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생각할 틈도 없이 충동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입술에 보드라운 촉감이 닿자마자 급히 몸을 일으키긴 했는데,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제 아래에서 발갛게 익은 서원의 얼굴이 보였다. 안 그래도 열이 오른 데다 울어서 발개진 얼굴이었는데, 정말 불타는 고구마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화르륵 타고 있었다.
실수였다고, 제가 잘못했다는 말을 해야 했는데…….
“……네가 질질 흘려서 그런 거야.”
“…….”
너무 당황해서, 도겸은 제가 입맞춤한 것을 서원 탓을 해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겸은 도망치듯 숙직실에서 뛰쳐나왔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고용인과 어머니가 제게 말을 걸었는데 대꾸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제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도겸은 침대에 다이빙하듯 누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평소 귀엽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놀리는 게 재밌기도 했고, 같이 있으면 좋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쪽으로 서원을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윤서원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었더라면 모를까, 제가 왜 그에게 뽀뽀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앞으로 윤서원을 어떻게 보지?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서는, 어처구니가 없게도 또 윤서원을 마주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상황이 어색해지기 전에 빨리 돌아가서 사과해야 할까 싶었지만, 지금은 차마 얼굴을 볼 자신이 들지 않았다.
저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그것도 중학생밖에 안 된 놈한테 그런 파렴치한 짓을 했다는 걸…… 스스로 용서할 수가 없었다.
도겸은 애꿎은 침대를 팡팡 때리다 그대로 늘어졌다.
생일인데…… 죽고 싶었다.
* * *
생일 파티는 느지막한 시간이 되어서야 끝났다.
낮에 윤서원과 그런 짓을 한 후라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지만, 큰 실수 없이 파티를 잘 끝냈다. 차라리 바빠서 윤서원과의 일을 조금 잊고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자려고 방에 혼자 누워 있자니 정신이 너무 또렷해서 잠이 오질 않았다. 눈만 감으면 입술에 닿았던 보드라운 촉감이 떠올라 수치심에 죽어 버리고 싶었다.
‘……물이나 한 잔 마시고 자자.’
자기 전에 따듯한 물을 마시면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떠올린 도겸은,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 일 층으로 내려갔다.
주방으로 가는데,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곳에 인영이 보였다. 윤서원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불도 켜지 않은 채로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못 본 척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마치 초상이라도 난 것 같은 암울한 분위기였다. 왜 저러고 계시는 거지? 도겸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아……. 도련님.”
말을 걸었을 뿐인데, 그녀는 크게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해선 안 될 짓을 하다가 들킨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리 소스라치게 놀라는 건지…….
“이 시간에,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아……. 잠이 안 와서 잠깐 앉아 있었습니다. 곧 들어갈 겁니다.”
아주머니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얼굴이 영, 그냥 잠이 안 와서 앉아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어두컴컴한 와중에도 그녀의 얼굴에 근심과 걱정거리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평소라면 아주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오늘 윤서원과 그런 일이 있었다 보니 신경이 쓰였다.
설마…… 윤서원이 저와 있었던 일을 아주머니한테 말했나?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전전긍긍하던 녀석이었으니 말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럼 혹시 아파서 그런가? 파티 준비가 끝나고 병원 가지 않았나? 병원에서 안 좋은 진단이라도 받은 걸까?
아까는 입맞춤한 것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는데, 서원이 심각하게 아픈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심장이 또 철렁했다.
아까 제가 숙직실에 들어가기 전에 소리도 없이 울고 있었으니, 또 혼자가 되어 울지는 않았는지. 괜찮아진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다시 아파하진 않았는지. 그런 게 궁금하고 걱정됐다.
당장 숙직실을 찾아가 서원의 상태를 보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그리고 그런 일을 벌여 놓고 무턱대고 찾아가기가 조금 그랬다. 그래서 도겸은 은근슬쩍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아주머니네 아들……. 좀 아픈 것 같던데요.”
“아……, 보셨어요?”
근심거리가 그게 맞았던지, 그녀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불치병이라도 걸린 걸까? 아니면 돈이 무척이나 많이 드는 병? 그런 거라면 우리 집안에서 후원을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도겸은 짧은 찰나에 수많은 방법을 떠올리다, 일단 병명부터 알아내자 싶어졌다.
“많이 아픈 거예요?”
“아픈 건 아닌데……. 열성 오메가로 발현했다고…….”
“……열성 오메가요?”
“원래는 베타로 발현할 확률이 높았다는데, 주기적으로 알파랑 접촉 있었던 것 같대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 하아…….”
“…….”
평소에는 사적인 이야기를 안 하는 아주머니였으나, 속이 갑갑한지 도겸에게 한탄하듯 털어놓았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알파랑 접촉이 있었다고? 윤서원과 오랜 시간 친하게 지냈다 보니 그의 친구 관계 정도는 섭렵하고 있었다. 녀석의 친구 중에는 아직 발현하지 않은 녀석이 대부분이었고, 중에 알파가 몇 있긴 했지만 형질을 바꿀 정도로 자주 만나는 사람은 없었다.
제가 알기론 그런데, 도대체 어떤 영향을…….
‘설마, 나 때문에 그런 건가?’
