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그런 서원의, 반응을 보니 장난기가 돌았다. 도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물었다.
“뭘 보긴 본 모양이다? 훔쳐봤어? 변태야?”
“아, 아니……. 제가 보려고 한 게 아니라, 도, 도련님이 배를 살짝 드러내고 자서, 그래서 보였던 건데…….”
옷을 입고 있어도 몸이 좋은 게 보인다, 그런 대답을 예상했는데 서원에게서 나온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정말 제 맨몸을 보기라도 한 눈치였다.
흠……. 저번에 여기서 낮잠을 자다가 옷이 말려 올라가기라도 했나? 이 방에서 옷을 훌러덩 벗고 잔 적은 한 번도 없으니 그게 전부일 듯했다.
별것도 아닌데 엄청나게 부끄러워하네. 대단한 모습을 본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도겸은 이 상황이 재미있어서 계속 그를 놀렸다.
“그래서 유심히 봤다?”
“유심히 본 게 아니라 억지로 본 건데…….”
“뭘 억지로 봤대. 좋으면 좋다고 그래.”
“좋긴 뭐가……, 하아…….”
서원은 왜 자신이 변태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억울하다는 듯 반응을 보이면서도, 대꾸할 힘도 없다는 것처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겸은 그런 서원의 모습을 보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참았다. 놀릴 때마다 반응이 좋아서, 분명 학교에 가서도 이런 식으로 놀림을 많이 받을 것 같았다.
도겸은 웃지 않은 척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건 왜 물어?”
“아, 그게……. 복근 어떻게 만들었나 싶어서요.”
“복근?”
“보, 보려고 한 건 아니고. 그냥…… 좀, 있으면 멋있잖아요.”
도겸이 갸우뚱거리며 묻자, 서원이 얼굴을 확확 붉히며 대답했다. 배 좀 봤다고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그런데 얜…… 그런 걸 왜 물어본대? 설마 자기도 만들고 싶어서 그런가? 찹쌀떡같이 생겨 가지고…….
우성 알파가 되고 싶다고 하질 않나, 복근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나. 자기랑 어울리지도 않는 건 다 원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딱히 만들려고 만든 건 아니고, 운동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생기던데.”
“그래요?”
“너도 내 나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생길걸. 초등학생이 근육 만들면 키 안 큰다.”
“아, 그놈의 키…….”
서원은 또 키로 공격당한 게 억울한 듯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과도한 근육이 키 크는 걸 방해한다는 내용은 널리 알려져 있기에 반박하진 못하는 눈치였다.
부루퉁하게 있으면서도, 복근에 대한 미련은 버린 것 같았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넘기려는데, 서원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럼 만져 봐도 돼요?”
“뭐?”
“복근이요. 실제로 본 것도 처음인데 만져 보면 안 돼요?”
얘, 얘가 왜 이래.
도겸이 드물게 당황했다. 날…… 만지겠다고?
만지는 건 문제가 안 됐다. 지금도 팔베개를 해 주면서 신체 부위 일부는 그에게 닿아 있으니까. 그런데 복근을 만지겠다는 건 좀 이상했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신기함에 만져보겠다고 하는 것뿐인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자.”
“…….”
도겸은 아무렇지 않은 척 거절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더 말해도 듣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 뜻을 알아듣긴 했는지, 서원은 더는 물어 오지 않았다. 더 나눌 대화도 없으니 다시 자려고 하는데, 눈을 감아도 머릿속이 말똥말똥했다. 윤서원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잠이 다 달아난 것 같았다.
잠이 오지를 않으니 이만 일어나도 됐지만, 자겠다고 공부하던 서원까지 끌어당긴 참이었다. 이제 와서 일어나기가 모양 빠졌다.
그냥 자는 척 가만히 누워 있자. 한 오 분만.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게 내쉬고 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아래에서 이상한 느낌이 났다. 뭔가가 더듬더듬 제 배를 만지고 있었다.
슬그머니 눈을 뜨니, 윤서원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제 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 채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지지 말라니까.
“야.”
“네, 네?!”
도겸이 보다못해 입을 열자, 서원은 제가 깨어 있을 줄은 몰랐는지 화들짝 놀라며 오들오들 떨었다. 바들바들 떠는 하얀 햄스터가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저렇게 놀랄 거면서 왜 허락도 안 받고 배를 만지는 건지. 도겸은 숨을 깊게 내뱉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서원은 빠르게 손을 빼며 사과했다. 죽을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그러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제 팔베개하고 누운 채였다.
도겸을 팔을 빼서 서원이 일어나게 한 다음, 저도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너 숙제 할 거 있다고 했지? 그거나 하자.”
“어, 잠은요?”
“다 깼어.”
더 누워 있어 봤자 잠이 올 것 같진 않았다. 안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는데 윤서원이 만져서 더 그랬다.
그 어떤 사람보다 윤서원이 가장 편한데, 어째서인지 녀석이 저를 만질 때 가장 불편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제 몸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고장 나 버리는 느낌이었다.
왜일까. 도겸은 뜨거워진 뒷덜미를 긁적이며, 문제 풀이에 신경을 쏟아부었다.
* * *
다음에 떠오른 것은 서원이 중학생이 되고 난 후의 기억이었다.
