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36)

<47화>

검사는 꽤 오래 걸렸다.

일반인들의 경우 검사를 하고 며칠 후에나 결과를 받을 수 있겠지만, 도겸은 아니었다. 미리 손을 써 둔 건지, 돈을 그만큼 쓴 건지 당일에 결과를 받아볼 수 있었다.

진료실 안으로 서원과 도겸이 함께 들어가자, 의사가 둘을 바라보며 물었다.

“두 분 결과 같이 들으실 건가요?”

“아니…….”

“네.”

서원이 아니라고 하기도 전에 도겸이 먼저 대답해 버렸다.

저럴 것 같더라니……. 황당했지만, 임신 빼고는 그에게 켕기는 게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제 상태를 알린다고 해도 별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픈 것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괜히 싫다고 뻗대면 그가 더 의심하고 뒤를 캘지도 모르니 순순히 있기로 했다. 서원이 포기하자, 의사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세한 내용은 가실 때 책자로 확인할 수 있도록 드릴 건데, 일단 윤서원 씨 결과부터 설명하겠습니다. 다른 점은 크게 신경 쓸 건 없고, 임신 중이셔서 입덧이 좀 있으신가 봅니다. 영양 불균형 소견이 나왔어요.”

“어쩐지 말랐더라.”

의사의 말에 서원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도겸이 서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산부인과에 갔을 때 빼고는 딱히 몸무게를 재지 않아서 몰랐는데, 살이 빠지긴 빠진 모양이었다. 임신하면 보통 살이 찌는 줄 알았는데, 정말 제가 안 먹긴 했구나.

아이에게 영양분을 주기 위해서라도 먹긴 해야 하는데, 뭐만 하면 속이 안 좋아서 평소보다 못 먹긴 했다. 서원이 조금 침울해하고 있자 의사가 마저 말을 이었다.

“입덧이 너무 심하면 약으로 잡을 수 있기도 하지만……. 반려 알파의 페로몬이 가장 부작용도 없고 효과도 좋아요. 웬만하면 반려 알파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게 좋습니다. 그 외에는 큰 이상 소견은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서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임신 중에 일어나는, 보통 산부를 힘들게 하는 일들은 반려 알파와 있으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서원은 입덧과 피곤함이 다른 열성 오메가에 비해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도겸과 함께하는 시간이 주에 한 번 정도이기에 고생하는 이유도 있었다.

의사의 설명은 친절했으나, 서원이 더 어찌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일단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도겸은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입덧 약 지어 줄 테니까 받아가.”

“…….”

그러곤 저런 말까지 했다. 지환을 누구보다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이라, 제가 지환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게 싫은 눈치였다.

서원은 그가 약을 지어 준다는 걸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덧으로 고생했는데 다행이다 싶었다.

“입덧 약은 보통 졸음이 많이 오는데, 그 부분은 약 지어 줄 때 자세히 설명해 줄 거예요. 그럼 다음은…… 서도겸 씨.”

의사는 컴퓨터를 두드리더니, 도겸의 검사 기록을 확인했다. 그는 조금 훑어보더니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번에 페로몬 이상이 있지만, 이유를 확인하기 힘들었는데……. 오늘은 확실하게 알겠네요.”

“뭡니까?”

도겸은 의사의 말에 화색을 보였다. 재촉하듯 바로 묻자, 의사가 조금 난처한 낯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방 각인입니다.”

“……일방 각인?”

도겸이 생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얼떨떨한 건 서원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는 둘이 일방 각인의 뜻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도겸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잘 모르실 만도 한 게, 일방 각인은 아주 희귀한 사례입니다. 연구 사례도 몇 없을 정도로요. 제가 저번에 각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던 것 기억나시죠?”

“네.”

서원은 들은 적이 없지만, 도겸은 이전에 병원에서 그런 진단을 받은 적이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도겸의 반응에 의사는, 모니터 화면을 돌려 서원과 도겸이 진단 기록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의사가 보여 준 화면에는 두 개의 그래프가 떠 있었다. 한쪽은 도겸이 이전에 검사했던 페로몬 수치였고, 다른 한쪽은 오늘 검사한 수치였다.

이런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서원이 봐도 이전의 그래프는 들쭉날쭉 정신이 없었고, 오늘 검사한 것은 비교적 완만하고 부드러웠다.

“저번에 봤던 그래프와 달리 지금은 페로몬이 안정되어 있어요. 보통 각인한 오메가와 함께 있을 때 이런 양상을 보이곤 하거든요.”

“각인한 오메가요?”

“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많이 원할 때 이렇게 이례적인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의사의 말에, 도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원을 바라봤다. 설마 이 오메가를 말하냐는 눈빛이었다.

서원도 덩달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와 시선을 맞췄다.

도겸이…… 제게 각인을 했다고? 그것도 그가 일방적으로 나를 원해서?

제가 그에게 각인한 것도 아니고, 도겸이 제게 일방적으로 각인을 했다니. 말도 안 됐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니 아주 조금의 가능성이 있긴 했다. 저를 좋아하지도 않는 그의 이성이 흐트러질 때는 딱 한 번. 러트 때밖에 없었다.

러트를 함께 보냈다고 다 각인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오직 성욕에 머리가 잠식되고 눈앞에 있는 오메가를 원하게 되니 그때 각인이 된 건 아닐까? 그때가 아니고서야 도겸이 일방적으로 저를 많이 원하는 경우는 없었을 텐데.

