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도겸도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우성인 사람끼리 만나 특별한 형질로 발현할 수 있게 됐다는 건 고맙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부모님께 지지를 받았다고 해서 제 인생까지 재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꼭두각시처럼 그들이 만나라는 사람을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제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데 강요하는 거란 생각은 안 드세요?”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엄마는 다 너 좋으라고…….”
“어머니. 저 오늘 피곤해서 링거까지 맞았어요. 더 얘기하실 거면 이만 일어날게요.”
“아, 알았어! 이 얘기는 그만할게. 그런데…….”
더는 음식이 목구멍으로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기껏 링거를 맞았는데 더 피곤해지고 머리만 더 아파질 것 같았다.
도겸은 피곤하다는 듯 눈덩이를 꾹꾹 누르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미애가 다급히 붙잡았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머뭇거리다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러면 적어도 이런 보고가 들어오게 하지는 말았어야지.”
보고? 도겸이 무슨 말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미애가 들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이게 뭐지. 도겸이 미심쩍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건…….”
“그 오메가, 최근까지 계속 만났던데. 기자가 찍어서 뒤처리하기 얼마나 귀찮았는지 아니?”
안에는 제가 서원을 찾아갔던 날들의 사진이 여럿 들어 있었다.
시골에서 만났던 때, 서원이 잠시 병원 때문에 서울에 온 걸 알고 집에 찾아갔던 날, 함께 병원에 가서 일방 각인 판정을 받았던 날.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사에서 만났던 날의 사진의 사진이 있었다.
파파라치가 몰래 찍은 것이라서 각도나 화질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와 서원의 얼굴만큼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
더는 윤서원을 만나지 않기로 했다고, 이런 사진 찍힐 일 없을 거라고 대꾸할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목구멍에 처박힌 것처럼 나오지 않고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 속 제 모습은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윤서원과는 인생의 반절을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함께해 온 세월이 길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 윤서원을 조금 더 특별하게 여기는 거라고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진 속의 제가 윤서원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단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내가…… 이런 눈으로 윤서원을 보고 있었다고?’
서원이 예전부터 줄곧 저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 달가워하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 왜 고백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몇 년을 함께 지냈으니 제 성격을 알 텐데. 아이 생긴 것까진 그렇다 쳐도 마음을 고백한 건 어리석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런데 타인의 시선에서 제 모습을 보니, 서원이 왜 고백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이런 눈으로 윤서원을 바라봤으니까.’
사진 속의 자신은,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애틋한 눈으로 서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제가 윤서원을 이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던 거지? 그와 함께 있을 때면 평소보다 기분이 들뜨고 좋았으니까 표정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사진 속의 저는 단순히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애틋한 시선이었다.
머릿속은 서원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수천 번을 부정했는데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알려 주는 것 같았다. 홧김에 다시는 윤서원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는데, 잘못된 선택을 한 거라고 머리를 때리는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윤서원을 좋아했던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제가 윤서원에게 했던 모진 행동과 말들이 카메라 필름 되감듯 떠올랐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윽…….”
도겸이 머리를 붙잡으며 작게 신음했다.
내가 윤서원에게 무슨 짓을……. 이제야 알아챈 게 이상할 수준이다. 어렸을 적부터 계속해서 윤서원을 신경 써서 맛있는 걸 먹여 주고 싶었고, 같이 있고 싶었고, 잠깐도 떨어지는 게 싫어서 페로몬 파트너라는 명목으로 데리고 다니기까지 했다. 사실 잠자리만 할 수 있으면 됐는데도 그랬다.
도겸이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리며 작게 신음하는데, 미애는 그것을 보지 못한 듯 불만스럽게 팔짱을 끼며 제 할 말을 했다.
“이번엔 그 아이 집에서 자고 오기까지 했다면서? 사진 찍힌 거 엄마가 정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
“여태까지는 장난감으로 뒀다고 해서 놔뒀지만, 이제는 그만…….”
“누가 장난감이에요.”
넋이 나가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는데, 장난감이라는 단어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도겸이 사진에서 시선을 떼고 싸늘한 눈빛으로 미애를 바라보자,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한 번도 장난감이었던 적 없어요.”
“아, 엄마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지? 성적으로 끌려서 만나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엄마가 걱정이 많아서 그래. 기분 나빴으면 미안한데, 좀 조심하라고.”
“…….”
“엄마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도겸이 말도 없이 싸늘하게만 있자, 미애가 조심스럽게 대답을 요구했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앞으로 윤서원을 볼 일 없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고. 빈말이든 진심이든 그렇게 대답하고 넘어가는 게 편하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목구멍에 뜨겁고 커다란 것이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불과 며칠 전에 그녀 앞에서 열성 오메가는 성적으로 끌리지도 않는다며, 그런 의미로 만나는 것도 아니라며 술술 말했던 게 거짓말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도겸은 애꿎은 입만 벙긋거리다가 끝내 무릎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통화 좀 하고 올게요.”
“…….”
대답을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애가 고개를 들어 도겸을 바라봤다.
