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136)

<50화>

“그렇지만 도련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요…….”

“말은 그렇게 해도 도련님이 널 좋아하는 게 확실해.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행동하고 각인까지 할 리가 없다니까?”

과연 그럴까? 그렇지만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그런 거 아니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도겸의 반응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얼굴이었는데…….

괜히 또 기대만 하고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닐까. 서원이 침울하게 앉아 있자, 지희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속 터진다는 듯 과격한 반응을 보였다.

“근데 어이가 없네. 도련님은 왜 그러는 거래? 그렇게까지 티를 냈으면서 왜 인정을 못 하지? 집안 때문에? 형질 때문에? 각인하고 임신까지 시켰으면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나?”

“임신한 건 알아도 도련님 아이인지는 모르는데…….”

“뭐? 뭘 그렇게 반만 알아?”

“어쩌다 보니까…….”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기에는 복잡했다. 서원이 말을 흐리자, 잠시 생각하던 지희가 심각했던 분위기를 깨트리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갑자기 웃긴 거지? 서원이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지희가 겨우 웃음을 누그러트리며 입을 열었다.

“왜 부정하는지 알겠다. 도련님 성격에 남의 아이 가졌다는 사람한테 고백할 수 있겠어?”

“…….”

“서원아, 그냥 사실대로 말해. 아이도, 마음도. 그냥 확 고백해 버려.”

고백?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 없던 서원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가, 순간 그녀의 말에 이상한 점을 깨닫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제가 도련님 좋아하는지는…… 어떻게 알았어요?”

“하는 행동을 봐라. 모르게 생겼는지. 한다면 하는 애가 도련님의 일에서만 극도로 소심해지잖아. 태도도 그렇고.”

지희가 보는 서원은 한다면 하는 아이였다. 소심한 성격이면서도 원하는 바가 뚜렷했다. 돈이 없어서 학원도 독서실도 못 보내 줬는데 의지력 하나로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한국대까지 갔다. 그런데 도겸의 앞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소심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또한 도겸의 앞에서만 달라졌다. 직장 상사와 부하의 관계와 비슷하니 그럴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약해졌다. 그게 지희의 눈에 안 보일 리가 없었다.

서원이 제 마음이 그렇게 드러났나 싶어져 민망해하는데, 지희가 마저 말을 이었다.

“아이의 일까지 말하는 게 두려우면 일단 고백 먼저 해 봐. 확실히 반응이 올 거야.”

“……생각해 보고요.”

“어차피 도련님이랑 인연 끊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면서?”

지희가 뭐가 그렇게 두렵냐는 듯 물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으면 끝장을 봐도 되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그렇긴 한데요……. 전 도련님이 저를 거절하는 모습이 두려워요. 그리고 아이의 일까지 알게 되면 지우라고 하실 것 같기도 하고요.”

“너, 지금도 이미 거절당한 사람처럼 충분히 마음고생 하잖아.”

“…….”

서원은 고개를 푹 숙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지희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만약 차이고, 아이 지우라고 하면 도망가자. 엄마랑 이 집 팔아서 해외 나가서 살자.”

“해, 해외요? 아니, 엄마.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는…….”

“요즘 백세 시대라는데 한국에서만 사는 것도 아깝잖아. 엄마도 나이 들면 해외 나가서 살아 보고 싶었어.”

“…….”

“아, 임신 초기에 열성 오메가라 비행기 타면 안 되려나? 음, 아니면 배를 타고 갈까? 크루즈를 타면 그런 것도 덜하지 않을까?”

지희는 이런들 저런들 방법은 있을 거라며 희망적으로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었지만, 서원은 도리어 마음이 복잡해졌다. 정말 도련님이 저를 좋아하나? 도겸은 그런 거 아니라고 길길이 날뛰고 오진이 아니냐고 하기까지 해서 혹시나 하는 기대도 다 접었었는데…….

그렇지만 엄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에서도 간혹 사귀는 사이에 러트와 히트사이클을 함께 보냈는데도 각인이 되지 않았다고, 서로의 애정도를 의심하는 내용이 빈번하게 올라왔다.

각인은 단순히 성욕에 휩쓸려서 되는 게 아니었다. 만약 성욕 때문에 각인이 된 것이었다면, 러트가 풀리거나 지금까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일방 각인이 풀렸을 가능성이 컸다. 의사의 말로는 일방 각인을 푸는 방법이 단념하는 것밖에 없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엄마의 말이 진짜인가? 그가 저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생각해 봤을 뿐이건만, 심장이 몸 전체를 울릴 정도로 크고 빠르게 요동쳤다. 서원은 심장 언저리에 손을 얹고 주먹을 꽉 쥐었다.

해야겠다.

설령 도겸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 게 맞더라고 하더라도, 일방 각인의 효과로 저에게 끌릴지 몰랐다.

그와 자연스럽게 인연을 끊고 마음을 접으려 했는데, 만일 아이를 지우라는 말을 들으면 엄마도 같이 해외로 나가 주겠다고 해 주니 용기가 생겼다. 이 집은 강남권에 위치한 데다가 마당이 딸린 주택이라서, 팔면 해외에서도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거였다.

고백해야겠다.

제 마음도, 제가 누구의 아이를 임신했는지도.

