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36)

<61화>

빠아아아앙……!

철썩, 철썩. 물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바다를 가르고 섬에 도착하자마자 서원은 그대로 몸을 수그렸다.

“우, 우웨엑…….”

“젊은 양반이 왜 이렇게 비실비실혀? 등 좀 두드려 줘?”

땅을 밟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속을 게워 내는 서원의 모습에, 같은 배를 탔던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쯧쯧거리며 혀를 찼다.

“아, 아니요……. 괜찮, 으욱…….”

“괜찮기는. 다 뒤져 가는구만.”

서원은 괜찮다고 거절하려 했지만, 다시 치솟는 토기에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말하다 말고 허리를 숙이자 할머니가 혀를 차며 등을 두드려 줬다.

턱턱턱, 등을 두들기는 소리 뒤로 끼룩거리며 우는 새소리가 들렸다. 그럴 리 없는데도 저 병신 새끼, 하고 저를 비웃는 소리 같았다.

입덧과는 별개로 배가 너무 많이 흔들려서 뱃멀미를 거나하게 해 버렸다. 서원은 도겸과 몇 번 배를 타 본 적이 있기에 뱃멀미가 있다고는 생각을 안 해 봤었다. 그런데 그때 탔던 것들은 커다란 크루즈 같은 것이라 흔들림이 없었던 거였다. 통통배라고 불리는 작은 배를 타고 나니 제가 여태까지 탄 것은 배가 아니었구나, 깨달음을 얻었다. 흔들림이 장난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죽을 것 같았지만, 배에서 내려 속을 게워 내니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서원은 입가를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며 파리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 섬은 사면이 바다인데도, 워낙 작고 알려지지 않은 섬이라 선박장에 있는 배도 몇 채 없었다. 섬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고층 건물 하나 없고 파랗고 빨간 지붕의 허름한 주택만이 띄엄띄엄 보였다.

“……저번에 지내던 곳은 시골이라고 하기도 뭣했네.”

서원이 작게 헛웃음을 흘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도 읍내 수준의 번화가로 가려면 꽤 걸렸기 때문에 시골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그런 수준도 되지 않았다.

끝으로, 더 끝으로 점점 밀려나 여기까지 왔다. 저도 처음 들어보는, 무슨 섬이라고 했더라? 아무튼, 아이를 낳을 때까지 몇 개월. 그 기간만 지내려고 온 건데 벌써 뭐하고 지낼지 막막했다. 인터넷도 잘 안 터질 것 같은데…….

하루 만에 결정하고 무작정 떠나 온 것이라 계획은 그게 끝이었다. 암담한 눈으로 주변을 눈에 담는데, 등을 두드려 주던 할머니가 살짝 물러나며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이제 좀 진정이 돼?”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젊은 총각이 여기까지는 왜 왔어? 젊은이들은 잘 안 오는데. 혹시 누구 손자인가?”

“그런 거는 아닌데, 여기서 좀 지내려고요…….”

“여기서? 그게 무슨 사서 고생이야? 편한 거 하나 없을 텐데?”

“뭐……. 젊어서는 사서 고생도 한다잖아요.”

서원은 고민하다가 어색하게 너스레를 떨며 작게 웃었다. 자초지종 설명하기 어렵기도 했고, 저번의 경험으로 괜히 입을 놀렸다가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한심해할 시선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말했건만, 의외로 할머니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하긴, 요즘 애들 뭐시기……. 한 달 살기인가 뭐 한다고 우리 손자도 제주도 가서 그런 거 한다던디.”

“아…….”

“근데 시방, 거기는 제주도고. 여기는 묵을 데도 없을 텐디? 내가 한번 물어볼까?”

“아, 아뇨. 제가 해도…….”

“이제 보니까 홑몸도 아닌디 뭘 그렇게 힘들게 살어. 서로 돕고 살아야지?”

아까부터 도움을 많이 받는 것 같아서 이제 정말 괜찮다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며 무르려고 했지만, 홑몸도 아니라는 말에 서원이 멈칫 몸을 굳혔다.

배도 많이 나오지 않아서 임신한 오메가라는 걸 알아보는 이는 몇 없었다. 매일 같이 마주하는 서도겸마저도 몰랐다.

그런데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제 몸 상태를 들켰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품이 큰 옷을 입어서 보이는 것도 없지 않나?

서원이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할머니를 바라보자, 그녀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총각 같은 애, 봐서 알아.”

“…….”

“금방 저녁이고, 그때 되면 돌아다니기도 힘드니까 얼른 찾아보자고.”

할머니는 껄껄거리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서원은 멀어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발바닥에 끈끈이라도 붙은 것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 같은 사람을 본 적 있다니……. 어떻게 들으면 욕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었지만, 서원에게는 아니었다.

