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정말 여기가 맞아? 확실해?”
“틀림없습니다.”
도겸의 물음에 배 비서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호한 대답에 도겸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지평선 너머를 바라봤다. 지금 서 있는 곳은 갈매기가 끼룩끼룩 우는 부산항 바다였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서원이 CCTV에 잡히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서 행방을 찾는 데 오래 걸렸다.
차들의 블랙박스를 수집해서 겨우 다시 잡아낸 화면에는 서원이 배를 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자그마한 통통배를.
협박을 당하지 않고서야 탈 것 같지 않은 불안 불안한 배인데, 사진 속 서원은 망설임도 없이 제 발로 올라타고 있었다.
서원의 상태를 떠올리면 열성 오메가에 임신한 극도로 불안한 상태였다. 그래서 도겸은 배 기록을 다시 알아보라고, 진료를 위해서라도 섬 밖으로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며칠 치를 다 뒤져 봐도 섬을 빠져나온 기록은 없었다. 배를 타고 내릴 때마다 명부를 남긴다는데, 그 명부에 서원의 이름은 없었다.
섬 내의 CCTV나 기록을 뒤지려고 했지만, 도대체 얼마나 외진 곳인지 그런 것도 없다고 했다. 서원이 진짜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아…….”
서원이 있는 섬으로 향하는 배가 눈앞에 있는데 도무지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런 걸 어떻게 타. 안전하긴 한 거야? 착잡한 눈으로 배를 바라보고 있는데, 배 비서가 마저 말을 이었다.
“워낙 작은 섬이라서 큰 배로는 진입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오늘이 아니면 날씨 때문에라도 잡기 힘들 것 같고요.”
“…….”
최근 며칠은 날씨가 도겸을 방해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며칠 내내 비바람이 심해서 작은 배를 타기엔 위험했다.
그나마 오늘 해가 뜨고 파도가 잔잔해서 섬에 진입할 수 있었다. 바다가 변덕을 부려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고, 내일도 강수 확률이 높으니 만일 갈 거라면 오늘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배 비서는 도겸에게 당장 타야 할 것 같이 재촉하면서도, 현실적인 조언을 덧붙였다.
“내일 N사와 미팅이 있으니, 걱정되신다면 제가 혼자 가서 서원 씨가 있는지 확인하고 보고드리겠습니다.”
“…….”
내일은 N사와의 협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중요한 미팅이 있었다.
내가 오늘 배를 탔다가, 내일 못 나오게 되면 나게 될 손실이 얼마더라……. 잠시 천문학적인 숫자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도겸은 눈을 질끈 감고 상념을 지워 냈다.
“가자.”
더는 계산적인 사고를 할 때가 아니었다.
천문학적인 경제적 손해보다 최대한 빨리 윤서원을 찾고 다시 그를 제 곁에 두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안위를 확인하는 것뿐만이라면 배 비서를 시켜도 됐겠지만, 비단 그런 이유만으로 서원을 찾으려는 게 아니니 꼭 직접 가야만 했다.
도겸이 가뿐하게 배에 올라타자, 배 비서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뒤따라 배에 올라탔다.
이윽고 선장이 배를 출발시키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구명조끼를 챙겨 주던 배 비서가 마침 뭐가 떠올랐다는 듯 주머니를 뒤적거려 뭔가를 도겸에게 내밀었다.
“아, 잠시만요. 전무님.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뭔데?”
“멀미약입니다.”
내려다보니 배 비서의 손에는 갈색 작은 약병이 들려 있었다. 촌스러운 라벨에 멀미약이라는 글자가 떡하니 적혀 있었다.
여태까지 숱하게 차를 타고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탔다. 그런 와중에도 도겸은 한 번도 멀미해 본 적이 없었다. 장거리를 가도 그랬다.
그걸 알기에 한 번도 배 비서가 제게 멀미약을 챙겨 준 적이 없는데……. 오늘은 왜 새삼스럽게 이런 걸 챙겨 주고 그러나.
도겸은 멀미약을 받지 않고 헛웃음을 흘렸다.
“나 살면서 멀미 같은 거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촌스럽게 이런 건 왜 챙겨?”
“이 배는 다를 겁니다. 드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배 비서는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저도 먹었습니다.”하고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뭘 얼마나 멀미 난다고……. 도겸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가만히 있는데도 배가 많이 흔들리긴 하는 것 같아 그가 내민 멀미약 뚜껑을 비틀어 열고 단번에 들이켰다.
“먹었으니까 됐지.”
“일단 안심입니다. 구명조끼도 꼭 챙겨 입으십시오.”
배 비서는 온화하게 표정을 풀더니,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구명조끼를 도겸에게 내밀었다.
오랜만에 윤서원을 만난다고 나름 옷을 멀끔하게 차려입었는데, 구명조끼를 입으라니. 조끼도 꼬질꼬질해 보이고 우성 알파 치수로도 나오지 않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거니 멋있게 보여야 하는데 입었다가 옷에 주름이 져서 멋을 다 망가트리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뭔가…… 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긴 했다. 누구 한 명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허름하고 작은 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도겸은 어쩔 수 없이 구명조끼까지 챙겨 입었다. 예상했던 대로 구명조끼를 입은 모습은 최악이었다. 안 그래도 디자인이 구린데, 치수가 작아서 짧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됐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벗어야지.’
