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퇴근합니다. 다들 일찍들 들어가세요.”
도겸은 여섯 시가 땡 하자마자 전무 이사실을 박차고 나왔다.
워낙 일이 많다 보니 정시에 퇴근하는 일은 흔치 않았는데, 그것도 정각이 되자마자 칼퇴근하는 도겸의 모습에 직원들이 많이 놀랐다. 하도 퇴근길에서 보기 어려운 얼굴이다 보니 ‘나 오늘 이사님 처음 봐.’하고 소곤거리는 작은 목소리도 몇 들렸다.
직급도 직급인데다, 이목을 끄는 그의 외모 덕에 퇴근만으로도 관심이 쏠렸지만, 도겸은 그것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차에 올라탔다.
“윤서원 부모님네 집으로 출발해.”
“네.”
운전기사는 깔끔하게 대답하고는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몇 번 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굳이 주소를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회사와 서원의 부모님네 집 둘 다 강남권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 멀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라 교통 체증이 조금 있긴 했지만, 그래도 꽤 이른 시간에 그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났으니 이제쯤이면 윤서원이 시골로 내려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워낙 어머니를 좋아하는 녀석이기도 하니 이 집에 있을 확률이 반절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만일 어머니 혼자 있다면 어색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윤서원의 행방에 관해 묻기에는 편이하겠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도겸은 차에서 내려, 천천히 벨을 눌렀다.
띵동!
울리는 벨소리가 청량했다.
벨을 누르고 나서야 현실감이 몰려오면서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윤서원이 제게 고백하던 날의 기분이 이랬을까? 들뜨는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힘들었다.
오기 전에 매무새를 가다듬긴 했으나 제 모습이 봐줄 만한지 걱정이 되고, 나이 들어 보이지 않게 옷을 가볍게 입고 나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서원이 이지환을 좋아한다고 했던 게 거짓말이었던 걸 알아챘는데도 신경 쓰였다.
그렇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무를 수도 없으니 이전에 서원이 좋다고 칭찬했던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기다리는데, 안쪽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다소 거칠게 쾅! 하고 문이 열리더니 빠른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저인 걸 알고 서원이 급하게 뛰쳐나오는 걸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지만, 제가 고백하려는 걸 알아채고 뛰어나오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저 좋을 대로 생각하며 입꼬리를 슬며시 올릴 때였다.
“서원아!”
“……어머니?”
문이 열리고 보이는 것은 서원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였다.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서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 나온 것 말고도……, 그녀의 모습이 조금 낯설어서 놀랐다.
그녀는 급하게 막 뛰어왔는지 슬리퍼는 짝짝이였고, 늘 단정해 보이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도 부스스했고 피부도 푸석푸석하고……. 눈 밑에 진 다크서클이 유난히 짙었다.
무엇보다도 제가 아닌 서원을 다급히 부르는 모습이 이상했다.
“어……, 도련님?”
도겸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눈만 깜빡이는 사이, 상황을 파악한 그녀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길래 윤서원을 저리 급하게 찾는 거지? 도겸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서원이 보러 오셨어요?”
“네, 그런데요. 왜 그러십니까?”
도겸이 덤덤하게 대답했으나 그녀는 들은 건지 안 들은 건지 모를 눈을 뜨고 있었다. 두 눈이 너무나도 공허해서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어디 아프신 거 아닌가. 도겸이 유심히 그녀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데, 그녀가 쩍쩍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서원이…….”
“…….”
“서원이 좀 찾아 주세요.”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녀가 도겸을 올려다보며 울먹거렸다.
방금까지는 어떤 표정이라고 말하기가 어렵게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을 터트릴 것처럼 콧잔등을 붉게 물들이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모습에, 도겸은 놀란 얼굴로 다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찾아 달라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집에도 안 들어오고, 연락도 안 된 지 좀 됐어요.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핸드폰 번호도 바꾸고…….”
“…….”
“경찰서에 실종 신고도 했는데 성인이니까 며칠 더 지켜보라고만 해요……. 근데 서원이가 그런 아이가 아니거든요.”
“……실종신고요?”
갑자기 이게 무슨?
핸드폰 해지했다는 건 배 비서를 통해 들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진 않았다. 핸드폰이 고장 난 걸 수도 있고,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의 어머니까지 서원과 연락이 안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실종 신고까지 할 정도로.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철렁거렸고 온몸의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듯했다. 믿기지 않았으나 그녀의 모습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윤서원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서원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사고? 도저히 평정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어, 언제 사라졌는데요? 제가 당장 찾아볼게요.”
“며칠 됐어요. 마지막으로 본 건…… 13일이었어요.”
“…….”
날짜를 들은 도겸이 멈칫 몸을 돌덩이처럼 굳혔다.
