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이튿날. 도겸은 재차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지만, 일방 각인이라는 진단을 한 번 더 듣게 됐다.
“말도 안 돼. 진짜 일방 각인이라고?”
병원에서 나오기까지 도겸은 믿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뭔가 잘못됐어. 말도 안 돼. 미친 거 아니야? 이 녀석한테? 그것도 일방 각인?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와 동행하는 서원은 그의 혼잣말을 다 들었고,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일방적으로 제게 각인한 건 그인데, 제가 잘못하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그는 임시방편으로 각인통을 가라앉히는 약을 받았다. 진통제의 역할만 할 뿐, 각인을 푸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서원은 힐끗힐끗 도겸의 눈치를 보다, 병원 앞까지 나왔을 때 도겸과 배 비서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뭐?”
“제가 도련님을 도와드릴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병원에서도 다른 치료 방법이 없고 도련님이 마음을……, 음…….”
단념하라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 말만 하면 도겸이 펄쩍펄쩍 뛰며 원한 적도 없다고 하니 말할 수가 없었다. 서원은 예민한 도겸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에둘러 말했다.
“아, 아무튼 제가 도련님의 치료를 도와줄 수 있는 거라고 하면 도와주려고 했는데…….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그럼 나더러 계속 고생하라고?”
“그런 의도가 아닌데……. 진정제를 받았으니까 앞으로는 그래도 괜찮아지겠죠.”
왜 말을 곡해해서 듣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방 각인이라고 진단을 받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힘들 테니, 좋은 말로 다독이는데 도겸은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
“넌 나를 만나 주지도 않을 텐데 안 풀리면 어떡해.”
“…….”
도겸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근래 들어 자주 보는 모습이었으나, 그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서원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사코 부정하더라도, 어쨌든 각인이 됐으면 심리적인 영향이 엄청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저를 곁에 두면 각인통이 가라앉는 이유뿐만 아니라, 각인 때문에 저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걸 수도 있었다.
만일 그런 이유라면 여태까지 보였던 그 비이성적인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 키우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후한 조건을 내걸 수도 있었던 거고, 지금도 보내고 싶지 않아 하는 거겠지.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일 거라고 판단한 서원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이유 없이 각인한 거니까 또 이유 없이 풀릴 수도 있죠. 그리고 또…….”
“안 가면…… 안 돼?”
“…….”
위로하려고 열심히 말을 고르는데, 도겸이 서원을 바라보며 부탁했다.
순간 서원은 목구멍에 묵직한 것이 턱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분명 불쌍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상황이 조금 비정상적이고 좋지 않긴 해도, 죽을병에 걸린 사람도 아니니 불쌍하게 볼 이유도 없었다.
저번에도 머리가 아프다고 하고, 불면증이라고 하고…….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소신을 잃고 흔들렸다. 매번 같은 패턴인데도, 그가 약해지는 걸 보기 싫어서인지 그보다 배는 더 약해져서 들어주게 됐다.
게다가 저번에는 약한 척을 하면 제가 받아주겠지 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는데, 오늘은 머뭇거리는 것이 진심으로 느껴져 더 안쓰러운 것도 있었다. 제가 최근 너무 안 된다고 밀어내기만 한 기분이었다.
입을 열면 알겠다고, 그의 곁에 있겠다는 말이 충동적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서원이 애써 입술을 꾹 다물며 눈만 깜빡거리는데, 도겸이 마저 말을 이었다.
“파트너든, 비서든 다 안 해도 되니까. 그냥 볼 수 있는 곳에 있으면 안 돼?”
“저번에 거래에서 더는 안 보겠다고 분명 말씀드렸는데요…….”
“치료하는 건 도와주겠다고 그랬잖아. 각인 풀릴 때까지 곁에 있어 주면 안 돼? 각인통 진정제에 부작용도 있을 수 있고, 먹는다고 완전히 가라앉는 것도 아니라던데.”
“…….”
“그리고 너도 서울에 있어야 병원 다니기에 더 쉽잖아. 그게 더 낫지 않아? 아이보다 그 새끼가 더 중요한 거야?”
“하…….”
애써 밀어내려 했지만, 도겸은 이전에 서원이 했던 말을 다시 들먹이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치료에 도움이 될 게 없는데…….
어째서인지 단념시키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 * *
“당분간만 지낼 거예요.”
결국 도겸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서원의 어머니 집이었다.
도겸은 차를 태워 직접 대문 앞까지 데려다주면서도, 조금은 탐탁지 않은 얼굴을 했다.
“동사무소 가서 지금 당장 아파트 너한테 넘길 테니까, 거기서 지내지 그래?”
“임신한 몸으로 혼자 지내는 것도 힘들고, 집이 편해요.”
“그런 이유면 내 집으로 가도 되는데.”
“제가 도련님 집에요? 싫어요.”
“…….”
서원이 깊게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거절하자, 도겸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싫냐는 듯한 눈빛이라, 서원은 저도 모르게 변명을 했다.
“도련님 집이 싫다는 게 아니라……. 익숙한 곳이 좋아요. 도련님네 집은 몇 번 가 보지도 않았고…….”
“그렇겠지. 알았으니까 이제 가서 쉬어.”
도겸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는 듯 대답하면서도, 목소리에는 여전히 서운한 기색이 잔뜩 담겨 있었다.
