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전 돌아갈 생각 없어요.”
서원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둘 사이에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 짧은 순간이 목을 옥죄는 것처럼 숨 막히고 답답했다.
이제…… 끝난 거 맞겠지. 서원은 더 이상의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그를 등졌다.
“저는 이제 더 할 말 없어요. 그만 돌아가세요.”
“…….”
서원이 먼저 일어나 걸음을 옮겼으나, 도겸은 망부석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뒤통수로 따라붙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서원은 애써 뒤돌아보지 않고 텃밭을 빠져나왔다.
집을 향해 내려가는 동안 마음이 너무 무겁고 서글펐다. 그를 버린 건 나인데, 버림받은 것처럼 아팠다.
그에게 받은 아파트는…… 나중에 배 비서를 통해 넘겨줘야겠다. 서원은 그런 생각으로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먹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을 올려다봤다.
* * *
“왜 혼자 와? 같이 간 청년은?”
혼자 집으로 돌아오자, 마당에 배 비서와 함께 있던 할머니가 의아하게 물었다.
궁금해하는 것은 할머니뿐만이 아니라 배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직접 묻진 않았지만, 두 눈에 궁금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배 비서님 때문에라도 도련님도 여기로 돌아와야 하는구나.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하고 혼자 내려온 게 민망했다. 서원은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며 어물쩍 대답했다.
“뭐……. 곧 오시겠죠.”
“길이라도 잃으면 어쩌려고?”
“텃밭에서 얘기한 거라 그렇게 멀리 가지도 않았었어요. 잘 찾아올 거예요.”
서원은 그리 먼 곳에서 대화한 것도 아니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할머니네 텃밭까지 거리가 조금 있긴 했지만, 그래도 길이 복잡하지는 않아서 오는 길을 잃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래?”하고 그냥 넘어가실 뿐이었다.
배 비서의 눈길을 무시하고, 서원은 주방으로 돌아가 마저 하던 저녁 준비를 이어 갔다.
그러나 수육이 다 익을 때까지 도겸은 돌아오지를 않았다. 그를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할머니는 고기를 그릇에 담다가 심각한 눈치로 중얼거렸다.
“정말 길이라도 잃은 거 아니야?”
“설마요…….”
그 쉬운 길을 잃었을까……. 기억력도 좋은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묘하게 불안감이 술렁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혹시나 하고 대문을 기웃기웃 흘겨보고 있는데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에 먹구름이 꽉 찼다 싶더니만, 멀리 천둥이 친 모양이었다. 천둥소리에 많이 놀란 것도 아니었는데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왠지 점점 초조해지는 기분에 아랫입술을 물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바닥도 젖어 들어갔다. 천둥에 이어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한두 방울 내리는 듯하더니,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빗줄기가 굵어지고 완전히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그랬다.
당황해하는데, 혀를 차며 하늘을 바라보던 할머니가 배 비서에게 물었다.
“어휴, 날씨가 갑자기 왜 이래? 그 친구, 우산은 가지고 있어?”
“……아뇨. 저한테 있습니다.”
배 비서가 보란 듯이 접이식 검은 우산을 들어 보였다.
배 비서의 대답에 서원의 머릿속은 금세 걱정으로 가득 찼다. 비를 맞고 계시려나? 우산을 가지고 가야 하나?
비서님은 텃밭이 어디 있는지 모를 테니, 안내를 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대문 너머로 커다란 인영이 보였다.
“전무님!”
도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은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배 비서가 놀란 얼굴로 우산을 펼쳐 들고, 급히 도겸의 곁에 바짝 섰다. 우산을 씌워 준다고 한들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서원은 심장이 죄책감으로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늦게 오다가 비를 맞은 것뿐인데, 마치 제가 초행길인 사람을 두고 혼자 돌아오는 바람에 그가 비에 쫄딱 젖은 것 같았다.
아무리 그런 분위기였다고 해도 그를 챙겼어야 했나. 돌덩어리처럼 굳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데, 할머니가 어디선가 수건을 가져와 도겸에게 내밀었다.
할머니는 그를 비 맞은 강아지 보듯 불쌍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쯧쯧, 쫄딱 젖어서 어떡해? 수건으로 좀 닦아. 워낙 체격이 좋아서 갈아입을 만한 게 있으려나…….”
“괜찮습니다.”
“이런 날씨에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서원아, 갈아입을 거 있나 좀 찾아봐라.”
도겸이 사양했으나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원에게 시켰다.
아니, 나한테 왜…….
얼떨결에 부탁을 받은 서원은 힐끗 도겸을 쳐다봤다. 그러다 그와 시선이 딱 마주쳐 버려서, 서원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
서원은 문을 등진 채 한숨을 내뱉었다.
이곳이 서울이나 저번에 지내던 시골집이었다면 바로 헤어질 수 있었을 텐데, 섬마을이라서 그럴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다.
거절한 마당에 그와 계속 마주해야 한다는 게 어색했지만. 푹 젖은 도겸의 모습을 떠올리면 할머니의 말대로 갈아입을 만한 옷을 챙겨 줘야 할 것 같긴 했다. 가을이라 날이 선선하기도 한데, 옷까지 젖어 금방 체온이 뚝 떨어질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서랍장을 구석구석 뒤져봤지만, 도겸이 입을 만한 옷이라고 할 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원래는 할머니 혼자 살던 집에 제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와 저와의 체격 차이가 꽤 났기 때문에 제 옷이 맞을 것 같지 않았다.