13일. 특별한 날짜는 아니었으나 그날은 분명…….
“오전에 잠깐 볼일이 있다고 나갔었는데……. 그러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메시지 준 게 마지막이에요.”
“…….”
“뭐 좀…… 알아요?”
안색을 싸늘하게 굳힌 도겸을 본 그녀는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는지 조심스레 물어왔다.
대답해야 하는데 입에 추가 달린 것처럼 쉽사리 입이 열리질 않았다.
모를 리가 없었다. 그날은…….
“그날 오전에 저랑…… 같이 있었는데요.”
윤서원이 제게 고백한 날이었다.
도겸은 마치 자백을 해내는 죄인처럼 몇 번을 입술만 달싹거리다, 한참 후에야 겨우 목소리를 내자, 그녀는 생각하지도 못했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확장했다.
“도련님이랑 있었다고요? 그, 그날 서원이가 했던 말 없었어요?”
그녀가 도겸의 손을 꽈악 쥐었다. 아들을 찾을 단서 하나라도 잡고 싶은 듯 바들바들 떠는 손이 애처로웠다.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아들을 찾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어떤 것이든 털어놓아야 했다. 그렇지만 차마 그날 서원이 제게 사랑한다고, 그리고 아이까지 임신했다고 고백했다는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날 제게 윤서원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몇 년 동안 줄곧 저만 좋아했다는 진심 어린 고백에 대답은 하지도 않았고,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험한 욕설까지 했던 게 기억났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연 제가 병신이라고,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며 싸늘하게 이사실을 빠져나가던 윤서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저 때문에 떠난 걸까. 저와 페로몬 파트너의 연을 끊겠다고 하고 외딴 시골로 내려갔던 윤서원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같지 않았다. 지금은 핸드폰도 아예 해지한 상태이고 심지어 어머니에게까지 행방을 말하지 않고 떠났다. 저를 떠나겠다고 지독하게 마음을 먹고 간 것이 틀림없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사고가 난 거라면? 나쁜 사람에게 해코지라도 당한 거라면?
그것도 아니라……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라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구보다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만큼은 고장 난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 * *
“하아아…….”
고백한 당일, 서원은 도겸의 회사를 박차고 나오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신을 힐끗힐끗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전무 이사실을 나와서 건물을 빠져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기가 무서웠다. 도겸에게 버려지는 게 무서워 아이를 몰래 키우려고 했었는데, 섣불리 고백했다가 그의 냉담한 반응을 두 눈으로 보고 나니 슬프고 힘들어서 아무것도 할 의욕이 들지 않았다.
줄곧 도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그저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에게 차이고 나니 단순한 실연의 상처 수준이 아니라, 인생의 목표 하나를 잃어버리고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해……. 진짜 모르겠어…….”
마음이 허했다. 엄마의 곁에서 진심 어린 위로를 받으면 분명 마음이 좀 나아지겠지만, 서울에 있다가는 도겸이 찾아와 아이를 지우라고 할지 몰랐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폭탄 선언에 당황해서 잊어버린 걸 수도 있었다. 피임약을 먹지 않았냐는 둥 욕설을 지껄이며 창백한 얼굴을 하던 그의 반응을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요구를 해올 게 뻔했다.
“그건 안 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서원은 퍼뜩 눈에 힘을 주며 정신을 똑바로 붙잡았다.
이전에 의사가 이럴 때일수록 더 단단해져야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가 무너져 버리면 아이 또한 끝나는 것이었다.
서원에게 도겸이라는 존재는 인생의 반절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사랑하는 이였지만, 그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제 아이였다. 찰떡이는 꼭 잘 지켜서 낳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나.
순간 어제 엄마가 만일 차이게 되면, 그래서 아이를 지우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해외로 뜨면 되지 않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와 아이를 위해서 훌쩍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돈이고 뭐고 뒷생각 하지 말고 떠날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제 몸이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임신 중에 비행기를 탄다면 유산의 위험이 커질 것이다. 비행기가 아니라 크루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젠장, 도망칠 곳도 없나. 참담한 상황에 서원은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어딘가…… 꽁꽁 숨을 수 있는 곳이 있지 않을까?
저번에는 너무나도 쉽게 행방을 들켰지만, 이전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들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저번에는 제 명의로 집을 구했고, 바뀐 번호도 제 이름 앞으로 되어 있었다. 또한 프리랜서 일을 구한답시고 연락처를 뿌리고 다녔으니까. 그가 제 정보를 찾는 건 손 하나 까딱할 정도로 쉬운 일이었을 터다.
지난날의 부주의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원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다가,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절대로 쉽게 들키지 않을 거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갈 거야.
굳게 다짐한 서원은 가장 먼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