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36)

<63화>

안 그래도 배불리 밥을 먹어 식곤증이 따라오는데, 졸음 증상이 나타나는 입덧 약까지 먹으니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양치질만 하고 툇마루에 앉아 병든 닭처럼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데, 방에서 나온 할머니가 대뜸 서원의 머리 위에 밀짚모자를 씌워 줬다.

갑자기 웬 모자지. 이러고 있으면 피부가 타서 그런가? 서원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할머니가 이쪽에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장화를 신으며 입을 열었다.

“다 먹었으면 씻고 준비하고 나와.”

“어디 가세요?”

“맨날 집에 처박혀 있을 거야?”

“그건 아닌데…….”

“애 낳을 때까지 여기서 지내려면, 마을 사람들이랑도 인사도 좀 하고 지리도 좀 알고 그래야지. 빨리 나갈 준비해.”

갑자기 어딜 가자는 건가 했더니, 마을 지리도 알려 주고 사람들도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이곳에서 지낼 거라면 적어도 몇 개월은 이곳에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할머니가 그때까지 저를 여기 있게 해 줄지가 미지수라, 그렇게 오래 이곳에서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도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라 친하게 지내는 게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고.

그러니 꼭 소개받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서원은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젯밤에 지리를 몰라 산책도 다녀오지 못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졸음을 몰아내 가볍게 단장을 하고 할머니를 따라 울퉁불퉁한 길을 걸으니, 커다란 나무 밑에 야외정자가 있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사과를 잘라 먹고 있었다.

할머니와 서원이 그쪽으로 다가가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할머니들이 이쪽을 발견하곤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 총각은 누구여? 이런 손자 있다고 말 안 했잖아?”

“손자는 아니고, 어제부터 우리 집에서 얹혀살기로 한 총각. 몇 달 지내기로 했어.”

“그래? 우리야 젊은 사람 와서 좋긴 한데, 혼자 적적하겠어. 지내다 힘든 일 있으면 이쪽으로 오고. 맞다. 이것도 먹고.”

먼저 말을 걸며 흥미를 내비치던 할머니가 사과에 포크를 꽂아 서원에게 내밀었다.

서원이 ‘어, 어.’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자, 할머니들이 더 신나서 이리저리 말을 걸어 오고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아무 곳이나 골라 온 것 치고는 저를 거둬들인 할머니도, 마을 사람들도 너무 친절하셔서 가슴이 간질거렸다.

도망치듯 무작정 떠나온 곳이라 섬에 정이 들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 조금씩 서원은 섬마을에 익숙해질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 * *

“보고해.”

“아직 CCTV 추적 중이긴 하나, 그날 오후에 핸드폰을 해지했고 4시에 부산으로 내려가는 버스표를 끊어 탔던 기록이 있습니다. 이건 버스표랑 CCTV 사진입니다.”

도겸은 이른 아침 출근하자마자, 배 비서에게 윤서원의 행방에 관해 보고를 받았다.

서원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모친의 말을 듣자마자, 도겸은 전문인력을 총동원해 윤서원 찾기에 몰두했다.

단순히 제 마음을 고백하려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었다. 지금은 서원의 안위만 알아도 좋을 것 같았다. 못 보더라도 그가 안전하게 잘 있다는 것만 알아도 살 것 같았다.

지금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반 시체 상태였다. 이전에도 서원과 만나지 못해 각인통으로 앓던 날이 있었다. 그런데 단순히 각인통뿐만 아니라 서원을 아예 잃게 되고야 말 거라는 초조함까지 겹쳐지니, 사람이 말라 죽는다는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아졌다. 그걸 윤서원을 잃고 나서야 알았다.

도겸은 의자에 앉자마자 배 비서가 내민 것들을 확인했다. 서원의 이름, 서울에서 부산행, 시간이 적혀 있었고 아래에는 서원의 모습이 얼핏 찍힌 좋지 않은 화질의 사진들이 보였다.

저와 만난 이후로 충동적인 선택을 한 것인지, 커다란 짐은 보이지 않았고 옷은 그날 제가 그에게 입혀 줬던 셔츠 그대로를 입고 있었다.

도겸은 복잡한 눈으로 사진을 내려다봤다.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급하게 떠날 정도로 급했던 걸까.

그는 사진 속의 서원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리다가 배 비서를 보며 냉랭하게 목소리를 냈다.

“부산은 왜 간 거래. 가면서 대화 나눈 사람은 없대?”

“그날 대화를 나눈 사람은 부산행 티켓을 끊어 준 사람이 전부였습니다. 티켓을 끊어 주면서 굳이 말을 거는 성격은 아니라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워낙…….”

배 비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보고를 하다가도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것처럼 말끝을 흐렸다.

윤서원의 일이라면 일 초라도 빨리 알고 싶건만, 미적미적 시간을 끄는 모습이 답답했다. 도겸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뒷말을 재촉했다.

“워낙, 뭐.”

“……울고 있어서, 기억에 남긴 했다고 합니다.”

“…….”

“티켓 끊으면서 그렇게 우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배 비서의 말에 도겸은 돌덩어리처럼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울고 있었다고…….

여태까지는 서원이 사라진 것에 대해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서럽게 울었다니. 저 때문에 갑자기 떠난 게 확실했다.