도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장이 유일한 손님인 도겸과 배 비서를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출발합니다! 운행 중엔 돌아다니지 말고 가만히 있으세요!”
선장은 원래 사투리도 심하고 말도 험악하게 쓰는 편이었지만, 오늘의 손님은 워낙 분위기가 심상치 않고 평범한 사람 같지가 않아 차분히 말했다.
이윽고 두두두두, 하는 시끄러운 모터 소리와 함께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잔잔한 바다에 물보라가 강하게 일어났다.
* * *
“윽……, 뭔 이런 배가 다 있어?”
“괜찮으십니까?”
도겸이 파리한 낯빛을 한 채 입을 틀어막고 배에서 내리자, 배 비서가 급히 손수건을 꺼냈다.
도겸은 오만상인 얼굴로 손수건을 받아들고 입을 가렸다. 부산항에서 배에 탈 때까지만 해도 내일 날씨가 안 좋아서 돌아오는 배에 못 타는 건 아닌지, 회의에 참석할 수나 있을지 걱정했다.
그런데 배를 타 보니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회의는 무슨,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어찌나 흔들리던지, 이대로 바다에 빠져 익사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뱃길이 험난했다. 멀미약을 먹어도 속이 이렇게 안 좋은데, 배 비서가 준 것을 미리 먹어 두지 않았으면 어땠을지 감히 예상되지 않았다.
다행히 속을 게워 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더 항해 시간이 길었어도 일을 치를 뻔했다.
도겸이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힌 채 나쁜 안색으로 서 있자, 배 비서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자신도 한바탕 멀미를 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도겸을 보필하려 애썼다.
“저기 벤치가 있는데, 앉아서 좀 가라앉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럴 시간 없어. 얼른 찾아야지.”
도겸은 고개를 저으며 굽었던 허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바다 위에 있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긴 했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벌써 하늘이 조금씩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대낮이니 시간이 늦어서라기보다, 또 하늘이 변덕을 부려 당장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은 기세였다.
비상용으로 우산을 가져오긴 했으나, 비가 오면 나와 있던 섬마을 사람도 실내로 들어갈 테니 수소문하기 힘들 거였다.
도겸은 그럴 생각으로 말했으나, 배 비서는 다른 의미로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오늘 부산으로 돌아가는 배는 없다고 합니다. 빨라야 내일이니, 급하실 필요 없습니다.”
“…….”
아무래도 이럴 시간 없다고 말한 것을, 오늘 안에 서원을 찾아 다시 배를 타고 돌아갈 거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눈치였다.
제가 윤서원을 왜 찾는 것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보니, 제가 서원을 빨리 찾아내라고 지시를 내렸는데도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일머리에 있어선 눈치가 참 빠른 편인데……. 도겸은 굳이 설명하지 않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에 배 비서가 멋쩍게 뒷덜미를 긁적이며 어정쩡하게 뒤를 쫓았다.
선착장을 빠져나와 섬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도겸은 안으로 들어가며 섬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폈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집은 전문가가 지어 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후줄근하고. 저번에 이사 갔던 시골 마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두 번이나 이런 곳으로 이사를 오다니. 이렇게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저를 피하려고 멀리 가다 보니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건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도겸이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살피는데, 마을의 중심부인 건지 정좌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도란도란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사람들한테 물어보겠습니다.”
배 비서도 그쪽을 봤는지, 비장하게 말했다.
도겸이 “그래.”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배 비서가 앞장서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정좌에 모여 있던 노인들은 저들끼리 하하 호호 이야기를 나누다, 이방인의 등장에 도겸과 배 비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안 그래도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이 짙은 섬마을 사람들인데, 도겸과 배 비서의 체격이 워낙 우람하고 삼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외모라 더 바싹 긴장한 채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배 비서가 성큼성큼 주민들에게 다가가자, 한 할아버지가 겁먹은 듯 주춤주춤 뒷걸음질하며 입을 열었다.
“뭐, 뭐요?”
“실례합니다. 혹시 마을에 젊은 남자 새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한 달 전쯤에요.”
배 비서는 겁에 질린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질문했다. 수소문하는 물음에 주민들의 경계가 더 짙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좀 더 온화한 외모의 비서를 대신 데려올 걸 그랬나. 배 비서의 험악한 인상 때문에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는데, 질문을 들은 한 할머니가 누굴 찾는지 알 것 같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젊은 사람? 아. 혹시 그 총각 말하는 건가? 이름이 뭐랬더라. 서, 서…….”
“서원 총각?”
“아! 맞아.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할머니가 말끝을 흐리자, 그의 옆에 다른 한 할머니가 입 밖으로 서원의 이름을 내뱉었다.
섬에 워낙 젊은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최근 들어온 젊은 남자’라는 단서에도 확 좁혀졌다.
이 섬에 있던 게 맞았구나. 혹여 허탕을 친 게 아닌지 걱정했었는데, 곧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도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