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아무튼 그가 일방 각인이라는 사실을 한사코 부인하면서도 제게 같이 있자고 하는 이유는 어렴풋이 알 것 같긴 했다. 저랑 있으면 통증도, 불면도 가라앉는다고 했으니까.
그걸 생각하면 저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가 되고, 동정심이 일긴 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원하게 되면 아무래도 괴롭겠지.
그렇지만 이번에 서울에 내려온 건 그의 병명을 확인하기 위함이고, 또 그가 나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오진이건, 진짜건 굳이 제가 곁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서원이 이번만큼은 의견을 굽히지 않을 것처럼 단호하게 나오자, 도겸은 답답하다는 듯이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더니 차 뒷좌석 문을 열어 줬다.
“데려다줄 테니까 차에 타.”
“어딜요?”
“어머님 집에 태워다 준다고. 왜, 또 내가 뭔 짓 할 것 같아서 그래?”
도겸은 도둑이 제 발 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괜히 발끈했다.
오늘도 병원 진료 하는 거 구경만 하라더니, 얼떨결에 진료를 받게 했다 보니 그다지 신용이 가지 않아서 한 번 더 물어본 것뿐이었는데……. 제가 막무가내였던 건 알긴 하나 보지?
“……아뇨, 타요. 그냥 쳐다본 거예요.”
“…….”
서원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의미로 말했으나, 도겸은 이 말을 한 게 오히려 더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뒤따라 도겸이 차에 올라타고,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어머니 집으로 가는 중에도 도겸은 반응이 왜 그러냐고, 사람 못 믿냐며 어처구니없다는 말을 연신 강조했다. 믿을 만한 행동을 보이고 그러던지……. 발끈하는 것도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 것 같아서 반쯤은 흘려들었다.
그나저나 도련님이 원래 평소에 이리 말이 많은 편이었나? 요즘 그의 모습을 보면 마치 꾸며진 모습을 봐 왔던 것처럼 차이가 있었다.
콩깍지가 벗겨져서 이런 모습이 잘 보이는 거라고 하기에는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여전했다. 일방 각인 때문에 사람이 초조해지고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기라도 한 걸까?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 * *
“하…….”
서원을 집에 데려다주고, 도겸은 집으로 돌아온 뒤 문을 쾅 닫았다.
제가 아는 서원은 무척이나 마음이 여렸다. 그래서 약한 척을 하면 어쩌지, 하다가 끌려오는 편이었는데 요즘 점점 더 단호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단호해진 걸까.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파트너 일도 그만두고 허허벌판 시골까지 내려가기까지 하는 행보를 보였으니 그 이유 때문 같았다.
아니, 윤서원은 클럽 같은 곳을 다녀본 적도 없지 않나? 도대체 그런 양아치 같은 새끼는 어디서 만나서 원나잇을…….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나이 들게 보는 게 아닌가 싶어서 평소 입던 스타일도 아닌 옷을 입고 갔는데, 이런 것도 다 쓸모가 없었다. 단추를 위에서 두어 개씩 끌어내리며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거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제야 들어오니?”
“……어머니.”
고개를 돌린 곳에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서 있었다.
윤미애. 새카만 원피스에 붉은 립스틱, 올려 그린 아이라인까지 사나운 인상을 주고 있었고, 향수를 얼마나 많이 뿌렸는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배 비서에게 들은 내용도 없고, 집에 들어오면서 확인한 핸드폰에도 연락 한 번 오지 않았는데 왜 온 거지.
도겸이 차가운 목소리로 부르자, 그녀가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엄마라고 부르라니까. 얘가, 왜 이렇게 딱딱해졌어.”
“제가 집에 아무 때나 찾아오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아니, 뭐…….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잠깐 아들 얼굴 보고 싶어서 왔지.”
도겸이 단호하게 선을 긋자, 미애는 이제야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전에도 연락도 없이 집에 찾아오기에 비밀번호도 바꿨는데, 또 어떻게 알고 집에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 마스터키를 몰래 만든 게 분명했다.
잠금장치를 다 뜯고 새로 설치해야겠군. 물론 그래도 어떻게든 오겠지만 한 번은 막을 수 있겠다 싶어 냉정히 생각하고 있는데, 미애가 맞은 편에 서며 입을 열었다.
“오늘 열성 오메가, 그 녀석 만났다면서?”
“…….”
도겸의 눈빛이 한층 더 매섭게 가라앉았다.
안 그래도 한껏 예민해진 상태였다. 어머니가 윤서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좋은 말을 한 적이 없으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고 피곤하고 짜증이 치솟았다. 꽉 쥔 주먹 위로 퍼런 핏줄이 불뚝거렸다.
살벌한 분위기가 흘렀으나, 미애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잔소리하듯 말했다.
“도대체 그 아이는 왜 그렇게 만나는 거니? 다른 오메가도 많은데.”
“제발 제가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신경 쓰지 마세요. 선 보는 자리도 그만 만드시고요.”
“어머, 누가 들으면 매번 나간 줄 알겠다. 선 보라고 자리 열 번 만들면 한 번밖에 안 나가면서. 그리고 네가 제대로 된 오메가를 만나면 이런 짓을 하겠니?”
“그 한 번도 비즈니스 자리라고 속이셔서 나간 겁니다. 이러면 반감만 커지는 거 모릅니까?”