고민하던 서원은 저번에 할머니가 육지를 갔다가 사다 주신 회색 트레이닝 바지와 검은색 박스티를 꺼냈다. 그나마 제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가장 큰 것이었다.
“드리면 입긴 하시려나…….”
얼추 사이즈는 맞을 듯한데, 도련님이 이렇게 값싸고 추레한 옷을 입은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입으라고 하면 불쾌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지만, 젖은 옷을 입고 있다가는 감기 걸리기에 십상이었다. 조금 체면을 구기더라도 감기보단 낫지 않을까 싶어, 서원은 일단 그것을 들고 나왔다.
문을 닫고 나오니, 도겸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어디로 가셨나 둘러보니, 배 비서님과 함께 주방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새 두 분이 친해진 걸까…….
좀 전에 고백을 거절했던 터라, 둘만 남게 되니 지독하게 어색했다. 서원은 그와 시선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한 채로 그에게 옷을 내밀었다.
“도련님한테 맞을 만한 옷이 이것밖에 없어요. 씻고 갈아입으세요.”
“……고마워.”
“화, 화장실은 저쪽이에요.”
위치를 설명하는 와중에도 도겸의 시선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그 탓에 서원은 땅굴로 파고들기라도 할 것처럼 바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부담스러우리만큼 바라보던 그는, 한참 뒤에야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문을 닫고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서원은 숨을 들이켜며 안도했다.
그만, 그만 의식하자……. 금방 돌아갈 사람이니까.
서원이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할머니와 배 비서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들려왔다.
“그나저나 비가 와서 내일 배가 안 뜰 수도 있겠는데?”
“아……. 그럼 어떡하죠?”
할머니의 말에 배 비서가 낭패라는 듯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였다. 그에 할머니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바쁜 일이라도 있나?”
“내일 중요한 회의가 있거든요. 전무님이 꼭 참여하셔야 할 텐데……. 여기 전파는 잘 통하나요?”
“날씨에 따라 달라. 오늘처럼 비 오면 잘 안 터지지.”
“하아아…….”
전파마저 잘 터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배 비서는 세상을 잃은 사람처럼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대화를 엿들은 서원은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아니……. 내일 그렇게 중요한 일이 있는데 저를 보러 내려왔다니. 하늘이 우중충하니 근래 계속 비가 내릴 것처럼 보였는데,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내려왔담. 맑아지고 와도 됐을 텐데…….
각인 때문에 마음이 급해졌던 걸까? 그가 제게 일방적으로 각인을 한 것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도, 저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죄책감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서원이 귀신처럼 가만히 서 있는데, 할머니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서원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물었다.
“옷은 챙겨 줬어?”
“아, 네…….”
“그럼 저녁 먹을 준비나 하자. 수육을 너무 많이 해서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손님이 많네.”
“가, 같이 드시게요?”
손님? 서원이 놀라 묻자, 할머니가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되물었다.
“그럼? 네 손님이라며.”
“그건…… 맞는데…….”
“그럼 준비하자고. 식탁이 작아서 두 개는 꺼내야겠어.”
“…….”
내 손님이 맞지만, 내가 초대한 손님은 아닌데…….
서원이 우물쭈물하자, 할머니가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듯 말했다.
“식당도 없어서 사 먹을 곳도 마땅치 않아. 양을 많이 했으니까, 먹고 가라고 해.”
“…….”
그건 그랬다. 그리고 안 된다고 하기에는 할머니가 준비한 음식이었고, 게다가…… 눈앞의 배 비서님도 침을 뚝뚝 흘릴 것처럼 배고파 보였다.
서원은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가 식탁 테이블 두 개를 꺼냈다. 식탁은 둘이 먹기 빠듯하게 작아서, 어쩔 수 없이 둘씩 나눠서 먹어야 했다.
평상에서 수육을 먹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비가 더 많이 내려서 그럴 수가 없었다.
도겸이 씻고 나올 때쯤 상이 준비됐다. 서원은 내심 제가 할머니와 같이 먹고 배 비서님과 도겸이 다른 테이블에서 먹기를 바랐지만, 의외의 변수가 있었다.
“할머니가 배 비서님이랑…… 드시겠다고요?”
“이 총각이 생각보다 번듯하고 마음에 드네. 우리 딸한테 소개해 주고 싶어.”
“소개요……?”
갑자기 그게 무슨……. 그리고 따님이랑 배 비서님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만 배 비서님은 할머니의 그런 속내를 모르는 건지 어쩐 건지 수육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할머니는 자리를 바꿔 줄 생각이 없는 듯 식사까지 시작했다.
난감한데……. 서원이 쭈뼛거리며 자리에 서 있자,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던 도겸이 서원을 보며 물었다.
“안 먹을 거야?”
“……먹어요.”
한 끼는 먹지 말고 그냥 넘어갈까 했지만, 허기가 지기도 했고 하필이면 오늘 메뉴가 수육이었다. 섬에서 고기를 많이 먹지 못해서 더 맛있어 보였다.
……이건 정말 수육 때문이야. 그렇게 결론을 내린 서원은 마지못해 도겸의 맞은 편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