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36)

<66화>

서원의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조급해졌다. 도겸은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윤서원.”

“아아, 역시 그 총각 맞지?”

할머니는 이름을 떠올린 것만 해도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는지 껄껄 웃었다.

이 섬에 들어왔다는 건 확인했으니 어디에 있는지 행방을 물으려고 하는데, 도란도란 모여있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갑자기 저들끼리 대화를 시작했다.

“근데 그 총각도 불쌍하지. 그 나이면 보통 이런 외딴 섬 올 생각도 안 할 텐데.”

“박 씨 할멈이 데리고 있는 거 보면 아무래도 그런 이유 같지?”

“무슨 이유?”

“애 말이야. 그런 이유 아니라면 방까지 내어주고 같이 살진 않을 텐데.”

“아아. 하긴. 그때 상심이 워낙 컸으니, 새로운 아들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데리고 있는 것 같아. 그러고 보면 박 씨 할멈도 참 안 됐지. 친딸이 아니라 생판 모르는 남을 데리고 있을 정도로…….”

그들은 윤서원을 데리고 있다는 박 씨 할머니에 대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배 비서와 도겸이 곁에 있다는 건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언제는 바싹 경계하고 있더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니 대화가 끝나기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으나 도겸은 서원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심장이 마구 뛰고 고조되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허송세월 보낼 기분이 아니었다.

도겸은 그들의 대화를 중간에 끊고 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래서 박 씨 할머니네 집이 어디입니까?”

“저기 위에……, 아니, 근데 누군데 박 씨 할멈이랑 서원 총각을 찾아?”

아까 서원의 이름을 가장 먼저 떠올린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위치를 설명하려다, 다시금 경계가 들었는지 어떤 사이인지 물었다.

누구냐고?

도겸은 순간 그에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저와 서원의 관계를 정의할 단어 같은 게 없었다. 가족이라든지 하는 거짓말로 얼버무릴 수도 있었으나, 왠지 그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도겸이 단번에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이목이 쏠렸다. 도겸은 몇 번 입술을 벙긋거리다 일방적인 제 감정을 고백했다.

“……서원이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사이를 설명하기에는 그것밖에 없었다.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서원이 몇 년간 줄곧 저를 짝사랑했다고, 아이를 배기까지 했다며 고백했으니 서로 좋아하는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새 시간이 흘러 변심했을지도 모르니 단언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단순한 짝사랑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저와 서원이 어떤 사이인지 설명했을 뿐인데, 낯뜨거운 발언이라 그런지 진짜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상기됐다.

도겸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조금 진정시키고 고개를 드는데, 어째서인지 주민들이 아무런 말도 없이 저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 같은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옷도 차려입은 터라, 수금하는 사람처럼 보이거나 윤서원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필 옆에 배 비서도 있어 더 그래 보일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을 잘못 데려왔어. 편하긴 한데. 도겸이 다시금 후회하는데,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렸다. 아까 처음 서원의 이야기를 꺼냈던 머리 까진 할아버지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크으, 역시 젊은 게 좋긴 좋아. 아주 뜨겁다니까. 나 때는 말이야…….”

“저기, 위쪽으로 올라가면 파란 지붕 집이 있어요. 거기가 박 씨 할머니네 집이니까 얼른 가 봐요.”

할아버지가 무용담을 늘어놓으려고 하자, 한 할머니가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말을 토막 내 버렸다.

파란 지붕……. 그녀의 말을 듣고 위쪽을 올려다보자, 멀리 파란 지붕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띄엄띄엄 집이 있는 데다가 위쪽에 파란 지붕은 그곳밖에 없어서 한눈에 어디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도겸은 깍듯하게 인사하고는, 배 비서에게 눈짓을 주고 그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도겸은 배 비서를 대동하고 파란 지붕의 집을 향해 오르막길을 올랐다. 경사가 심한 길도 아니고 험한 길도 아니었는데 심장이 다시 정신없이 뛰며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한 분기의 성적이 오락가락할 수도 있는 대형 미팅을 앞두고도 이렇게 떨린 적은 없었는데……. 도겸은 괜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피며 긴장을 풀려 노력했다.

