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36)

<62화>

얼떨떨하게 벽에 달린 시계를 올려다봤다. 어느새 오후 일곱 시가 되어 있었다. 반쯤 열려 있는 미닫이문 사이로 해가 저물어 가는 노르스름한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열린 틈 사이로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슬슬 풍겨오기도 했다.

음식 냄새가 풍겨와서 그런지, 저녁때가 되어서 그런지. 배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서원은 고민하다, 혹시 몰라 입덧 약을 주머니에 챙기고 방 밖으로 나왔다.

마당으로 나오자, 한가운데의 원목 평상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에 밥과 국, 고추, 쌈장, 상추 등이 정갈하게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밥그릇은 두 개였다.

‘어쩌다 이곳에서 지내게 된 것뿐이지, 식사까지 부탁하진 않았는데…….’

하물며 돈도 내지 않았고, 숙박비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당장 먹고 싶긴 했으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어 어려웠다.

한참을 문 앞에 서서 쭈뼛거리자, 할머니가 테이블 앞에 앉아 서원을 바라본 채 언성을 높였다.

“얼른 오지 않고 뭐해? 음식 다 식겠네!”

“가, 가요…….”

어쩐지 안 갔다가는 혼날 분위기라, 서원은 어정쩡하게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분위기였지만, 서원은 여전히 받아들여도 되는 건지 어려웠다. 어른들 앞에서 비교적 싹싹하게 잘 지내는 편이긴 했지만, 할머니와는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걸 받아도 되는 건지 어려웠다.

서원이 계속해서 머뭇거리자, 할머니가 먹던 것을 그만두고 서원을 힐끗 쳐다봤다.

“먹기 싫어?”

“아뇨! 그게 아니라, 저……. 지내는 동안 숙박비는 어떻게 할까요?”

“됐어. 뭔 돈을 준대. 어차피 쓰지도 않는 방이구만.”

“그래도…… 바, 밥도 주셨는데 식비라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맨날 혼자 밥 먹기도 적적했는데, 늙은이 말동무 해 준다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어. 여기 있는 동안 돈 벌기도 성치 않을 텐데 아껴야지, 안 그래?”

“…….”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할머니는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질질 끌었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서원은 그녀의 말에 왠지 울컥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심하게 대하고, 자신을 늙은이라고 칭하며 깎아내리는 것이 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서원은 도겸에게 고백한 이후로,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울적하고 절벽 끝에 선 느낌이었다.

지난 6년의 세월 간, 그의 페로몬 파트너를 했던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뭣 때문에 그의 곁을 지켰었는지 회의감이 들고,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처럼 허무했다. 분명 그동안 파트너 일 외에도 가치 있는 일을 해 왔을 텐데, 그 세월을 모두 부정당한 것 같았다.

그런데 할머니를 만나고 저처럼 도망치듯 떠나온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에, 그리고 이런 식으로 면식도 없던 타인이 저를 챙겨 주는 모습에 따스함을 느꼈다.

서원은 눈가가 뜨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숟가락을 꽉 쥐었다.

제 인생에 서도겸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떻게든 아이를 잘 낳을 거고, 돌아가서 엄마와 함께 보란 듯이 잘 살 거다. 내 인생은 내 것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려. 안 매운 고추니까 쌈장에 찍어 먹어 봐. 편식하지 말고 먹어.”

서원이 식전 인사를 하자,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을 그릇에 넘겨줬다.

서원은 그녀가 넘겨주는 음식들을 거부하지 않고 전부 다 먹었다. 종내에는 할머니께 설거지를 안 해도 되겠다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그릇을 싹싹 비워 냈다.

주머니에 입덧 약을 챙겨왔지만, 오늘은 먹지 않았음에도 속이 울렁거리지 않았다. 입에 꼭 맞는 음식을 먹는 건 드문 일이라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 * *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난 뒤, 서원은 할머니를 도와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난 뒤에 테이블과 원목 평상을 닦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할머니가 다가와선 무언가를 서원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씻어.”

“네? 이게 뭐예요?”

“이는 닦고 자야 할 거 아니야.”

걸레질하다 말고 올려다보니, 할머니의 손에 수건과 세안 도구가 들려 있었다. 세안 도구는 방금 막 사 오신 것인지 뜯지도 않은 것이었다.

이런 건 준비해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방부터 식사, 그리고 세안 도구까지 받아도 되나 싶었다. 그렇지만 받지 않으면 좀 전처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받기나 하라며 넘어가실 것 같았다.

서원은 고개를 꾸벅이며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밥을 먹여서 그런가, 아까보다 훨씬 혈색이 좋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은 밥을 먹고 살아야 해.”

“……네.”

할머니의 조언에 서원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한 말이었지만, 이전에 아파도 밥은 먹어야 한다고 했던 엄마의 말이 떠올라서 조금 마음이 따끔거렸다.

“아홉 시면 잘 거니까, 시끄럽게만 하지 말고 놀아.”

핸드폰을 해지한 마당에 누군가와 통화할 것도 없었고 이 섬에 아는 사람도 없어 누군가를 불러올 일도 없는데…….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굳이 대꾸해야 할 말은 아니라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가시고, 서원은 그녀가 챙겨준 세안 도구로 가볍게 씻고 나왔다. 평소 12시에나 잠자리에 눕는 편이라 잠도 안 오고 눈이 말똥말똥했다.

