고 교육받아. 그래서 단순히 동생으로서 좋아하는 줄 알았어.”
“…….”
“그때 입맞춤했던 것도 네가 열성 오메가로 발현하면서 페로몬이 터졌었잖아. 그날, 네가 발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페로몬 때문에 충동적으로 하게 된 거라고 생각했어.”
대부분의 우성 알파들이 그런 교육을 받는지는 저로선 모른다. 그렇지만, 발현 열이 터지면서 페로몬이 터졌던 건 사실이었다.
그날, 저도 도겸의 페로몬을 처음으로 맡게 됐고 그 전에 도겸이 어디선가 좋은 냄새가 난다고 그랬었으니까. 분명 알파인 그에게 자극이 됐을 것이다.
저는 고작 중학생이었고 그도 고등학생이었으니 충동적으로 입맞춤 정도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거기까지는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파트너 계약할 때도 제 페로몬만 마음에 들었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건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 그의 행동이었다.
그때의 그는, 미성숙하다고 하기에는 이미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나이 아니었던가. 사랑하는 감정이 어떤 건지 알 나이였기도 하고.
그렇게 말한 저의가 무엇이냐고 묻자, 이번에는 도겸이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네 페로몬이 마음에 들었던 건 사실이야. 미국 가서도 네가 계속 생각났거든. 그날, 발현할 때 느껴졌던 페로몬이.”
“…….”
“발현하기 전에도 너 말고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은 향기롭다고 느낀 적 없어. 미국에서도 마찬가지고.”
도겸은 그렇게 말하다가 고개를 수그리더니, 서원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드러난 목덜미에 살결이 닿자 몸이 흠칫 움츠러들었다. 습, 하고 빨아당기는 숨결에 간지럽고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 페로몬이야.”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이 페로몬이 계속 그리웠다는 듯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제 페로몬이 그에게 특별하게 느껴졌다는 것만큼은 인정을 해야 할 듯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서원은 미심쩍게 입술을 우물거리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럼 미국 가셨을 때 다른 오메가 안 만나셨어요? 아니, 미국 가서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요.”
의심하는 구석이 하나 있기도 하고, 사실은 예전부터 그의 연애사가 궁금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어떤 연애를 즐기는지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그렇지만 여태까지 그의 충실한 파트너였고, 워낙 사적인 질문이다 보니 그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물었다가 괜히 제 마음을 들킬 수도 있고…….
파트너 생활을 이어 가며 그가 다른 사람을 곁에 끼는 걸 본 적 없었다. 그렇지만 제가 모르는 새 누군가를 사귀었을 수도 있으니까…….
서원이 그렇게 생각하며 묻자, 도겸은 안고 있는 팔을 풀더니 서원의 어깨를 잡고 그를 돌아보도록 당겼다.
달빛만 들어오는 어두운 방이었지만, 어둠에 익숙해졌는지 흐릿하게 도겸의 표정이 보였다.
“무의식중에 널 좋아했는데 다른 사람을 만났을 리가 없잖아.”
그는 그런 당연한 질문은 왜 하냐는 듯 당당하게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여태까지 대답한 것 중에서 가장 당당하고 거리낌 없는 태도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그거야 도련님이…….”
서원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작스레 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말을 뚝 멈추자, 도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뭔데 그래? 화 안 낼 테니까, 내 눈치 보지 말고 말해 봐.”
“…….”
도겸이 제 눈치 보지 말고 말해 보라고 온화하게 말했지만, 서원은 입에 지퍼라도 단 것처럼 입술을 더 굳게 다물었다.
서원이 오랜 시간 동안 그가 저를 좋아했을 리 없다고. 다른 사람을 만나 왔을 거라고 확신하는 데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그가 들으면 어처구니없어할지도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그와 몸을 겹쳤던 날, 그가 섹스를 잘했기 때문이었다.
서원 자신이 다른 사람과 몸을 겹쳐 본 적이 없어 비교 대상이 없긴 하지만, 도겸은 저와 처음 섹스할 때부터 능숙해 보였다. 아무리 오메가여도 첫 경험 때 못 느끼는 사람도 더러 있다는데 저는 그의 것을 받다가 기절까지 했다.
첫날을 떠올리면 단순히 우성 알파 페로몬 때문에 느꼈던 건 아니지 않나……. 음담패설도, 아래를 풀어 주는 손길도 자연스러웠던 거로 기억하는데…….
서원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데,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도겸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서원아.”
“네?”
“페로몬, 야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