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36)

<70화>

그렇게 기대했던 수육이었는데, 불편해서 입으로 먹었는지 코로 먹었는지 모르겠다.

고백을 거절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같이 식사를 하다니……. 할머니는 그러한 상황을 모른다지만, 분위기를 봐서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셨을 텐데 너무하셨다.

그만 먹으려고 젓가락을 내려놓는데, 할머니가 서원의 밥그릇에 밥이 반절이나 남은 것을 보곤 작게 탄식했다.

“아휴, 이렇게 조금 먹어서야……. 밤에 배 안 고프겠어?”

“많이 먹었어요. 배불러요.”

차마 더 먹었다가는 체할 것 같다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서원에게 그렇게 먹으니 살이 찌지 않는 거라며 잔소리하다가, 허리를 굽혀 탁상식탁을 들려고 하셨다. 그에 도겸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일을 자처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휴, 손님한테 부탁해도 되나?”

“난데없이 찾아와서 얻어먹기까지 했으니, 정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들어가서 쉬세요.”

“흐흠. 그럼…….”

할머니는 집안일을 떠넘기는 게 미안하다는 듯 굴면서도, 오늘 종일 수육 준비를 하느라 피곤했던 터라 자연스레 도겸에게 넘겼다.

도겸이 집안일을 도맡으면서 자연스럽게 배 비서 또한 일을 돕게 됐다. 덩치 큰 두 명이 주방을 차지하고 있는 데다가, 도겸과 같이 있기가 머쓱해 서원은 일없이 툇마루에 앉았다.

서원은 발을 까딱거리며 멍하니 비 오는 정경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비가 쏟아지더니, 이제는 거의 폭우 수준이었다. 멀리 보이는 바다로 물안개가 자욱했다.

그나저나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저 두 분은 어디서 묵으시려나?

제 알 바 아니었지만, 서원도 처음에 이 섬에 내려왔을 때 할머니가 거둬들이지 않았더라면 노숙할 뻔했었다. 그래서 혹여나 그렇게 되진 않을까 조금 걱정됐다.

잠시 그런 생각을 이어 가는데, 할머니가 방에서 나오셨다. 그녀의 한쪽 손에는 과도가, 그리고 다른 손에는 탐스럽고 커다란 배가 들려 있었다.

“배 좀 먹을까?”

“배요……?”

“입가심.”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며, 서원의 옆에 앉아 배를 깎기 시작하셨다.

순간 ‘또 드세요?’ 하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할머니의 모습이 묘하게 즐거워 보여 그럴 수가 없었다.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인 것처럼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조금 들뜨신 것처럼 보였다.

한 조각을 주시기에 깨작깨작 먹고 있는데, 집안일이 끝났는지 주방에서 배 비서와 도겸이 나왔다.

“벌써 다 했어?”

“네.”

“그럼 와서들 배 좀 먹어.”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배 비서와 도겸을 앉히고 배를 나눠줬다. 도겸은 자연스럽게 서원의 옆자리를 차지했고, 배 비서님은 할머니의 옆에 앉았다.

할머니는 친근감 있게 구셨지만, 그래도 초면이다 보니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비 떨어지는 소리와 아삭아삭 배를 베어먹는 소리가 적막을 메우고 있는데, 줄곧 무표정한 얼굴이던 도겸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서원이가 여기서 머무나요?”

“그렇지. 왜?”

도겸과 할머니의 대답에 서원이 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갑자기 내 얘기는 왜 하지? 혹여나 나쁜 마음을 먹고 이곳에서 쫓아낼 생각을 하는 건가 싶어 관심을 기울이는데 도겸의 입에서 나온 건 생각지도 못한 소리였다.

“그럼 저도 며칠만 묵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도련님!”

서원이 버럭 언성을 높이며 대화를 끊었다. 묵게 해 달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며칠만이라니? 내일 당장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혹시 제가 그를 따라 섬을 나올 때까지 이럴 생각인가 싶어 인상을 쓰고 말을 끊었지만, 도겸은 설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뱃길이 막혀 묵을 곳이 없어서 그럽니다. 꼭 사례하겠습니다.”

……설마 저 부탁을 하려고 집안일을 도맡은 건가? 워낙 계산적인 사람이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시선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서원이 흐릿하게 고개를 젓자, 할머니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자신은 모르겠다는 듯 물러났다.

“빈방이라고는 지금 서원이가 쓰는 방밖에 없어. 난 모르겠으니 얘한테 물어.”

떠넘기듯 하는 할머니의 대답에 도겸의 시선이 서원에게로 향했다. 새카만 눈동자와 마주치자, 서원은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안 돼?”

“당연히 안 되는 걸 왜 물어요……. 도련님은 그런 일이 있고도 저랑 같은 방에서 자고 싶어요?”

“자고 싶은데, 나는.”

도겸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차이고 난 후에 같은 방에서 잘 생각조차 하지 않을 텐데, 각인 때문에 그런지 비정상적인 집착을 하는 것 같았다.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의 태도에 당황한 나머지 붕어처럼 입술만 뻐끔거리게 됐다.

서원은 뒤늦게 이성을 되찾고 상황을 살폈다. 비 때문에 뱃길이 막힌 건 사실이었다. 물안개도 많이 끼고 파도도 치고 날씨도 이 모양이라서, 얼마를 줘도 섬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니 묵고 가긴 해야 할 텐데……. 그게 꼭 제가 지내는 방이어야 하나? 그리고 배 비서님은?