따라붙는 시선에서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냐며 당황스러워하는 눈빛이 뚝뚝 묻어났다. 도겸은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뒤돌아 그대로 독채를 빠져나왔다.
드르륵, 탁.
등 뒤로 미닫이문을 닫은 도겸은 작게 숨을 내뱉었다.
“하…….”
그대로 걸어 나온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 윤서원에게 화면에 띄웠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순간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울먹거리며 다시는 볼 일 없게 해달라고 부탁하듯 말하던 윤서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파 보였기에 연락하면 안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제가 그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으니 연락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결론을 내린 도겸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신 후 걸어주세요.
그러나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윤서원의 것이 아닌, 기계의 것이었다.
“……씹.”
도겸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핸드폰 액정을 바라봤다.
익숙한 흐름이었다. 저번에도 윤서원은 저와 파트너를 끊겠다고 한 다음 핸드폰 번호부터 바꿨었다. 꼭 제가 전화할 거라고 예상한 것처럼 그랬다.
제가 찾으려고 하면 못 찾을 게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지……. 당장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목소리를 듣는다고 페로몬 체증이 낫는 것도 아니니 일방 각인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좋아하니까, 윤서원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쓸 데도 없는 핸드폰이라며 바닥에 내던질 뻔했으나, 근처에 식당 손님이며 직원이 있는 걸 상기했다. 폭력적인 행위를 겨우 멈춘 그는 이성을 되찾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배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서원 연락처 알아봐. 지금 당장.”
도겸이 으르렁거리며 지시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 * *
도겸이 자리에 돌아오고 난 후로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더는 그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기색을 풀풀 내풍기긴 했지만, 매번 모르는 척하며 속을 들쑤시기 마련이었는데. 제가 잠시 나갔다 온 사이에 무슨 변화라도 있던 건지 조용했다.
왜 갑자기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더 그 이야기를 꺼내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다행이었다.
들어가지도 않는 음식을 겨우 입에 욱여넣고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미애가 도겸을 돌아봤다.
“아들, 맛있게 잘 먹었어. 고마워.”
“네. 그러면 이제 들어가세요.”
“……도겸아.”
이만 헤어지고 회사로 복귀하려고 하는데, 미애가 나지막하게 이름을 불렀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 진지하게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도겸이 가만히 그녀를 돌아보는데, 그녀는 평소 쓸데없는 말도 잘하면서 그러지 않고 눈에 띄게 머뭇거렸다. 립스틱을 짙게 바른 붉은 입술이 몇 번 달싹거렸다.
“아니다. 아니야. 너무 무리하지 말아.”
“…….”
그렇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시시한 내용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궁금했으나, 어쩐지 아까 이야기했던 선 자리 이야기를 또 하시려고 했던 것 같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도겸은 어머니가 차에 올라탈 때까지 배웅하고, 그녀의 차가 멀리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아까부터 줄곧 신경 쓰였던 것을 배 비서에게 물었다.
“윤서원 번호는 알아냈어?”
“아뇨. 윤서원 씨 명의로는 개통된 핸드폰이 없더라고요.”
“……대포 쓰나?”
요즘 같은 시대에 핸드폰이 없다니. 그렇게 살기도 힘들 것 같아 대포의 가능성부터 생각하게 됐다.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을 들은 배 비서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윤서원 씨 성격에 그러진 않을 것 같은데요.”
“…….”
그건 맞는 말이긴 했다. 윤서원은 범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럴 만한 배짱도 없었고.
금방 납득한 도겸은 배 비서를 바라보며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런데 무슨 핸드폰 해지한 걸 이제야 알아 와? 내가 핸드폰 해지했다는 말 들으려고 기다린 줄 알아?”
“죄송합니다. 저번에 추적하던 거 다 그만두라고 하셨어서……. 다시 사람을 붙일까요?”
“…….”
맞다. 고백받은 날에 윤서원이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해서 그대로 추적을 그만뒀었지.
홧김에 그만두게 한 것이 후회됐다. 도겸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배 비서가 금방 분위기를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됐어, 둘 중 하나지 뭐.”
도겸이 그럴 필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 집에 있거나, 시골 집에 있겠지.
친구를 만나 노는 것보다 집에서 즐기는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특히나 임신한 몸이었다. 임신 전에도 비실비실했는데 이후로는 몸 관리도 해야 했으니 어딜 돌아다니고 있진 않을 거였다.
도겸은 서원의 행방 찾기를 그만두고 오늘 일정을 확인했다. 오후에 빠져서는 안 되는 신규 프로젝트 회의가 있었다.
하필 오늘 같은 날에……. 탄식이 절로 나왔지만, 도겸은 금방 아쉬움을 삼켜냈다. 윤서원이 어디 하늘로 솟는 것도 아니고, 조급할 필요 없었다. 오늘 저녁에. 그때 그를 찾아가면 됐다.
마음을 다잡은 도겸은 그대로 회사로 복귀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왠지 모를 초조함이 엄습했지만, 괜히 마음이 급해서 그런 것이라며 애써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