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는 기분이 좋아진 듯, 입꼬리를 올렸다. 사뭇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그를 바라보는데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내 사무실에서 그냥 아무거나 하고 놀아도 돼.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그럼…… 혹시 컴퓨터를 빌릴 수 있을까요? 저도 일해야 해서.”
“일?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열성 오메가는 임신 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절대안정을 취하라던데, 일도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도겸이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여태까진 굳이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내심 걱정됐는지 검색해 본 모양이었다.
열성 오메가가 아이를 임신하고 낳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 않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서 특별한 의미가 아니더라도 걱정됐을 순 있다. 그렇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마음이 너무나도 고조되어 있었고, 그가 저를 과하게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몰랐던 것들이었다.
“돈 때문에 그런 거면 하지 마. 이번에 내가 부탁한 거니까 파트너 할 때만큼 챙겨 줄게.”
“네? 아, 아뇨!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는…….”
“그냥 좀 받아. 최악의 이야기를 하는 건 좀 그렇긴 하지만, 아이한테 영향 가는 것뿐만 아니라 네 몸에도 무리가 간다니까.”
그때는 몸을 겹치는 것을 대가로 많은 돈을 받았던 거지만, 지금은 단순히 그의 곁에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때만큼 챙겨 주는 건 너무 과했다.
그래서 서원이 반사적으로 거절하려고 했지만, 도겸이 부탁하듯 말하는 게 먼저였다.
그는 제가 누구의 아이를 품었는지 오해하고 있었으니, 아이가 어떻게 되든 사실 알 바 아닐 터였다. 오히려 ‘양아치 같다’라고 표현한 지환의 아이니 차라리 잃어버려서 그와의 인연이 완전히 끊어지길 바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이뿐만 아니라 저에게까지 영향이 갈 수 있다며 걱정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다정하게 느껴졌다. 단순하지만 저를 걱정해 주는 모습이 기분이 완전히 풀어졌다.
“그, 그래도…… 받아 둔 일은 해야 해서요. 그것만 할게요. 컴퓨터 있으면 좀 빌려주세요.”
“……그럼 그것까지만 해. 노트북 가져오라고 할게.”
도겸은 그만큼의 일도 하는 것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래도 그도 엄밀히 말하면 직장인이라서 무책임하게 일을 그만두게 하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 비서가 노트북을 들고 와 서원에게 전달했다. 서원은 전무이사실 한편에 있는 손님용 테이블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받아 둔 번역 일을 진행했다.
도겸도 멈췄던 업무를 다시 시작하니 금방 이사실이 조용해졌다. 한 공간에 둘만 남아 있다는 것이 자칫 어색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는 서원이 있어서 각인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서원은 그의 페로몬으로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줬다. 그것만으로도 둘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째깍 째깍…….
그의 페로몬이 집중력에도 도움을 주는 건지, 서원은 평소의 두 배의 효율로 일을 마쳤다. 모니터를 보느라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하는데 1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곧 점심시간이었다.
더하기도 뭣해 서원은 노트북을 슬며시 덮고 힐끗, 도겸의 쪽을 바라봤다. 그는 시간이 이렇게 됐다는 것도 모르는지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서원은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모습을 지켜봤다. 저는 열성 오메가라 페로몬이 진한 편도 아닌데도, 도겸의 표정은 최근 들어 가장 좋았다.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다……. 일방 각인도 까다롭긴 하지만, 내심 그가 정말 큰 병에 걸린 거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렇게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가까운 곳에서 도겸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서원.”
“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겸이 가까이 다가온 채였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서원이 멍청한 목소리를 내며 눈을 깜빡거리는데, 도겸의 얼굴이 키스할 것처럼 가까워졌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왜,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됐지? 당황스러워서 몸을 뒤로 물리려고 했으나 소파에 앉아 있는 채였고, 설상가상으로 도겸이 제 턱을 잡아 올리며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윤서원.”
도겸이 다시금 이름을 입에 담았다. 대답을 바라는 것 같았다. 서원은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키곤 조심스럽게 그와 눈을 맞췄다.
“왜, 왜요……?”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뭐가요? 저,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아무것도 안 했다고?”
내가 진짜 뭘 했나? 일을 먼저 마치고 점심때까지 기다린 것밖에 한 게 없는데?
서원이 눈을 데구르르 굴려 가며 바삐 이전의 상황을 떠올려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한 일은 없었다. 서원이 영문 모를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꼬집듯 말했다.
“날 계속 쳐다봤잖아.”
“…….”
그게 무슨……. 그것 때문에 이렇게 다가온 거라고? 내 눈빛에 무슨 의도라도 담겨 있는 것 같았나?
그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도겸은 정말 어떠한 의도로 받아들인 눈치였다.
이걸 해명해야 하는 건가. 서원이 머뭇거리고 있는데, 도겸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맞췄다.
