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몇 시간이나 공부했을까. 둘은 여섯 시쯤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서원은 도서관에서 공부가 꽤 잘됐는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도겸은 아니었다.
수학 문제를 가르쳐 준 이후로 왠지 모르게 열이 오르고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그 이후로 한 공부는 죽 쑨 느낌이었다. 아까처럼 수학 풀이에 의식적으로 집중하려고 해도 잘 안 됐다.
뭔가 찜찜한 기분으로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분홍색 간판의 아이스크림 가게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윤서원이 바보처럼 먹는 모습을 보면 뒤숭숭한 기분이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스크림 먹고 가자.”
“네? 집에 안 가고요? 단 것도 별로 안 좋아하시면서.”
“더우니까. 가자.”
서원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으나, 도겸은 그의 손목을 붙잡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갔다.
여름이라 손님이 많을 줄 알았는데, 저녁 시간이 겹쳐서 그런지 생각보다 한산했다. 도겸은 빈자리에 서원을 앉히고 물었다.
“무슨 맛 먹을래?”
“저…… 그럼 외계인, 그, 초코 맛이요.”
“앉아서 기다려.”
도겸은 계산대로 가 제 것은 치즈케이크 맛으로, 서원의 것은 크런치 초코볼이 든 초코 맛으로 두 개 시켰다.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서원은 내키지 않는 것처럼 굴더니, 정작 아이스크림을 사 주니 잘만 먹었다. 정작 저는 단 걸 별로 안 좋아해서 한두 입 먹다가 말았지만 서원에게는 매번 사 주는 재미가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잘 먹는 서원을 보고 있자니 찜찜한 기분이 차츰차츰 사라졌다. 턱을 괸 채 서원을 대놓고 구경하는데, 서원이 치즈케이크 맛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일 도련님 생일이죠?”
“그랬나?”
“저희 엄마가 그런 얘기 하던데요. 내일 파티 준비한다고.”
“그걸 아직도 하네.”
파티라니. 도겸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정작 저는 생일을 딱히 특별하게 여기지도 않아서 생일인지도 몰랐는데.
도겸에게 생일이란 불편한 날일 뿐이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해 주는 게 좋았다. 제가 주인공이 되는 날이고 다들 제게 축하한다고 해 주니까. 그런데 조금씩 나이가 들수록 제 생일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 점점 싫어졌다.
생일 파티인데 저를 축하해 준다고 오는 사람들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또래도 아니었고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 와서 친한 척을 하고 잘 봐 달라며 저를 극진히 대하는 것도…… 솔직히 불편했다.
생일 파티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서원이 한참을 우물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받고 싶은 거 있어요?”
“딱히…….”
웬만한 건 다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갖고 싶은 건 없었다. 꼭 생일이라는 날 아니라도 갖고 싶은 건 다 살 수 있었으니까.
도겸은 대충 대답하다가, 문득 든 생각에 서원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런데 왜? 사 주려고?”
“뭐어……, 제가 사 줄 수 있는 거면요.”
서원은 민망한지, 테이블 아래의 발을 까딱거렸다.
용돈을 한 달에 만 원 받는다고 그랬나? 제가 알기로는 그마저도 문제집 사는 데 거의 쓰는 거로 아는데, 그 돈을 모아 선물을 사 주겠다고 하는 게 퍽 기특하게 느껴졌다.
대충 인형이라든지, 샤프라든지……. 그런 자잘한 걸 받고 싶다고 말해도 됐지만, 어쩐지 그것도 서원의 기준에서는 비쌀 것 같았다. 코 묻은 돈을 강탈해 가고 싶진 않았다.
“됐어, 편지나 써 줘.”
“편지요……? 정말 그거로 되겠어요?”
“어, 근데 열 줄 이상으로 써라. 짧으면 안 받아.”
“…….”
도겸이 일부러 난이도를 높이자, 서원의 얼굴 위로 혼란스러움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차라리 선물을 사 달라고 하지,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도겸은 그런 녀석의 얼굴을 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코 묻은 돈을 가져가기 미안해서 편지라는 대안을 내놓은 건데, 저 자그마한 머리통으로 어떤 내용을 써서 줄지 기대됐다.
* * *
“다녀왔습니다.”
이튿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안이 유난히 부산스러웠다. 저의 열아홉 번째 생일 파티 준비를 하는 듯했다.
귀찮게……. 도겸은 저택을 꾸미는 모습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손만 씻고 조심스레 서원이 지내는 숙직실로 향했다. 생일 파티보다는, 어제 준 미션을 서원이 잘 해냈는지에 더 관심이 쏠렸다.
편지에 무슨 내용을 썼으려나? 기대감을 가득 안은 채 고용인들의 눈을 따돌리고 조심스레 숙직실 문을 열었다.
“…….”
그런데 숙직실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건가 했는데, 바닥에 서원이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제가 오면 뒤부터 돌아보곤 환히 웃었는데……. 오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는 건가? 시험 기간이라 피곤하긴 한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음에 오려고 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이불이 작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흐으…….”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면서.
뭐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조심스레 다가가 보니, 서원이 울고 있었다. 소리도 죽인 채 불쌍하게.
왜 우는 건지도 모르는데, 그냥 우는 모습을 보니 심장이 쥐어짜지는 것처럼 아팠다. 도겸은 서원의 곁에 앉아 그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윤서원, 왜 울어?”
학교에서 나쁜 일이라도 당했나? 어디가 아픈가? 온갖 걱정이 밀려왔다.
조심스럽게 묻자, 서원이 끅끅거리며 울다가 눈을 스르르 떴다. 눈물이 맺혀서 그런지, 투명한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치는 것 같았다.
“흐으…….”