그렇지만 역시 믿을 수 없긴 하네. 저는 그날 술에 약까지 타 먹어서 더 이성이 없었는데, 저는 그에게 각인이 안 되고 그에게만 일방 각인이 진행됐다니. 차라리 쌍방이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서원이 혼자 생각하는 사이, 도겸은 제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그는 의사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아, 그럼 각인을 푸는 방법은 뭡니까?”

“아시다시피 억지로 각인을 푸는 건 쉽지 않아요. 약물로 푸는 방법이 있지만 큰 부작용을 초래해서 권장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도겸이 버럭 화를 내듯 언성을 높였다. 일방 각인이 진행된 건 의사의 탓이 아니지만, 차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눈치였다.

순간 진료실을 가득 메우는 지독한 알파 페로몬에, 의사는 움칠 몸을 떨더니 좀 전보다 한층 더 의기소침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마음을 단념하셔야 서서히 풀릴 텐데…….”

“아니, 애초에 좋아한 적도 없는데 뭘 단념하라고?”

“환자분은 모르셨어도 무의식적으로 원하는 경우가 있었을 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럼 내가 이 녀석을 반려 삼아 보기라도 했다는 건가?”

도겸이 간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럴 일은 추호도 없었다며 씨근덕댔다. 의사에게 묻는다고 나올 답도 아닌데 그랬다.

아무리 몇 번 본 적 있는 담당의라고 하지만, 애꿎은 사람한테 화풀이하다니. 서원은 의사가 난처해할 것을 백번 이해하며 도겸의 손을 붙잡아 아래로 이끌었다.

“도련님, 일단 진정하세요.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는 것뿐인데…….”

“오진이 분명해. 다시 해야겠어.”

“네, 네. 또 검사해 보면 되잖아요.”

“내일도 같이 와.”

서원이 토라진 아이를 달래듯 말하니 도겸의 기세가 누그러지긴 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저를 응시하며 말했다.

내일도 같이 오자니. 내일은 같이 오고 싶지 않았다. 도와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병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사람의 기력을 쪽 빨아내는 것 같고 재미도 없어서 두 번은 오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서원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에 띄게 우물쭈물하자, 도겸이 말을 이었다.

“일방 각인이 오진인지 뭔지 확인하려면 네가 같이 와야지.”

“……알겠어요.”

정말로 오기 싫었지만……. 정확한 검진을 받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말에 서원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입덧 약을 제조 받고 병원에서 나오자, 정문 앞에 그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늘 그랬듯 자연스럽게 차에 탈 뻔했지만, 서원은 뒷좌석 문을 잡고 순간 멈칫했다.

내일도 병원 진료를 받기로 했으니 하루 서울에서 묵어야 했다. 상식적으로는 서원의 부모님 집에서 지내게 하겠지만,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서원은 자연스럽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도겸에게 말했다.

“저는 택시 타고 가겠습니다.”

“어딜 가려고? 설마 그 시골집 가서 내일 오겠다는 건 아니지? 그런 낭비적인 일을.”

“아뇨. 부모님 집에서 묵으려고요.”

도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로 눈썹을 찡그렸다.

왜 저러지. 서울에 왔으면 있는 집에서 자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서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 그가 작게 혀를 차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아파트도 줬는데 왜 부모님 집에서 묵어?”

“그 집, 아직 안 받았는데요.”

“도장만 안 찍었지 네 거야. 들어가도 아무 문제 없고.”

“그런 이유 아니더라도 부모님 집이 더 편해요. 짐도 다 빼서 필요한 물건이나 갈아입을 옷도 없고요.”

“사면 되잖아? 백화점으로, 아니지…… 힘들어서 그러면 내가 사다 줄게.”

도겸은 당장 백화점으로 서원을 끌고 가 생활 살림을 다 사게 할 기세였으나, 뒤늦게 서원이 임신한 상태라는 걸 떠올렸는지 바로 말을 돌렸다.

저걸 배려라고 하는 건가……. 서원은 작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돈 낭비하는 거 싫어요. 그리고 서울 온 김에 엄마도 보면 좋으니까 그냥 좀, 그만 물어보세요.”

“…….”

최근에도 서울의 부모님 집에 들러 엄마를 보고 오긴 했지만, 제가 임신한 상태여서 그런지 그녀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온 김에 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하면 좋을 듯했다.

서원이 그만 집에 좀 보내 달라는 의미로 말하자, 도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할 말이 많은 눈치였다.

왜,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서원이 경계심을 바짝 세운 채로 그를 마주하고 있을 때, 그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을 때까지 도와준다며.”

“네? 그랬죠?”

“일방 각인이면 네가 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 나랑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왜 부모님 집에 가겠다는 걸 떨떠름하게 반응하나 했더니만……. 제가 아파트로 가면 얼렁뚱땅 같이 있을 생각을 한 건가? 아니, 그것보다……. 서원은 눈을 깜빡거리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오진이라면서요?”

“아직 모르잖아.”

“일방 각인이어도 낫는 데 제가 필요한 건 아닌 것 같던데요. 도련님이 단념하셔야 한다던데…….”

“좋아한 적 없다니까.”

“예, 뭐…….”

도겸이 그런 오해 좀 하지 말라며, 불쾌하다는 듯이 말하자 서원은 왠지 맥이 빠졌다.

의사가 한 말을 똑같이 했을 뿐인데 왜 저렇게 발끈하는지 모르겠다. 제게 단념하라고 상처 주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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