마음은 얻지 못해도 도겸의 곁에만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덜컥 아이가 들어섰고, 그가 저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를 품고 고백했다가 된통 차여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아이를 지우라고 할 것 같기까지 해서 도망쳤는데…….

나랑 비슷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에 왜인지 모를 안도감을 느껴 버리고 말았다. 세상에서 제일 운 나쁜 사람이 된 것처럼 침울했는데, 이 정도는 별것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뭘 멍하니 있어. 얼른 안 따라와?”

돌덩이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한참 앞서갔던 할머니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얼음 땡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말에 갑자기 몸에 긴장이 탁 풀렸다. 서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할머니의 뒤를 쫓아갔다.

“가, 가요……!”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는데 조금 힘이 났다.

도망치듯 떠나온 곳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위로를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섬에서의 첫 출발이 생각보다 좋았다.

* * *

“흠……, 이걸 어쩌면 좋대.”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할머니의 말대로, 섬을 오가는 관광객도 없으니 숙박업소도 없었다. 다른 것 필요 없이 몸 누울 수 있는 곳만 있으면 됐는데, 이방인을 쉽게 받아들이는 이도 많지 않았다. 아무리 돈을 준다고 해도 생판 모르는 사람을 재워 주기 꺼려지는 건 당연했다.

아무 섬이나 찍어서 온 거였는데 섬을 잘못 선택한 걸까? 또 그 뱃멀미를 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하나?

다른 섬으로 가는 건 그렇다 쳐도, 다시 그 지옥 같은 배를 타는 건 두려웠다. 서원이 얼굴을 파랗게 물들인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할머니가 쯧쯧 혀를 차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집에서 지낼 테야?”

“네……? 할머니네 집에서요……?”

좌절에 물들어 있던 서원이 할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하나. 빈방이 있긴 하거든. 창고로 쓰던 방이라서 치우기도 해야 하고 좁긴 한데……. 누울 만큼 공간은 있어.”

“저, 저야 재워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할머니의 설명에 서원이 빠르게 화색을 보이며 눈을 빛냈다. 정말 이렇게 돌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창고 방이라도 감지덕지였다.

서원이 눈을 빛내자, 할머니는 무감하게 서원을 바라보다 “따라와.”하고 먼저 앞장섰다.

할머니는 파란 지붕의 허름한 집으로 서원을 데려오더니, 주방 옆에 있는 작은 미닫이문을 열고 불을 켰다. 전등이 몇 번 깜빡거리다 뒤늦게 불이 들어왔다.

불이 들어오자, 노란 장판이 깔린 방이 보였다. 안 그래도 좁은 방처럼 보이는데, 이불이며 노랗게 변색된 선풍기, 책, 옷가지, 골동품 등……. 온갖 잡동사니가 있어 더 좁아 보이는 방이었다.

서원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데, 할머니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많이 좁긴 하지? 원래는 창고로 쓰던 방인데, 있던 물건 주방이랑 마당으로 대충 옮기고 써. 이불은 거기 있는 거 쓰면 되고. 얇은 이불이라 덥진 않을 거여.”

“네, 네.”

“쉬어.”

할머니는 설명이 끝났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방을 지나쳐 그 옆의 방으로 들어갔다.

쉬라고 하기에는 방에 있는 짐도 옮기고 청소도 해야 할 듯한데……. 그렇지만 방을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기 때문에 군말 없이 안에 있는 짐들을 옮겼다.

다행히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물건들이 무겁지는 않아서, 금방 옮길 수 있었다.

서원은 걸레와 청소기를 찾아내 방을 구석구석 닦아냈다. 아예 관리를 안 하던 방은 아니었는지, 청소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흐어……. 다 했다.”

바닥을 먼지 한 톨 없이 반짝반짝하게 닦아낸 서원이 허리를 끙 일으키며 이마를 닦아냈다. 근래에는 일도 하지 않아서 그런지, 청소를 꼼꼼하게 해내고 나니 묘한 뿌듯함이 몰려왔다.

그렇지만 뿌듯함은 잠시일 뿐이고 금방 피로가 몰려왔다. 배를 타고 오느라 심하게 멀미를 하고 속을 게워 낸 상태인 데다가 임신까지 한 터라 바삐 움직이니 조금 피곤하고 힘들었다.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피곤해서 더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개어져 있는 이불을 펴지도 않고 그 위에 몸을 기대 눕는데, 등을 붙이기가 무섭게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다 치웠어?”

“앗, 네.”

할머니의 등장에 서원은 눕기가 무섭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할머니가 검사하듯 방 안쪽을 쭉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비실비실해 보여서 잘 치웠을까 싶었는데, 깨끗하네. 좁긴 해도 먹고 자는 데는 문제 없을 거여.”

“치우니까 생각보다 넓더라고요.”

“그래. 이제 다 했으면 나와서 밥 먹어.”

“밥이요?”

갑자기 웬 밥?

서원이 되물었지만, 할머니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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