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전부 다 거짓말 같았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좋은 말로 저를 꼬드겨 섬에서 빠져나오게 한 다음 병원으로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가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해서 그러려는 건 너무하지 않나?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서원이 눈물이 터질 것 같은 감정을 누르려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데, 도겸이 저 역시 이럴 줄 몰랐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으며 자조했다.
“그때는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어. 네가 열성 오메가라서. 그래서 너를 좋아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제가 열성 오메가인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서원은 일말의 기대도 버리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를 참 많이 좋아했는데, 이제는 그 마음마저 고갈된 것처럼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서원이 싸늘하게 태도를 바꾸고 묻자, 도겸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설득을 이어 갔다.
“너는 모르겠지만……. 보통 우성 알파는 체질적으로 열성 오메가한테 끌리지 않아. 그런 비효율적인 짓은 하지 않는대.”
“우성 알파가 열성 오메가를 좋아하는 게 비효율적인 일이라고요?”
“아무래도 그렇게들 말하지. 열성 오메가를 만나면 우월한 형질을 낳기 힘드니까.”
“하…….”
도겸의 말에 서원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이제는 열성 오메가에 대한 비하 발언까지 하고 있다.
물론, 비효율적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제가 원래 베타로 발현할 확률이 높았던 것처럼 체질에는 가족의 영향이 있었다.
그 탓에 재벌가 사람들은 대부분 우성끼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건 세간에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우성이라는 체질이 튼튼하고 우월하다는 건 증명된 사실이니까 다들 제 아이를 우성으로 낳고 싶어 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뭐? 비효율적이라 체질적으로 끌리지 않는다고? 그런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차라리 급이 안 맞는다든지, 아니면 워낙 탄탄한 가문이니 우성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숙명이 있어 열성을 만날 수 없다고, 그래서 제 마음을 부정하고 있었다든지 하면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거짓말도 적당히 하셔야죠. 열성 오메가 비하 발언까지 하면서 좋아한다고요? 제가 그 말을 믿을 정도로 머저리로 보여요?”
“머저리라니……. 말을 왜 그렇게 해? 열성 오메가를 낮잡아 보는 게 아니라, 정말이야. 그래서 나는 내가 비정상인 줄 알고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게 좀 힘들었어.”
“저를 좋아하면 비정상이라는 걸 인정하는 거라고요? 하…….”
말하면 말할수록 속이 갑갑해졌다. 그는 그 뛰어나다는 우성 알파니까 다른 체질 같은 건 우스워 보일 수 있다는 건 알았다. 이전에 제게 열성 오메가니까 한국대를 나와도 저를 쓸 만한 회사가 있나, 하고 말했던 사람이니까.
사회 분위기상 열성 오메가를 선호하지는 않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나 차별적인 사고를 하는 줄은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어디까지 그의 밑바닥을 봐야 하는 건지……. 제가 그에게 정을 뗄 수 있도록 온 세상이 도와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피곤함에 더는 그를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졌다. 서원은 한숨을 푹 쉬다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만하시죠.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덜 실망스럽겠어요.”
“뭘 솔직하게 말하라는 거야. 하아, 내가 어떻게 해야 믿어 줄래?”
도겸은 답답하다는 듯 말하면서도, 가지 말라며 서원의 손목을 붙잡았다.
붙잡은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고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애처롭게 빛나고 있었다. 이전에 이 모습을 봤더라면 그가 진심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겠지만, 한번 차가워진 마음은 녹을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더 냉소적으로 반응하게 됐다.
연기를 참…… 잘한다. 하긴,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이니까.
굳이 더는 대꾸하지 않고 그의 손을 냉정히 뿌리치려는데, 그보다 도겸이 입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사랑해.”
“…….”
나지막한 목소리에 서원이 멈칫, 몸을 굳혔다.
서원이 동요한 것을 알아챘는지, 도겸이 다시금 절박하게 말했다.
“사랑해, 서원아.”
그는 붙잡고 있던 서원의 손을 이끌어, 하얀 손등에 보드랍게 입술을 맞췄다.
쪽. 쪽……. 프러포즈하는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사랑스러워 참을 수 없다는 듯 가볍게 입술이 손등에 붙었다 떨어졌다.
서원이 뻣뻣하게 굳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는 마음을 돌리기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서서히 입술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닿은 부위로부터 열이 올라서 몸이 잘게 떨렸다. 그가 몇 번이고 계속해서 입을 맞추며 올라오니 어깨가 움칠 떨렸다.
말리지 않았다간 계속해서 온몸 여기저기에 입맞출 것 같은 기세였다. 서원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빼냈다.