점점 파란 지붕의 집이 가까워졌다. 가까이 다가가니 경계심도 없이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허락도 없이 들어가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초인종 같은 것을 눌렀다가는 서원이 먼저 알아채고 도망칠 것만 같았다. 문 앞에서 멈칫했던 도겸은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작은 목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간 도겸은 코끝에 스치는 익숙한 페로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방에서 쟁반을 들고나오는 서원과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 * *

섬마을에서의 하루는 식사를 준비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갔다. 뭐 대단한 걸 먹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특히나 오늘은 특별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볼일이 있어서 부산에 내려갔다가, 고기를 사 오셨다고 해서 수육 끓일 준비가 한창이었다.

대파, 마늘, 월계수 잎, 된장 등을 끓는 물에 넣은 뒤 삼겹살을 통으로 넣었다. 고기가 워낙 두꺼워 꽤 오랜 시간 익혀야 할 것 같았다. 서원은 고기가 익을 때까지 옆에서 김치도 자르고 쌈장도 만들고 나름 바삐 먹부림 할 준비를 이어 갔다.

선선하게 바람도 불고 이파리가 노랗고 붉게 물들며 한창 가을의 절정으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좁은 주방에서 펄펄 끓이고 있자니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할머니와 함께 한창 저녁 준비에 매진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옆에서 밥이 잘 되고 있나 보시다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굽은 허리를 펴고 기웃거렸다.

“손님이 왔나 본데.”

“제가 나가 볼게요.”

주방 바깥쪽에서 요리하고 있던 서원은 그렇게 대답하며 밖으로 나섰다.

할머니가 구해다 주신 너덜너덜한 슬리퍼를 찍찍 끌고 주방 밖으로 나오는데, 마당에 고개를 젖혀야만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훤칠한 키의 사내 둘이 마당에 서 있었다.

반짝거리는 구두코. 정돈된 바지 밑단을 보자마자 써늘한 기운이 온몸을 덮쳤다. 잠시 잊고 있었으나 익숙한 느낌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오싹한 기운에 서원은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윤서원.”

……서도겸.

외딴 섬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서 있었다.

잊으려고, 그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를 잊기가 어렵다면 마음이라도 비우려고 노력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섬에서 지내는 동안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비우려고 애썼다.

그렇게 섬마을에서 한 달 조금 넘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도 심장은 도겸을 보자마자 다시 미친 듯이 뛰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코가 시큰해지고 눈가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찰떡이를 지우게 할까 봐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아직도 그에 대한 미련이 잔뜩 남아 있어서. 그를 보고 싶었기 때문에 드는 벅찬 감정이었다.

줄곧 보고 싶었고, 여전히 그를 보면 심장이 뛰고 사랑이 차올랐다. 그렇기에 당장이라도 품에 안겨들고 싶었지만, 저와 그의 마음이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감정은 나만 느끼는 거겠지. 서원은 벅찬 마음을 억누르고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

“…….”

저를 보자마자 무슨 말을 할 줄 알았다. 저번에 시골로 도망쳤던 저를 찾자마자 그랬던 것처럼 부동산 사기라도 당한 거냐고 핀잔을 늘어놓거나, 아니면 제 아이를 품었으면서 감히 도망갈 생각을 했냐고 모진 말을 내뱉을 줄 알았다.

그런데 도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조금 일그러진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서원도 잠잠히 그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도겸도 많이 야위었다. 상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고 근육도 많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워낙 키도 크고 체격이 좋은 편이라 왜소하다는 감상은 들지 않았지만, 그의 평소 풍채를 알다 보니 작은 변화라도 크게 다가왔다.

저번에 봤을 때도 야위었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게 보였다. 혹시…… 일방 각인 때문일까? 제가 떠나서 혼자 끙끙 앓느라 파리해진 것일까? 그렇게 대차게 거절당해 놓고서는, 저 때문에 도겸이 괴로워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심장이 꽉 죄는 것처럼 빠듯해졌다.

상대는 제 아이를 지우게 하려고 이 섬까지 쫓아왔을지도 모르는데, 왜 자꾸 그에 대해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다. 서원은 자신이 미련하다고 생각하며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왜 찾아오셨어요.”

입 밖으로 미어지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의 앞에서 도망칠 수도 있겠지만, 작은 섬이었다. 섬 밖으로 나가는 배도 하루에 한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 좋든 나쁘든 오늘은 그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서원이 찰떡이를 지킬 각오를 다지고 묻는데, 도겸은 아랫입술을 꽉 물고 몸을 조금 떨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경계심 반, 의아함 반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그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뺨을 타고 툭 떨어졌다.

“도, 도련님……?”

“…….”

도겸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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