심심하니 산책을 다녀올까 싶었지만, 바깥은 달빛이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가게의 불빛도 없고 위험할 것 같기도 하고, 초행길이라 괜히 나갔다가 길을 잃어버릴지도 몰라 나가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서원은 좁은 방 안에만 있는 것도 답답해, 툇마루에 앉아 구름 한 점 없는 새카만 하늘을 바라봤다. 빛이 별로 없는 동네라서 그런가, 아니면 공기가 맑아서 그런가. 서울과 달리 별이 엄청나게 잘 보였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 잠시 살았던 시골에서도 별이 잘 보였을 것 같은데, 그때는 워낙 정신이 없고 바쁘기도 해서 하늘을 올려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나 보다. 이렇게 밤하늘을 올려다본 기억이 없었다.

“휴우…….”

서원은 심호흡하듯 숨을 크게 내뱉곤, 잠시 상념에 잠겼다.

도겸이 저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해지하고, 엄마에게 가벼운 문자 한 통밖에 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제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바쁘고 쫓기듯 살았던 때에서 잠시 여유를 찾은 느낌이었다.

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됐다는 것도 변화였다.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저처럼 실연당한 사람이 꽤 많을 것이었다. 물론 저는 그를 열네 살 때부터 좋아했으니 12년이나 좋아했지만……. 아무튼, 흔한 일일 거였다.

6년간 파트너를 했던 것도. 그 기간을 도려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암울했었지만, 그로서 엄마의 집을 사 드리기도 했으니 마냥 헛된 일만 한 것도 아니었다. 페로몬 파트너를 해 가며 번 돈으로 산 거라고 하면 하지 말라고 뜯어말렸겠지만, 스물여섯에 부모님께 집을 사 드리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니까…….

그리고 그간 한국에서 손에 꼽는 한국 대학교도 졸업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산 건 아니었다. 제가 너무 미련하게 그의 곁에만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아무튼 마냥 쓸모없는 일만 한 건 아니라는 거였다.

게다가 저는 그리 나이가 많지 않기도 하고. 아이를 낳고 돌아가면, 그때는 조금 더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다르게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도망치려고 떠나온 곳이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의외로 많은 것을 얻고 깨달은 기분이었다.

배에 올라탈 때까지만 해도, 오늘 밤은 우울해서 베개를 눈물로 적실 줄 알았는데.

이제 막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도 떠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젊은 놈이 왜 이렇게 굼떠?”

“으으……?”

한참 꿀맛 같은 잠을 자고 있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신을 수면 위로 억지로 끌어올렸다.

부스스 눈을 뜨니, 꽉 닫고 잤던 미닫이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캄캄했던 하늘은 어느새 구름 한 점 없는 파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벌써 아침인가. 시간을 확인하려고 벽장 시계로 시선을 옮기려는데, 할머니가 허리를 굽혀 서원의 팔을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일어나서 아침밥 먹어!”

“아침…… 밥이요?”

“그래!”

밥보다는 잠이 더 고팠기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이미 음식을 차렸는지 문틈 사이로 구수한 음식 냄새가 흘러왔다.

어쩔 수 없이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자, 할머니는 한심하다는 듯 서원을 내려다보다 방 밖으로 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계를 보니, 오전 6시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어쩐지 이른 것 같더라니…….”

어제 생각이 많아 잠을 설치다 한 시쯤에야 잠든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아침잠이 없어진다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구시렁거리다 바깥으로 나오니, 어제처럼 마당의 원목 평상 위로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메뉴는 어제 차려 주신 것과 비슷했다. 바뀐 게 있다면 포슬포슬하게 찐 감자가 추가됐다는 점이었다.

서원은 자리에 앉으며 할머니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까진 안 챙겨 주셔도 되는데요…….”

“아침을 안 먹어? 그러니까 비실비실하지.”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살이나 찌우고 얘기하든가. 얼른 먹기나 해.”

“…….”

할머니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듯 한소리를 하고는, 수저를 들었다.

서원은 그녀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살이나 찌우고 말하라는 것이 이전에 도겸이 했던 말과 비슷해서. 순간 그와의 추억이 떠올라서 잔잔한 수면 위에 돌덩이를 던진 것처럼 파동이 일었다.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숟가락도 들지 않고 가만히 있자, 할머니는 이번에도 서원이 눈치 보여 밥을 먹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는지 한소리를 더했다.

“애 생각해서라도 삼시 세끼는 챙겨 먹여야 해. 임신하면 애한테 영양분이 다 가서 흡수되는 것도 별로 없어.”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겸을 떠나 다른 사람들처럼 멀쩡하게 살아 보기로 노력하기로 했으니까. 그가 불현듯이 떠올라도 잊고 평범하게 행동해야 했다.

서원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수저를 들고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비워 냈다. 어제와 같은 비슷한 메뉴였으나, 이번에는 조금 속이 울렁거려서 입덧 약을 챙겨 먹었다.

아이도 참 변덕이 심하지. 이런 일로 저를 괴롭히는 게 도겸을 닮은 아이인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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