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몇 년을 알고 지냈지만,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그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그는 무던한 성격이기도 했고 강인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가 우는 모습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서원은 당황스럽고 안쓰러운 복합적인 감정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근데…… 갑자기 왜 울지?
그가 울 이유가 있나? 도망쳤다가 잡힌 사람은 나인데, 지금 울어야 할 사람은 나이지 않나? 그에게 대차게 차이고 아이를 잃게 될 불행한 상황에 처한 건 나인데?
서원이 당혹스러움에 그의 곁에 서 있던 배 비서를 바라봤지만, 그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뗄 뿐 도와주지 않았다. 얼핏 보이기로, 배 비서 역시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왜, 왜 그래요? 왜 우는 건데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람이 제 앞에서 울고 있으니 단단하게 세웠던 경계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왜 저를 찾아왔든 간에 일단 그를 달래야 할 것 같았다. 쩔쩔매며 진정시키려 노력하는데, 할머니가 주방에서 나왔다. 손님을 마중하러 간 서원이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으니 직접 나온 것 같았다.
할머니는 제 집을 찾아온 이방인 둘을 발견하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할머니…….”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은데?
상황을 모르는 할머니가 보기에는 제가 건장한 남자 한 명을 울렸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도대체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서 입술만 뻐끔거렸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잠시 상황을 파악하던 할머니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서원아, 네 손님이냐?”
“……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저렇게 울고 있는데 아니라고 해 봐야 믿을 것 같지도 않고…….
서원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할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숨을 내뱉더니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육지에서 여기까지 왔으면 고생 좀 했겠어. 저녁 준비는 내가 하고 있을 테니까, 잠깐 바람 좀 쐬고 와.”
“아, 아니…….”
“거기, 뒤에 정장 입은 총각은 앉아서 쉬지 그려?”
할머니가 배 비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상황을 모르긴 몰라도 배 비서는 도겸을 보필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눈치였다.
배 비서가 어정쩡하게 있자,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던 도겸은 배 비서에게 눈짓을 줬다. 말하지 않았음에도 배 비서는 금방 눈빛의 의미를 알아채고 마당에 있는 평상에 걸터앉았다.
서원은 그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집에 들일 필요 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울고 있는 도겸을 보고 있자니 당장 쫓아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쩌지. 잠시 갈등하던 서원은 도겸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일단, 나가요. 나가서 얘기해요.”
“…….”
서원이 대문 밖으로 이끌자, 도겸은 말없이 순순히 끌려갔다.
퍼석, 퍼석. 아무 말 없이 걷고 있자니 비에 젖은 흙길을 밟는 소리와 벌레 우는 소리만이 둘 사이를 채웠다.
서원은 나란히 걷고 있는 도겸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폈다. 펑펑 울고 있진 않았지만, 감정을 추스르기 힘든 듯 여전히 조금 울상을 짓고 있었다.
‘왜 자꾸 우는 거야……. 마음 아프게.’
아까는 갑자기 울어서 당황스럽고 좀 안쓰럽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계속 저러고 있으니 심장이 따끔따끔 아프고 제가 울리기라도 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어디 가서 차분히 대화하면 좋을 텐데, 보다시피 제대로 된 편의시설도 없는 섬마을이었기 때문에 데리고 갈 곳도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 많은 밑으로 내려가면 도겸을 울린 사람으로 소문날 것 같아 난감하고…….
무작정 도겸을 끌고 걷기만 하던 서원은 집 위쪽에 있던 할머니의 텃밭을 떠올렸다.
“오실 때 봤겠지만, 이 섬에는 앉아서 얘기할 만한 곳이 없어요. 할머니네 텃밭에 의자가 있어서 거기로 가려는데……, 괜찮죠?”
“……상관없어.”
도겸이 먹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디서 이야기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은 아니긴 하지만, 엿들을 사람만 없으면 되겠지. 서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올라가면 있는 할머니의 작은 텃밭으로 향했다.
텃밭에는 고추나 상추, 파와 같은 요리할 때 자주 필요한 작물을 소규모로 키우고 있었다. 텃밭 가장자리로는 쉬엄쉬엄 일하려고 만들어 놓은 작은 벤치가 있었다.
서원은 그곳에 도겸을 먼저 앉히고 저도 함께 그 옆자리에 궁둥이를 붙였다.