결심하니 가슴이 더 재빠르게 뛰었다. 상상만 해도 이렇게 떨리는데, 진짜로 고백할 때는 어쩔지. 서원은 입 밖으로 나올 듯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써 노력했다.

* * *

[07:12 서도겸 도련님] 오늘 회사로 와 줄 수 있어?

[07:13 서도겸 도련님] 언제 가능한지 알려 주면 집 앞으로 차 보낼게.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자고 일어나니 아침부터 저를 찾는 도겸의 메시지가 핸드폰에 와 있었다.

그의 치료를 도와주기로 하기는 했어도 굳이 그의 요구를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어제 그에게 사실대로 고백하겠노라고 마음을 먹은 터라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집 앞으로 도겸이 보내 온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도망칠 곳이 생겼으니 마음을 가라앉혀도 될 텐데, 생애 처음으로 해 보는 고백이라서 더 진정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수능을 볼 때도 이렇게까지 떨진 않았던 것 같다.

회사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상층으로 올라가 전무이사실 앞까지 다다랐다. 서원은 가슴께를 꽉 움켜쥐고 있다가, 들어가라는 배 비서의 말에 겨우 문고리를 붙잡고 팔에 힘을 주었다.

새카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은 전무이사실의 중앙에서 도겸이 업무를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까다로운 일을 처리하고 있는지 심각한 얼굴로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의 페로몬 파트너였을 때, 오늘처럼 전무 이사실에 들어와서 그의 업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던 때가 많았다. 들어와도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업무에만 집중하기에 멀찍이 앉아 그의 모습을 훔쳐볼 때가 대부분이었다.

“윤서원.”

그런데 오늘은 제가 안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저를 보며 표정을 온화하게 풀었다.

이렇게까지 그가 저를 빠르게 반긴 건 처음이었다. 그때와 지금 그와의 관계가 달라졌으니 태도 또한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감회가 남달랐다. 제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 같다고 생각이 드니 낯간지러웠다.

정말 나를 좋아하나……? 일방 각인 때문에 저를 부른 건 아는데 괜히 의미를 담게 됐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감정을 느껴 본 게 처음이라, 서원은 사춘기 소년처럼 괜히 툴툴거리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왜 부르셨어요?”

“밥은 먹었어?”

“아침에 엄마가 샌드위치 만들어 줘서 먹고 왔어요.”

“너무 부실하게 먹은 거 아니야? 병원에서 영양 불균형이라고 하던데. 입덧 때문에 그래?”

왜 불렀냐고 물었건만, 도겸은 밥 이야기만 했다. 각인에 관한 말은 하지 않고 걱정하기라도 하듯 말을 해 오니 각인 때문이 아니라, 저를 보려고 부른 것 같다는 착각을 할 뻔했다.

마냥 꾸며낸 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힘들게, 도겸의 표정과 말투에는 걱정이 가득해서 그렇게 믿게 됐다.

분위기가 좋은 것 같은데, 할 말이 있다고 하고 지금 당장 고백해 볼까. 서원은 그렇게 생각하다 뒤로 잠시 미뤘다. 이른 아침부터 고백하면 좀 그렇겠지. 만약 거절당하면 저도 종일 우울할 거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서원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입덧 약 먹었더니 좀 괜찮아졌어요.”

“다행이네. 점심 되면 맛있는 거 먹자. 이 앞에 한식집이 깔끔하거든. 같이 가자.”

“…….”

서원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을 모아 꼼지락거렸다. 잘 생각해 보면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데 그의 말투,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으니 어색해졌다. 얼굴에 열이 올라 그에게 들키는 게 아닌가 걱정됐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도겸은 잠시 서원을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들어?”

“아, 아뇨. 그건 아닌데……. 하, 한식 좋아요.”

대답하지 않으니 뭔가 마음에 안 들었다고 생각한 눈치였다.

서원이 그런 게 아니라고 다급히 해명했으나, 도겸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 서원의 태도에 대해 짚이는 게 있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어제 각인통 약을 먹었는데 가라앉지 않았어. 그래서 연락했어. 미안해.”

각인통이라는 말에 서원이 감상에 젖어 있던 것도 잊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일방 각인이라는 진단을 들은 이후로 그가 각인통으로 고생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지만, 어제 병원에서 가라앉히는 약을 처방받았으니 괜찮아졌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약이 들지 않았다니. 이전에는 몰랐어도, 이제는 그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되기에 훨씬 더 걱정됐다.

“그, 그럼 어떻게 해요?”

“약 다시 처방받을 때까지 같이만 있어 줬으면 좋겠어. 적어도 업무를 볼 때만이라도.”

도겸은 조만간 약을 다시 처방받겠다는 눈치였다.

만일 사귀게 되면 그가 약을 처방받을 것 없이 함께 있으면 됐다. 그렇기에 서원은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다가 겨우 참았다.

그가 받아주리라는 확신이 없으니, 지금 해도 되는 건지. 정말 해도 괜찮은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는 게 처음이라 조금 두렵기도 했고……. 아무래도 조금 더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때 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알겠어요.”

서원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도겸이 미세하게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평소와 비슷해서 몰랐는데, 제가 거절할까 봐 조금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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