“아니……. 그만, 그만……. 더 말하지 마세요.”
아무리 뭐든 잘하는 남자라지만, 이것까지 연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저를 구슬리기 쉽도록 좋아한다고 속이는 게 아닌가 의심했었다. 그렇지만 혼자 온 것도 아니고 배 비서님까지 데려온 마당에 이런 식으로까지 제 비위를 맞춰 가며 말도 안 되는 고백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알파 둘이면 열성 오메가 하나를 억지로 끌고 가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고고하기 짝이 없는 남자니 이렇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손등에 입을 맞추고, 짙은 눈빛으로 바라볼 이유는 더더욱 없고.
“아, 알겠어요. 도련님이 저를 좋아한다는 건…….”
“믿어 줄 거야?”
서원의 말에 도겸이 급하게 화색을 보이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거짓말이 아니라, 그는 정말로 제게 끌리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에도 문제는 있었다.
“네, 그런데 도련님은 지금 엄청난 착각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착각?”
도겸이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저한테 일방 각인을 하신 상태잖아요? 그러니까 좋아한다고 생각할 만도 해요. 각인만 풀리면 저 같은 열성 오메가한테 왜 매달렸나 하고 후회하실 거예요.”
“안 그래!”
서원이 후회할 짓 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했지만, 도겸이 언성을 높이며 부정했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서원이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자, 도겸은 아차 싶었는지 입을 손으로 가리더니 탄식하는 숨을 내뱉었다.
“아니, 하……. 소리 높인 건 미안해. 그런데 각인 때문에 이런 거라면 네가 고백했을 때부터 받았겠지.”
“…….”
“왜 못 믿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이야. 예전부터 좋아했어.”
“예전부터……. 그렇게 말하시니 더 믿기 힘든데요.”
“알아, 내 태도가 미적지근했었다는 거. 그렇지만 그때는 좋아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아무리 몰랐다고 하더라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받았을 때 보통 그런 반응을 보이나요?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끔찍하단 반응은 안 보일 것 같은데요.”
사춘기로 접어드는 아이 중에 종종 그런 애들이 있긴 했다. 좋아하는 아이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걸 못해서, 괜히 투덜거리며 괴롭히는 애들이.
만약에 그런 귀여운 수준의 반응을 보였더라면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도겸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제가 고백한 말에 그렇게 끔찍하다는 반응을 보여 놓고서는 이제 와서 예전부터 좋아했다고 말하는 건 말도 안 됐다.
서원이 거짓말하지 말라며 냉랭하게 쏘아붙이자, 도겸은 황당하고도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착잡하다는 듯 입술을 벙긋거리더니 이유를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내가 언제 끔찍하단 반응을 보였다고……. 네 눈엔 그렇게 비쳤을 순 있지만, 그땐 내가 너무 당황해서 그런 거야.”
“…….”
“함께 지내는 동안 네가 날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그리고 갑자기 아이까지 임신했다고 하니까…….”
“도련님.”
도겸이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어 가며 해명하려 했으나, 서원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입을 열었다. 거짓말처럼 그의 목소리가 멎었다.
“그렇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어요.”
“왜…… 바뀌는 게 없어? 나랑 만나면 되잖아.”
묻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의 안에서 소용돌이가 치는 것처럼 한껏 불안한 목소리였다.
“도련님이랑 이제 그만 만나고 싶다고 말했잖아요. 몇 번이나 말해야 해요?”
“…….”
서원의 단호한 거절에 도겸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툭 치면 눈물이라도 뚝뚝 흘릴 것 같은 모양새였다.
화내는 모습을 몇 번 봐 왔어도, 이렇게까지 무너지듯 한 모습은 처음이라 심장이 따끔거렸다.
그에 대한 마음이 이전과 같지 않았지만, 간절한 모습을 봐서 그런지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저를 보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고, 야윈 모습에 눈길이 가던 터라 더 그랬다.
의사의 말로 일방 각인은 그가 자신에 대한 마음을 단념하면 풀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단념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하긴 했지만, 아무튼 풀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그의 곁으로 돌아갔다가 불시에 그의 각인이 풀리기라도 한다면? 착각한 거였다며 곧장 저를 버릴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했다. 그때는 제가 그걸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저는 그렇게 못 할 것이다. 몇 달간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애를 썼어도 여전히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단념하지 못했는데, 지금 다시 돌아갔다간 분명 저는 예전보다 그를 더 좋아하게 될 게 뻔했다.
그러니 더 마음이 커지기 전에. 지금 그를 밀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