“다 울었어요?”
“……어.”
그는 울었던 게 민망한지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은 그쳤지만, 여전히 눈가는 발갛게 물든 채였다.
애도 아니고……. 찰떡이를 지우라고 할 줄 알고 경계심을 바짝 세운 채였는데 갑자기 그가 우는 탓에 경계가 누그러졌다. 서원은 작게 한숨을 쉬며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왜 우신 거예요? 무슨 일 있으세요?”
“…….”
난데없이 찾아와, 갑자기 우는 이유가 궁금했다. 원래 감정이 여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더 궁금했다.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지만, 도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대답하기 싫다는 듯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애꿎은 바닥만 바라볼 뿐이었다.
또 일방 각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하려나? 단골 대답이라서 기대도 하지 않고 있는데, 도겸이 뒤늦게 대답했다.
“다시는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
그의 대답에 서원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저를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울었던 거라고?
냉정하게 마지막 만남을 떠올리면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깊게 생각해 보니 떨어져 있던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일방 각인을 치료하지 못했다면 충분히 두려워할 만했다. 각인하면 상대방을 미친 듯이 원하게 되고 못 만나면 아프기까지 하니까.
하마터면 다른 특별한 이유라도 있다고 착각할 뻔했다. 제가 생각한 이유로 온 건 아닌 것 같아 서원은 경계를 조금 누그러트리면서도, 안쓰럽게 그를 바라봤다.
아픈 것도 그렇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원하게 되는 기분은 어떨까? 끔찍하지 않을까?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서 서원은 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음……. 도련님. 일방 각인 때문에 괴로우실 건 아는데, 그래도 그건 제가 어떻게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저랑 같이 있는 건 치료에 역효과만 날 뿐이란 거, 아시잖아요.”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니야.”
“그럼요?”
“…….”
서원이 다른 이유라도 있냐고 물었지만, 도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곤란한가? 그가 자신을 찾아올 다른 이유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그가 우는 모습에 마음이 복잡해지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답지 않게 눈물을 뚝뚝 흘린 것을 보아서는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을 텐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가 저를 굳이 찾아올 이유가 몇 있긴 했다. 앞서 생각했던 아이의 문제거나, 제게 줬던 아파트 명의 문제 같은……. 그런데 고작 그것 때문에 자존심도 버리고 울 것 같지는 않았다.
만일 아이를 지우게 하려던 거였으면 울기보다 화를 버럭 냈을 테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파트 명의 정도는 그에겐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울 일까진 아닌 것 같고…….
혹, 서울에서 힘든 일이라도 있었나?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든지? 근데 그런 이유로 절 찾아올 리는 없는데……. 다른 때도 아니고, 마지막이 그런 식이었으니까 절 의지하고 싶어서 온 건 아닐 거다. 그런 성격도 아니고.
추측은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지만 혼자 생각하려니 좀처럼 답이 나오질 않았다. 결국엔 다 추측일 뿐이라, 점점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혼자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서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제가 다 도와드릴 순 없지만, 우선 뭐 때문인지 말을 해 주셔야…….”
“좋아해.”
“……네?”
갑작스레 도겸이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서원은 저도 모르게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제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생각하지도 못한 답변이라 순간 제 청력을 의심하게 됐다. 서원은 혹여나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좋아한다고.”
그러나 되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정말로 그가…… 제게 고백했다고?
언젠가 그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그에게 고백받는 날을 꿈꾼 적이 있다. 으레 드라마에서 그러는 것처럼, 그 순간만큼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간질거리는 상상도 해 봤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설렘보다는 놀라움으로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현실 부정부터 하게 됐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제가 고백하기 전에 그가 이런 말을 했었더라면 순전히 기쁘기만 했을 것이었다. 온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그랬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카메라 필름을 되감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가 고백했던 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좋아한다는 말에,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안색을 파랗게 물들일 정도로 충격을 드러내던 그였다. 제게 사후 피임약을 먹지 않았냐고 의심하던 그였다.
그렇게 끔찍하다는 반응을 보여 놓고선…….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요?”
일련의 사건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제가 섬으로 급히 도망을 치면서 고백한 후로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에 연락도 한 번 나누지 않았는데, 그 냉정하던 사람이 저를 좋아하게 될 리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