제 마음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서원이 그렇게 울고, 떠날 일도 없었을 텐데. 제가 서원에게 모질게 대하고 대꾸했던 것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괴로워졌다. 이제는 각인통보다도 후회가 제 정신을 좀먹었다.

도겸은 마른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곤 깊게 패인 미간을 엄지로 꾹꾹 눌렀다. 지끈지끈 머리가 아프고 힘들었다.

“더 알아본 건 없어?”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더 알아 오겠습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알아내.”

“네.”

도겸이 이만 나가 보라고 눈짓을 주자, 배 비서는 성큼성큼 전무 이사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방 안에 남은 도겸은, CCTV에 담긴 서원의 사진을 보며 억눌린 숨을 내뱉었다.

“후우…….”

어젯밤, 윤서원의 어머니를 만나고 난 후로 집에 돌아오긴 했으나 무슨 상태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상태로 차 사고를 내지 않은 게 천만 기적일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고, 눈을 감아도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은 더 짙어져서 앞으로 윤서원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려움에 떨었다.

이제는 제가 그를 좋아하니, 고백하면 다시 예전처럼 그와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예전보다 더 깊은 관계를 기대했다. 아무것도 없는 열성 오메가와 결혼한다는 사실에 반대하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 수두룩했지만, 제가 좋으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 상관없었다.

각인해서 그런지, 아니면 윤서원을 사랑하는 마음이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 깊었던 것인지 어떻게 보든지 우리만 아이를 낳고 저희만 잘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자꾸 도망치는 거야.”

사라진 윤서원을 떠올리면 그런 미래까지는 기대하지 않을 테니, 부디 건강하게. 아무 일 없이 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제가 이렇게 고민한다고 윤서원을 더 빨리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저는 제가 있는 자리에서 해야 할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여전히 저를 찾는 일들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렇지만 비효율적이게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도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불안해하는 채로 담배를 피우며 이 갑갑함을 해소하는 것밖에 없었다.

* * *

쏴아아아.

“가을 장마인가.”

할머니가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노랗고 붉게 익은 나뭇잎 위로 맑고 투명한 물방울이 토독토독 떨어졌다. 완연한 가을이기도 해서 그런지, 카디건을 걸쳐야 할 정도로 날씨가 꽤 쌀쌀했다.

서원도 덩달아 눈썹을 찡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는데, 할머니가 곁에 선 서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비도 오는데, 전이나 부쳐 먹을까?”

“전이요? 좋아요.”

“바삭하게? 부드럽게?”

“전 바삭한 게 좋아요.”

“그럼 좀만 기다려.”

서원도 같이 주방으로 가 도우려고 했지만, 할머니는 제가 들어오면 괜히 일을 늘린다며 저를 내쫓았다.

정취가 좋기도 해서 전은 툇마루에서 간소하게 먹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납작한 그릇에 전을 가득 담아 오셨다. 종류는 김치전과 부추전. 두 개에다가 식초를 탄 간장 소스를 함께 준비해 주셨다.

안 그래도 두 가지 전을 다 좋아하는데, 취향에 맞춰 바삭하게 구워 주시기까지 해서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젓가락을 들자, 할머니는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모를 통통하고 하얀 병을 꺼냈다.

“난 막걸리나 좀 마셔야겠다.”

서원이 임신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술을 권하지 않고, 대신 서원의 잔에는 보리차를 따라 줬다.

보리차와 전의 조합도 좋았다. 전 한 조각, 보리차 한 모금, 비 내리는 풍경 한 번 보기. 워낙 좋은 조합이라 그런지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이 마을에 내려온 지도 벌써 이 주일이나 지났다. 저번에 도망쳐 내려갔던 시골 마을에서는 이 주일이 될 때까지도 허둥지둥거렸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빠르게 섬마을에 적응했다.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했던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든든한 조력자인 할머니가 도와주셨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낮에 할머니의 소소한 밭일 거리를 도우러 나왔다가 슈퍼 아주머니에게 찐 옥수수와 멸균우유를 받았다. 딱히 귀염받으려는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마을 사람들이 다 제게 잘해 줬다.

“……배가 나와서 그런가.”

서원은 김치전을 뜯어 먹다, 문득 든 생각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배를 내려다봤다.

이전에는 제 뱃속에 어떻게 아기가 있다는 건지 믿기지 않을 만큼 배가 납작했었다. 태아 사진을 찍어줬을 때도 ‘이런 게 있다고?’하고 놀랄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차츰차츰 흐르면서 배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열성 오메가에 남자, 게다가 아직 임신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옷을 훌렁 벗지 않으면 남들이 보기엔 제가 임신했다는 걸 모를 수준이긴 하지만, 유심히 본다면 모를 것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아이도, 그것도 모자라 손자까지 본 분들이라 이런 일엔 도가 튼 걸까? 아니면 집 주인 할머니를 통해 알음알음 소문이 퍼진 건가?

저번 마을에서 그랬던 것처럼 워낙 마을이 좁고 주민도 적어서 말이 쉽게 퍼지기 쉬운 구조였다. 동정심에 잘해 준 거라고 생각하면 좀 불편하긴 했지만, 그들이 보이는 호의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 군말 않고 받게 됐다.

그나저나…… 산부인과는 안 다녀와도 되려나? 상태는 점점 좋아지고 있고 별다른 문제는 없긴 한데, 혹여 몰라서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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