아파트는 어련히 때가 되면 받을 텐데 왜 하루빨리 넘기고 싶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여태까지 제가 그의 집 가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면서, 왜 갑자기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와 오랜 시간 파트너 생활을 했지만, 그가 자신의 집에 저를 들인 건 손에 꼽힐 정도로 많지 않았다. 굳이 그의 집에 가야 할 일이 많지도 않았고, 저 또한 그의 집에 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모님과 회장님도 함께 지내던 저택에서 나와 혼자 살기 시작했다. 사모님은 ‘아들바라기’라는 별명을 붙여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도겸에게 넘치는 관심을 주는 편이었다. 그녀는 유학에 독립까지 연달아 이어져 아들을 자주 보지 못하게 된 게 아쉽고, 걱정돼서 그런지 사람을 시켜 도겸의 행보를 다 보고받았다.
제가 그와 오랜 시간 파트너로 지냈다는 건 배 비서만 아는 사실이었고, 그녀는 제가 비서로서 곁에 있는다는 수준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다. 그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때는 도련님의 집에 방문한 날이었다.
그의 집에 방문하는 날이면 백이면 백, 사모님에게 연락이 왔다. 도겸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오곤 했다.
‘둘이 친하기도 하고, 열성 오메가니까 큰 걱정은 하지 않아. 그렇지만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집에 들어가.’
‘네가 처신을 잘해야 한다. 탄탄대로인 아이 미래 망치지 말고 조심해.’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또 도겸과 하룻밤을 보내고 그의 모친에게 연락을 받는다는 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안 그래도 그의 집에 갈 기회도 없었는데, 점점 더 가지 않게 됐다.
그의 모습에 흔들려서 가면 또 사모님께 연락을 받게 되겠지.
“도련님도 몸 관리 잘하세요.”
서원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에게 인사를 남기고,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겸의 시선이 등 뒤로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애써 무시했다.
복잡한 심경으로 마당을 지나쳐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열쇠를 꽂기도 전에 현관문이 먼저 열렸다.
“무슨 일이길래 이틀이나 묵어?”
지희는 반가운 얼굴로 서원을 맞이하면서도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다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어, 엄마. 제가 너무 자주 왔죠……?”
서울을 떠나 이사 간다고 해 놓고서는, 매번 오게 되는 게 머쓱했다.
서원이 민망함이 잔뜩 실린 미소를 짓자, 지희는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 입꼬리를 환하게 올렸다.
“나야 우리 아들 자주 보면 너무 좋지. 얼른 들어와.”
그녀는 서원의 등을 감싸고 안으로 이끌었다.
집에 왔으니 마음을 놓고 쉬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지희는 서원을 식탁 쪽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서원을 의자에 앉혀 놓고, 자신은 맞은편에 앉아 궁금하다는 듯 몸을 기울였다.
“보니까 어제도, 오늘도 도련님이랑 같이 오던데. 무슨 일이길래 줄곧 같이 다니고 서울에서 묵는 거야?”
왜 갑자기 식탁으로 데려오는가 했더니……. 이제 보니 지희는 제가 도겸에게 말했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저번에 도련님이 저를 좋아하는 거라며, 그것도 아닌데 저렇게 행동하면 쓰레기라며 신랄하게 비판했기에 혹여 사실대로 말하고 잘된 건 아닌지 기대하는 듯했다.
그런 거 아닌데……. 서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면?”
“사실은…… 어제랑 오늘, 병원에 갔어요.”
“병원? 병원은 또 왜? 어디 아파? 아직 검진일도 아닌데 병원은 왜, 또.”
병원이라는 말에 지희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단번에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서원은 걱정할 필요 없다며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제가 문제인 게 아니라…… 도련님이 좀 문제가 있어서요.”
“도련님이? 근데 왜 너랑 같이 가?”
제가 아픈 게 아니라는 말에 지희는 표정을 조금 누그러트리면서도, 여전히 심각한 기색이었다. 가족처럼 깊은 사이는 아니어도, 어렸을 적부터 계속 봐 왔던 사이이기에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서원은 이걸 말해도 되나, 조금 고민하다가 비밀을 말하듯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그…… 도련님이 저한테 일방 각인을 하셨대요.”
“……뭐? 일방 각인?”
“시골로 이사 갔을 때부터 도련님이 계속 저를 찾아오셨는데, 그랬던 이유가 저와 떨어져 있으면 머리도 아프고 불면에 잠도 못 주무신다고 하더라고요.”
“…….”
“어쩌다 보니 같이 병원을 가게 됐는데…… 그런 결과가 나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서원은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자 지희는 생각하지도 못했다는 듯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역시 내 말이 맞지? 도련님이 너 좋아하는 거 맞다니까.”
“아, 아니요. 도련님은 저를 좋아한 적이 없으니까 각인했을 리가 없대요. 그래서 오진일지도 모른다고 하셔서 오늘 재차 검사했어요. 근데 그대로라……. 아마 저번에 그, 러트가 왔었어서……. 그때 이성을 잃고 각인을 해 버린 게 아닌가 싶어요.”
서원은 꼭 그런 이유가 아닐 거라며 해명하면서 귓가를 발긋하게 물들였다. 임신까지 했으니 상황을 얼추 알긴 하지만, 그래도 가족에게 성관계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열기를 식히는데, 지희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에이, 그런 일이면 모든 알파들이 러트 겪다가 각인하게? 각인은 그렇게 쉽게 되지도 않아. 상대방이 없고선 못 살 때쯤 되는 게 각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