이전에 우성 알파로 발현했을 때, 발현하지 않은 사람과 긴밀한 접촉을 하면 오메가로 발현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는 말을 듣긴 했다. 그렇지만 평소처럼 있으면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페로몬을 쏟아부어야 그런 사고가 일어나는 거였다.
페로몬 조절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왔는데……. 설마 제가 무의식중에 윤서원에게 페로몬을 쏟아붓고 있었나?
딱히 그런 기억은 없었지만, 윤서원이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묻히고 다니는 걸 별로 본 적이 없었다. 아주 가끔 그 친구라는 알파 놈의 페로몬이 살짝 묻으면 그게 썩 불쾌해서 제 것으로 덮어 주곤 했었다. 윤서원은 형질이 발현하지 않아서 그걸 몰랐고.
아주 조금만 그랬는데…… 정말 저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거라고?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윤서원이 열성 오메가로 발현하면서 페로몬을 터트린 것 때문에 제가 그에게 입맞춤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내가 윤서원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뽀뽀하고 싶더라.’
그렇게 합리화를 했지만, 그날 이후로 서원의 얼굴을 보는 것이 껄끄러워졌다.
멀리서 녀석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입술에 닿았던 보드라운 감각과 그날 제 몸을 감쌌던 녀석의 페로몬이 떠올라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것을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차에, 마침 미국으로 유학 갈 기회가 생겼다. 이전까지만 해도 유학을 꼭 가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때는 갑자기 떠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인사도 없이 한국을 떠났다.
* * *
“데이빗.”
스무 살. 누군가 도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며 그의 영어 이름을 불렀다.
캠퍼스 중앙의 벤치에 혼자 앉아 있던 도겸이 힐끗 그를 올려다보자, 금발 머리의 파란 눈, 쿼터백을 한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체격 좋은 우성 알파가 방긋 웃고 있었다.
“제이.”
“여기서 혼자 뭐해?”
제이는 유학을 오기 전에도 부모님을 따라 파티장을 갔을 때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놈이었다. 녀석도 우성 알파에다가 비상한 머리를 타고나서, 졸업하면 후계자 교육을 받을 예정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제게 동질감과 친근감을 느끼는지 종종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곤 했다. 도겸은 제이를 바라보다 다시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별로 재밌는 일도 없고.”
“무슨 세상 다 살아 본 늙은이처럼 말하네. 이거나 마실래?”
제이가 슬쩍 무언가를 내밀었다. 내려다보니 그의 손에는 자판기에서 뽑은 것으로 보이는 캔커피가 들려 있었다.
캔커피는 너무 달기도 하고 싸구려 맛이 나서 고등학생 때 한 번 마셔 보고 난 후로는 입에 댄 적도 없었다.
“……너나 마셔.”
“참나. 생각보다 맛있는데.”
도겸이 거절하자마자 제이는 제 입맛에는 잘 맞는다는 걸 보여 주겠다는 듯 캔커피를 따서 단번에 들이켰다.
그렇게 별일 없이 앉아 학생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데, 제이가 갑자기 바싹 당겨 앉았다.
그러고는 흥미로운 얼굴로 무언가를 주시하다, 손에 들려 있던 빈 캔을 휙 던졌다.
깡!
캔은 큰 소리와 함께 한 남자의 머리에 맞았다. 체구가 작은 남자가 몸을 움츠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도겸은 제이의 팔뚝을 붙잡으며 미간을 좁혔다.
“야, 뭐하는 거야?”
“뭐가? 아, 혹시 너 쟤 몰라? 저 새끼 열성 오메가인데, 저번에 우성 알파인 동급생한테 고백했다잖아.”
제이의 설명에 도겸은 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빈 캔으로 머리를 맞춘 거랑 무슨 상관이지?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사이, 제이가 캔을 주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열성 오메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더럽지 않아? 저런 주제에 감히 기대한다는 게. 꿈이라도 꾸는 건지. 방구석에서 드라마만 보다가 기대만 커졌나?”
제이가 킬킬 웃었다.
그렇지만 도겸의 안면근육은 점점 더 굳어만 갔다. 아까부터 뭘 잘못했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떤 부분에서 그가 저 열성 오메가를 좋아하지 않는지는 알 것 같긴 했다. 우성은 우성끼리 어울려야 한다는 인식이 뇌리에 박혀 있기도 하고 끌리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더군다나 부잣집 자제들 사이에서는 더욱 우성과 열성의 연애는 금기의 관계처럼 받아들였다. 어렸을 적부터 그건 비정상적인 거라고, 무조건 우성 오메가를 만나야 한다고 조기 교육을 받는 게 필수 코스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빈 캔으로 머리를 맞출 정도로 혐오 표현까지 하는 건 과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가 누구를 괴롭히든 흐린 눈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무슨 소리야? 주제를 알게 해 줘야지. 게다가 더 웃긴 건 뭔 줄 알아? 두 놈, 사귀기로 했대.”
“……뭐? 사귀기로 했으면 된 거 아니야?”
“아까부터 너도 이상한 소리를 하네. 그 새끼도 비정상이야. 조만간 둘 다 자퇴할 것 같던데? 잘됐지.”
“자퇴? 그렇게까지 할 건 없는 것 같은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런 거 옮으면 어떡해? 너도 설마 열성 좋아해?”
제이가 마치 그런 건 전염병처럼 옮는다는 듯이 대하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