제가 보기에는 여전히 초등학생 같았는데, 중학생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남의 옷을 훔쳐 입은 것처럼 보였다. 체구도 작아 어려 보이는데, 교복 치수는 또 크게 물려받아서 더 그래 보였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어가도 도겸은 여전히 그의 좁은 방에 숨어 들어가서 놀았다. 이제는 고등학교 3학년이나 됐으니 중학생이랑은 놀지 않을 법도 한데, 윤서원이랑 있으면 유치하다거나 수준이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나이 차이도, 그가 가정부의 아들이라는 것도 상관없었다. 제 인생에서 윤서원이란 존재가 가장 즐거웠다.
조만간 시험 기간이기도 해서, 오늘은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면 안 되기 때문에 따로 출발해서 도서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간단히 공부할 거리를 챙기고 도서관 앞에 도착했는데, 거북이 등딱지처럼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는 서원이 보였다. 가방에 뭘 넣고 다니는 건지, 과장을 보태서 가방이 윤서원만 했다.
저렇게 무겁게 들고 다니니까 키가 안 크지. 도겸은 속으로 혀를 차곤, 그에게 다가가 가방을 강탈하듯 가져갔다.
“뭘 이렇게 많이 들었어.”
“엇, 도련님.”
경계 어린 표정을 하고 있던 서원은 도겸을 보고는 사르르 표정을 풀었다.
고양이처럼 날 선 눈을 하고 있었으면서, 상대방이 저인 걸 확인하자마자 표정을 푸는 모습은…… 묘하게 짜릿했다.
도겸이 기분 좋게 가방을 들어 주자, 서원이 멋쩍게 말했다.
“가방 제가 들어도 되는데…….”
“됐어. 근데 뭘 이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다녀?”
“오늘 공부할 것들이에요.”
도겸은 앞으로 맨 서원의 가방 지퍼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두꺼운 책이 대여섯 권은 있었다.
이걸 다 공부하겠다고? 독하다고 해야 할지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공부는 요령껏 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또 잔소리라고 듣기 싫어할까 봐 참았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서원이 문고리를 잡은 채 멈췄다. 왜 갑자기 길을 막아. 도겸이 의아함에 고개를 기웃거리자, 서원이 뒤를 돌아보더니 제게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공부하는 거예요. 방해하면 안 돼요.”
“허…….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인데 중학생한테 이런 말 들어야 하냐?”
공부에 더 급한 사람이 누구인데. 중학생한테 이런 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좀 방해하긴 했지만, 내가 뭘 얼마나 방해했다고?
도겸이 빈정거리며 반응하자, 서원이 귓가와 목을 발긋하게 물들이며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관 안은 에어컨이 시원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료로 쓸 수 있는 공간에다가 곧 시험 기간이라서 그런지 공부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도겸은 편하게 제가 쓰던 1인 독서실로 갈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어딜 앉을지 골똘히 생각하는 동그란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금방 생각을 접게 됐다.
둘러보는데, 타이밍 좋게 한 커플이 빠져나갔다. 연달아 붙어 있는 자리가 생기자, 서원이 짧은 다리로 빠르게 가서 자리를 잡았다.
“딱 자리 생겨서 다행이죠.”
서원이 푸스스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더니 속닥거렸다. 내심 자리가 없을까 봐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도겸이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주고 있던 가방을 돌려주자, 서원이 부지런히 가방 속에 있는 책들을 꺼냈다. 녀석이 첫 번째로 고른 과목은 수학이었다. 수학이 제일 어려워서 오히려 제일 많이 공부한다고 들은 것 같다.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며, 도겸도 가져온 책을 꺼내 공부를 시작했다. 평소 공부하던 환경과는 조금 다르기도 하고 윤서원과 있어서 그런지 책에 집중이 안 되긴 했지만, 저도 수학을 꺼내 푸니 의식적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억지로 집중력을 짜내 서너 시간은 말도 안 하고 공부만 했던 것 같다. 스트레칭도 안 하고 앉아만 있다 보니, 몸이 찌뿌둥했다.
기지개를 쭉 켜면서 슬쩍 서원을 보는데, 미간을 와락 구긴 채 샤프로 문제를 톡톡 치고 있었다. 입술을 삐죽거리는 게 문제가 잘 안 풀리는 눈치였다.
표정이 다채롭고 재미있어서 몰래 훔쳐보는데, 시선이 느껴졌는지 서원이 이쪽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서원은 구원투수를 발견한 것처럼 눈을 반짝이더니 도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거 어떻게 풀어요?”
서원이 제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매일 같이 듣던 목소리였다. 그런데 귓가에 대고 작게 말해서 그런 걸까, 유난히 봄바람처럼 살랑거린다는 감상을 받았다.
왠지 멍하게 있는데, 서원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도련님?”
“아……. 이거 말하는 거야?”
“네.”
서원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도겸은, 넋을 놓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서원의 문제집을 끌어당겼다.
도겸은 익숙하게 문제를 풀며 그에게 공식을 설명해 줬다. 수학 문제를 가르쳐 준 적은 많이 있지만, 오늘처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낮추고 설명했다.
소곤소곤 알려 주느라 안 그래도 가까웠던 거리가 바싹 달라붙었다. 맞닿은 팔이 조금 뜨겁게 느껴졌다.
분명 도서관에 에어컨이 쌩쌩하게 틀어져 있는데 왜 이렇게 더운지 모를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