울지 말라고 위로하려 물어본 거였는데, 어째서인지 윤서원은 제 모습을 보자마자 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룩주룩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누워서 우는 모습을 봤을 때도 가슴이 꽉 죄는 것 같았는데, 저를 보고 펑펑 우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울지 말라고, 어떻게든 달래고 싶은데 한 번도 우는 사람을 달래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왜 그래? 어디 아파?”
“흐, 흐으으……, 흐윽…….”
“얼굴은 왜 이렇게 빨갛고?”
도겸이 걱정이 묻어나는 얼굴로 서원의 뺨에 손을 댔다.
손바닥 아래로 닿는 얼굴이 뜨거웠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아파서 그런 건가. 열이 있는 것 같아서 체온계를 가져올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서원이 제 손에 대고 뺨을 비볐다. 제 손에 서원의 눈물이 닦였다.
이상한데…… 작고 여린 동물을 손 위에 둔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제가 움직이면 모든 걸 망가트릴 것만 같았다.
숨도 거의 쉬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데, 손바닥에 뺨을 비비던 서원이 퍼뜩 눈을 뜨며 도겸을 바라봤다. 두 눈동자에 조금이나마 이성이 돌아온 게 보였다.
“죄송해요……. 시원해서.”
“…….”
화낸 거 아닌데. 더 해도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저도 제가 왜 그딴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겸은 잔재처럼 남은 감각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아니……, 미안할 건 없고. 몸이 완전 불덩이인데 병원은 갔어? 약은 먹었고?”
“아뇨…….”
“뭐? 다 죽어 가는데 병원을 안 갔다고? 내가 사람 불러올 테니까…….”
“그, 그건 안 돼요!”
저렇게 아픈데 병원을 왜 안 가.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하며 당장 병원부터 데려가려는데, 서원이 다급하게 저를 붙잡았다.
고사리처럼 작은 손이기도 하고, 아파서 그런가 기운이 하나도 없는 손길이었다. 그러나 도겸은 엄청난 힘이 붙잡기라도 한 것처럼……. 아까 서원이 제 손에 뺨을 비빌 때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열이 옮은 건지 갑자기 속이 뜨거웠다. 도겸은 목이 타는 것을 느끼며 침을 꼴깍였다.
“……왜 안 되는데?”
“도련님이 저랑, 만난 거……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되잖아요…….”
“사람이 다 죽어 가는데, 지금 그게 문제야?”
무슨 대단한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고작 그런 이유로 병원을 안 가겠다고? 저런 몸을 하고선?
속이 답답했다. 거의 화를 내다시피 말했으나, 서원은 붙잡은 손을 놓지 않고 의견도 굽히지 않았다.
“저 여기서 쫓겨나면……, 다시는, 도련님이랑 못 볼 수도 있어요…….”
“…….”
쫓겨나……?
어렸을 적 종종 서원에게 그런 협박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제가 서원과 몰래 만나고 있다는 걸 부모님이 알면 노발대발할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영 못 보게 될 생각을 하니…… 저 또한 두려웠다.
윤서원도 나처럼 헤어지기 싫겠지. 그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라, 도겸은 어쩔 수 없이 그의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럼, 너희 엄마는 언제 오는데?”
“도련님 생일 파티 끝나고요.”
거실에서 바삐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있던 고용인들이 떠올랐다. 준비를 마치려면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그렇다는 건 그의 어머니가 돌아오려면 한참 남았다는 건데…….
“씨발, 난 왜 이런 날에 태어나서…….”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도겸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난 왜 이런 날에 태어난 거야? 특별한 날도 아닌데, 파티하겠다고 꾸미고 있는 게 한스러웠다. 오늘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어머니에게 언질을 줘 병원에 데려갈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서원의 상태가 조금씩 안정되는 게 보였다. 아플 때 혼자 있는 게 힘든 걸 아니까, 제가 곁을 지켜 주는 것만으로 효과가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어찌어찌 서원을 진정시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순간 코끝에 좋은 향기가 스쳤다.
밖에서 흘러오는 향기라기에는 문도 꽉 닫혀 있었다. 기민하게 후각을 곤두세우고 향기의 근원지를 찾는데, 어째 윤서원에게서 나는 향기 같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냐?”
“저한테서요? 땀 많이 흘렸는데? 제가 아니라, 도련님한테서 나는 향기 같은데요?”
“나한테서?”
“네, 향수 뿌리셨어요?”
“아니.”
그럴 리가. 어머니가 향수를 많이 뿌리는데, 그녀의 곁에 갈 때마다 코도 아프고 머리가 아플 때도 있어 부정적인 편이었다. 그런 제가 향수를 뿌렸을 리가.
도겸이 그렇게 생각하며 부정했지만, 서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이리 와 보실래요?”
“왜?”
왜 사람을 오라 가라야? 까칠한 생각이 들었지만, 상대는 환자였다. 도겸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수그리고 서원에게 몸을 가까이 했다.
쓸데없는 짓 해 봐라. 바로 뭐라고 할 생각을 하는데, 서원이 갑자기 제 목덜미를 안아 끌어당겼다.
작은 힘이었으나, 방심한 탓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갑자기 당겨져서 하마터면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맞출 뻔했다.
놀라서 심장이 쿵쿵 뛰는데,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아 넣자니 방금 맡았던 향기가 훨씬 더 진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윤서원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이 향기는……. 단순히 좋다는 감상을 주는 게 아닌데.
“역시 도련님한테 나는 거 맞는데. 그럼 체취인가 봐요.”
귓가에 울리는 서원의 목소리가 점막에 달라붙는 것처럼 간지럽고, 자극적이었다. 뱃가죽이 확 당기는 느낌이 든 것도 그때였다.
“어……?”
“씨발, 윤서원.”
도겸은 순간 이성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제가 서원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