“그런데 자고 가야 할 사람이 도련님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배 비서님은요? 제가 쓰는 방은 좁아서 셋이 자기는 힘들어요.”

서원이 지내고 있는 방은 워낙 좁아서 둘까지는 몰라도 셋은 무리였다. 특히나 서도겸과 배 비서님은 덩치가 남자 중에서도 큰 편이라 더더욱.

둘이 지낼 수 있는 방을 구하는 게 나을 거다. 그런 의미로 말했으나 도겸은 배 비서는 신경 쓸 것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저 녀석은 다른 곳에서 자라고 하면 돼.”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 배 비서가 더 중요해?”

“왜 말이 그렇게 흘러요?”

그냥 일행이 있으니까 말한 것뿐이었는데, 도겸은 차가운 시선으로 서원을 바라봤다. 어떻게 저를 두고 배 비서만 챙길 수 있냐는 얼굴이었다.

누가 보면 도겸은 나 몰라라 하고 배 비서님만 챙긴 줄 알겠다. 둘 다 챙기겠다는 게 왜 문제가 되는 거지? 서원은 고민하다 방법 하나를 제시했다.

“그럼 배 비서님이랑 저랑 같이 자고 도련님이 다른 곳에서 주무시면 되겠네요.”

“뭐? 나 눈 뒤집히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

“아, 너한테 화낸 거 아니야.”

“…….”

도겸은 눈을 흉흉하게 뜨다가, 갑자기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평소라면 사과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아까의 거절 탓에 눈치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사과하면서도, 다시 생각해 보라는 듯 서원을 설득했다.

“그런데 배 비서랑 둘이 자겠다는 건 진짜 아니야. 얘의 뭘 믿고?”

“도련님보다는 배 비서님이 훨씬 믿을 만하지 않나요?”

“아니야. 네가 쟬 몰라서 그래.”

도겸은 배 비서가 바로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깎아내렸다.

어쩌다 보니 사이에 끼게 된 배 비서는 제가 뭐 어떠냐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차마 상사라서 그런지 끼어들지는 못했다.

아니, 배 비서님이 어떻다고……. 적어도 배 비서님은 저를 건드릴 것 같지도 않고 같은 방에서 자도 아무런 문제도 일으킬 것 같진 않은데. 그도 알파긴 하다만…….

힐끗 배 비서님의 눈치를 보는데, 도겸이 미간을 찌푸리며 바닥을 짚고 있는 서원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배 비서가 잘 곳은 내가 구할 테니까, 나만 생각해.”

“묵을 곳을 구할 수 있는 거면 배 비서님이랑 잘 곳 구해서 두 분 같이 주무세요.”

“쟤랑 같이 자라고?”

“…….”

제가 배 비서와 함께 자겠다고 했을 때만큼이나 끔찍하단 반응이었다.

말을 꺼냈다 하면 애꿎은 배 비서님만 공격받는 느낌이라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서원이 배 비서의 눈치가 보여 입을 꾹 다무는데 도겸이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 건드릴게. 저번처럼 안고만 자면 안 돼?”

“아, 아니……. 잠깐, 그런 말은 좀…….”

할머니도 있고 배 비서님도 있는데, 저렇게 말하면 저번에 안고 잤다는 걸 두 사람에게 알리는 꼴이잖아.

당황한 서원이 힐끗 둘의 눈치를 살폈다. 할머니는 의외로 어떤 사이인지 알고 있었다는 듯 신경 쓰지 않았고, 배 비서님은…… 막장 드라마를 본 것처럼 충격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야 왜 도겸이 다른 오메가는 내치고 서원만을 찾았는지 알아챈 얼굴이었다.

연애한 적도 없는데, 비밀 연애를 하다가 다른 사람한테 들킨 기분이었다. 민망해서 배 비서님을 볼 수가 없었다. 목덜미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서원은 둘이 이상하게 볼까, 나름대로 그의 말을 수습했다.

“왜, 왜 안아요? 안지 마세요…….”

“그럼 안지도 않을게. 벽에 붙어서 잘게. 그러면 자고 가도 돼?”

수습한다고 한 거였는데, 도겸이 더 진득하게 달라붙으며 말짱 도루묵이 됐다. 포개진 손에 깍지를 끼워 넣기까지 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두 사람이나 묵을 방 구하기 힘들어서 그래. 응?”

“…….”

도겸은 된다고 할 때까지 달라붙을 기세였고, 할머니나 배 비서는 이 상황을 중재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제가 어떻게 거절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누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하고 시선을 보내 봐도 둘은 못 본 체하기 바빴다.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는 걸 아는데……. 그렇지만 비는 너무나도 많이 쏟아져서 툇마루에 앉아 있는데도 비가 몇 방울씩 튀었다.

게다가 도겸과 배 비서님은 체격도 커다랗고 생긴 것도 험악하게 생겨서 묵을 방을 구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았다. 이 날씨에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보기도 힘들 터다.

서원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끝내 입을 열었다.

“하, 하루만이에요. 대신 정말, 아무것도 하면 안 돼요…….”

“고마워.”

서원이 마지못해 허락하자, 도겸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난 성격이 왜 이렇게 단호하지 못할까. 물렁물렁한 제 성격을 탓하면서도, 제가 도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었더라면 거절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넘어가게 되는 건, 티끌만큼이라도 그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어서 그런 거라고.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면 그의 불쌍한 모습을 봐도 넘어갈 일 없었을 거라고.

그렇게 데이고도 아직도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더 싫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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