알았더라면 나가지 않았을 자리들이었다. 이제 저도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애도 아니고 혼자 사람을 못 만날까. 제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도겸이 괜한 짓 하지 말라고 강조하자, 미애가 눈썹을 팔 자로 늘어트리며 걱정 어린 목소리를 냈다.
“내가 만나라고 해 보는 오메가들은 다 귀한 집 자제들이니까. 그리고 엄마는, 네가 그런 열성 오메가한테 휘말릴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제가 걔한테 뭘 휘말려요?”
왜 또 윤서원 이야기를. 도겸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미애는 기세를 죽이지 않았다.
“휘말리고 있지. 지금 몇 년째 그 아이를 만나는 거니?”
“어머니가 걱정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네 행보를 봐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네가 그 녀석 데리고 호텔 들락날락하는 거 봤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요즘은 그 녀석 보려고 주말마다 간다면서? 오늘도 그랬고.”
“이유가 있으니까 간 거예요. 제가 아니라면 좀 믿으세요.”
“이유가 뭔데?”
페로몬 체증과 파트너가 이유였지만, 그걸 알면 더 저와 서원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할 게 훤히 보였다. 그냥 만나는 것도 싫어하시는데 잠자리까지 했단 걸 알면 서원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도겸은 깊게 숨을 내뱉으며 그녀를 바라보다, 자연스럽게 이유를 말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어머니가 그 녀석 싫어하는 이유는 알아요. 집안도 형질도 훨씬 모자라니까 만날까 봐 걱정되겠죠.”
상류층 사람들은 저마다 급이 맞는 상대를 만났다. 그것이 부의 축적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한자리하는 인맥들을 늘릴 기회까지 됐으니까.
사랑놀이하느라 그 기회를 놓치는 건 로맨티시스트가 아니라 무척이나 바보 같은 짓이라고 여겨지기까지 했다.
또한, 우성 체질을 가진 이들이 머리가 좋아서인지 사업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고, 자연스레 우성들끼리 만나다 보니 자식들도 대부분 우성을 낳는 경우가 많았다.
우성끼리 만나도 간혹 열성이나 베타, 체질이 도드라지지 않는 아이가 나오긴 했지만, 그런 경우엔 후계 구도에서 제외되는 게 대다수였다. 그러니 체질이 모자란 상대를 만나는 건 엄청난 손해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제가 윤서원을 그런 의미로 곁에 둘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성 알파에게 열성 오메가는 성적으로 끌리지도 않는다면서요. 제가 그 녀석을 좋아하기라도 하겠습니까?”
도겸은 어렸을 적부터 우성은 열성을 사랑하는 일이 없다고, 태생적으로 끌리지 않게 되어 있다고 교육받았다.
간혹 우성 알파가 열성 오메가를 만나 결혼까지 하는 일도 있긴 했지만, 그런 경우는 비정상적이라고 힐난했다. 제가 유학 갔던 미국에서는 더더욱 그 경향이 심했지.
잠시 유학 갔을 때를 떠올리며 미간을 좁히는데, 미애는 ‘태생적으로 안 끌린다’라는 말에 안도했는지 기세를 조금 누그러트렸다.
“그렇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엄마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 좀 해 줘. 그리고 슬슬 결혼할 때도 되지 않았니. 네 아버지는 늦게 결혼했다지만, 너무 늦게 결혼하는 것도 보기 좋지 않아.”
“그 말 하러 오신 거예요?”
“아니……. 뭐. 저번에 보니까 집에 음식이 하나도 없길래, 아줌마한테 부탁해서 냉장고 좀 채워 뒀어. 너무 바깥 음식만 먹는 것도 안 좋다. 살도 좀 빠진 것 같은데? 피부도 푸석푸석해진 것 같고…….”
미애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도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손을 뻗어 뺨을 만지려고 하기에, 도겸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손길을 피했다.
가정부도 있는데 제가 없어서 밥을 못 챙겨 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게 조금 황당했다. 선 자리를 잡아 오는 것도, 음식을 굳이 챙겨 오는 것도 참……. 제가 몇 살인 줄 아는 건지 모르겠다. 늘 생각하지만 너무 과했다.
“일이 많아서 그래요. 냉장고에 있는 거 잘 챙겨 먹을 테니까 이만 돌아가세요. 저 오늘 피곤해요.”
“어어, 벌써? 왔는데 차 한잔이라도 내주면 얼마나 좋아.”
“멋대로 찾아오신 건 어머니입니다.”
아무리 핏줄이고 가족이라지만,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그녀에게 대접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안 그래도 병원 검진 기록 때문에 예민한데, 집에 오자마자 어머니가 불청객처럼 있고. 서원의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윤서원 이야기로 제 심경을 들쑤셔 예민하게 군 것도 있어 더 날카롭게 반응하게 됐다.
도겸이 심상치 않은 기색을 보이자, 어머니는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는지 흠칫 당황하더니 나갈 채비를 했다.
“아휴. 우리 아들이 피곤한가 보네. 알겠어. 엄마 이제 돌아갈 테니까 쉬어.”
그녀는 도겸에게 화내지 말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가지고 온 짐들을 부랴부랴 챙기고 돌아갔다.
어머니가 집 밖으로 나갔지만, 집 안에는 코를 찌르는 그녀의 향수 냄새가 잔재로 남아 있었다. 그 냄새가 관자놀이를 콱 조이는 듯했다.
“하……. 씨발.”
뭐가 이렇게 머리 아파. 윤서원이랑 있었을 땐 다 괜찮아진 것만 같았는데, 또 이 지경이다.
도겸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으며 욕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