“흣……!”
말캉한 입술이 제 입술에 닿자, 서원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갑자기 입맞춤? 제가 키스하자고 조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본 것도 아닌데, 그가 제 시선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줄곧 마음이 들떠 있었던 탓일까. 아니면 제가 그를 너무나도 좋아하기 때문일까. 그를 밀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서원은 거부하지 않고 다물려 있던 입술을 벌렸다.
입술이 벌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도겸이 서원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말캉하고 뜨거운 혀가 다급하게 입술 너머로 침입했다.
맞물린 입술 너머로 짙은 알파 페로몬이 넘실거리며 밀려왔다. 평소보다 갈급하게 들어온 그의 혀는 빠르게 엉겨 붙었다. 잠시 떨어질 틈조차 주지 않고 끌어당겼다.
오래간만의 입맞춤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의 페로몬이 너무 진해서 그런지 순간 뒷덜미가 오싹해졌다. 서원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려 했지만, 뒤통수를 감싼 도겸의 손바닥이 떨어지지 못하게 했다.
“흐으……!”
잠시 멈추려고 한 것뿐이었으나, 도겸은 도망치려고 하는 피식자를 붙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더 강하게 몰아붙였다. 흥분시키다 못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진한 페로몬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서원의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전신에 힘이 축 풀리고 저릿저릿했다. 아래는 벌써 빠듯해진 지 오래였다. 점막을 통해 직접 닿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그만큼 자극적이었다. 임신 중이기에 또 히트사이클이 올 리는 없지만, 그러기라도 할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감각에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간신히 주먹을 꽉 쥐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고 있자, 뒤늦게 도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하아……!”
생각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입맞춤을 하고 있었는지, 서원은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모자랐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공기가 폐부로 몰아치면서 심장이 빠듯해졌다. 가슴께를 꽉 움켜쥐며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는데 도겸이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콧날은 문질렀다.
그는 가만히 서원을 내려다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서원에게 물었다.
“그 녀석한테도 이랬어?”
“네……? 무슨, 그 녀석이요……?”
뭘 이랬다는 건지, 그 녀석은 또 누구를 의미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서원이 영문 모를 얼굴로 도겸과 시선을 맞추자, 그가 빤한 시선으로 서원을 바라봤다. 진짜인지 거짓인지 판가름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쳐다보던 그는 뒤늦게 몸을 뒤로 물렸다.
“아니면 됐어.”
“…….”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
“……이런 상태로요?”
갑자기 웬 점심. 점심 시간이 되긴 했지만, 입맞춤을 나누다가 나올 대화는 아니지 않나. 왜 갑자기 키스했는지 이유나 알려 주지…….
게다가 페로몬을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두 발에 힘을 주고 일어나기도 힘들 정도로 몸이 축 늘어졌고, 게다가 아랫도리가……. 바깥에 나가기 민망할 정도로 빠듯해져 있었다.
서원이 황당하게 묻자, 도겸은 서원의 아랫도리를 흘겨보더니 작게 웃음을 흘렸다.
“도와줘?”
“도와달라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대수롭지 않게 ‘도와줘?’라니. 사람을 이렇게 달아오르게 해 놓고서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원은 억울하게 반박하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에게 해 달라고 요구하기에는 지는 것 같았으며 성격에 맞지도 않고 민망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기에는 몸 상태가……. 서원은 고민하다 그의 아랫도리 너머로 조금 발기한 것이 보여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도련님도…… 달아올랐잖아요…….”
“그래서 하자고?”
“그건…….”
꼭 그러자는 건 아니지만, 할 것처럼 달아오르게 만들고 물러나니 억울했다. 서원이 입술을 살짝 삐죽거리며 불만을 드러내자 도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너 임신했잖아. 문제 생기면 어떡해. 더군다나 다른 알파의 아이라면서.”
“…….”
임신한 중에도 과격하게만 하지 않으면 섹스는 할 수 있었다. 상황에 따라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고.
다만, 서원은 열성 오메가라 다른 이들보다 더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고, 무엇보다 임신한 아이와 다른 알파와 관계를 맺게 되면 아이에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
도겸은 서원의 아이가 지환의 아이인 줄로만 알고 있으니 판단이 옳았다. 그렇지만 서원의 처지에서는 아니었다.
이지환의 아이가 아니라 당신의 아이라고. 지금 고백해야 하나? 사실대로 고백하려고 오늘 이곳까지 온 거긴 하지만, 지금처럼 성욕에 쫓기듯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고백해 본 적이 있어야 알지…….
성욕에 눈이 멀어 고백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제가 너무 가벼워 보이지 않을까. 지금 당장은 그가 저를 거절할 거라는 두려움보다는,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 고백이 망설여졌다.
서원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대답을 기다리던 도겸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삽입만 하지 않으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