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36)

<46화>

서원이 입을 꾹 다물고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고 대답을 재촉하자, 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진료 보게 서울로 가자.”

“지, 지금요?”

“빠를수록 좋은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지금은 안 되고, 다음 주에 가요. 저도 정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당장은 힘들어요.”

“그럼 다음 주에 데리러 올게.”

다행히 도겸은 당장 가자고 무작정 끌고 가지 않았다. 그나저나 내가 서울로 올라가도 되는데 굳이 데리러 오겠다니. 시간 낭비 아닌가 싶었지만,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서원은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이곤, 그에게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페로몬 문제 해결되면 이제 정말 더는 절 찾아오지 않는 거예요. 거래했던 거 기억나시죠? 다시는 도련님 볼 일 없게 해 달라고 한 거.”

“…….”

이미 거래했던 내용으로는 이제 안 봐도 될 사람이라고. 아량을 베풀어 병원까지 가 줄 테니 더는 찾아오지 말라는 뜻으로 이야기하자, 도겸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는 동요한 듯 보였으나,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을 휙 돌리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나도 이 일 아니면 굳이 이 시골 바닥까지 찾아올 이유 없어.”

“……그래요. 그럼 됐어요.”

비록 한 번에 도겸을 떼어내지 못하게 됐지만, 서원도 이편이 더 마음이 편하고 좋을 것 같았다. 저도 도겸이 아픈 건 보기 싫으니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자연스레 저를 찾는 발길도 줄어들 거고 서로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리라.

오랫동안 함께했던 사이이기에 지우기가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러기를 바랐다.

그리고…… 부디 큰 병이 아니고 단순한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 * *

도겸이 서울로 올라간 밤. 서원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지환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오늘 먼저 불러 놓고 먼저 집에 들어간 것도 미안하고, 도겸이 그에게 막 대한 것도 미안했다. 전화나 메시지로 사과해도 됐지만, 그런 식으로 사과하고 넘어가기엔 진심이 전해질 것 같지 않아서 만나자고 했다.

다행히 지환은 별다른 말 없이 나왔다. 서원은 그의 집 앞까지 가서 그를 마주하자마자 진심 어리게 사과했다.

“지환아. 미안.”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지환은 서원을 마주하자마자 헛웃음을 터트렸다. 돌이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조금 무섭다시피 한 반응에 서원은 더 어깨를 움츠리고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요즘 속이 너무 안 좋아서.”

“내가 설마 그것 때문에 어이없어하는 거겠어?”

“아니야……?”

“내가 냉혈한도 아니고 아픈 사람한테 화내겠어? 네가 아니라 그 새끼 말이야. 그 새끼 뭐야? 네가 말한 거랑은 다르던데.”

지환이 분노에 차 이를 뿌드득 갈며 말했다. 그 새끼란 도겸을 말하는 듯했다.

지환에게는 도겸을 제가 고백했다가 차였던 전 직장의 상사라고 설명했다. 마음은 받아주지 않으면서 회사에 자꾸만 복귀하라고 한다고. 그런 이유로 지환을 꼬드겼던 건데, 지환의 눈에는 그렇게 안 보였던 모양이었다.

평범한 직장 상사라고 하기엔 도겸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며 지환을 경계하긴 했지……. 그렇지만 또 사실대로 말하기도 뭣해 가만히 있는데, 그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차인 건 네가 아니라 그 인간 같던데? 아주 사람을 죽일 듯이 쳐다보고 페로몬을 쓰질 않나……. 그 인간 우성 알파 맞지? 페로몬으로 아주 목을 조여 죽이려고 하더라.”

“……미안.”

제가 한 일은 아니지만, 제가 지환에게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봉변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재차 사과하자, 지환은 “너 때문이 아니라니까…….”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을 돌렸다.

“하긴, 그런 또라이니까 네가 곤란해진 거겠지. 그래서 그놈은 그래서 갔어? 해결한 거야?”

“돌아가긴 했는데……. 완벽하게 해결한 건 아니라서 조금 더 봐야 할 것 같아.”

“지긋지긋하네.”

“그래도 네 덕분에 거의 다 정리했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까지는 증명했기에, 이제는 도겸과 함께 가서 병원 진료를 보게 하고 치료를 좀 도와주면 됐다.

솔직히 이것까지는 해 줄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저 없을 때 고생을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해서 거기까지는 봐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서원이 조만간 완전히 떼어낼 수 있을 거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자, 일그러져 있던 지환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 새끼가 또 찾아와서 뭐라고 하면 나 불러. 서울에서 달려와서 떼어내는 거 도와줄 테니까. 그리고 웬만하면 알파 보는 눈도 좀 키우고. 그 새끼, 얼굴만 좀 반반하지 성격이 개별로던데.”

“으응…….”

얼굴이 좀 반반한 수준이 아니라 월등히 잘생긴 편이지만……, 성격 험담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선 다정한 면모도 보이긴 했지만, 요즘의 그는 정말 이기주의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특히 지환과는 초면인데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더욱더 개차반처럼 보였을 터다.

서원은 지환의 배려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더 그를 부를 일은 없을 것이라 다짐했다. 도겸과 연이 끊기기까지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더는 지환에게 민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 * *

다시 찾아온 주말. 저번 주에 말했듯 도겸은 차를 몰고 와 서원을 서울로 데려갔다.

서원은 집 앞에 마중을 나온 도겸을 보고 조금 놀랐다. 그의 스타일이 눈에 띄게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일이 없었는지 머리가 차분하게 내려와 있었고, 옷은 늘 보던 정장 스타일이 아닌 찰랑거리는 소재의 남색 반소매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였다. 깔끔한 스타일이라는 건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긴 했지만, 쉬는 날이더라도 외출복으로 저런 옷을 잘 입지 않기 때문에 의외였다.

낯선 모습에 설렜는데, 아쉽게도 그 마음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긴 시간 동안, 도겸이 내내 잔소리를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했던 말과 같았다. 당시 결혼은 할지 안 할지 모른다고 애매하게 대답했는데도, 정말 그런 놈에게 미래를 맡길 거냐, 아이를 제대로 키울 것 같냐, 그 사람의 연봉이 얼마인 줄 아느냐 하는 얘기였다. 걱정이라고 하기엔 험담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정말로 지환과 결혼할 생각도 아니고, 그의 연봉 같은 사적인 이야기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버스를 타고 가는 게 훨씬 편했을 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중간에 잠들었는데 깨우지 않았다는 거일까. 잠에서 깼을 때는 한 병원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대형 병원이었다.

서원은 도겸과 함께 차에서 내리며, 그에게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모든 검사 다 받아요. 혹시 페로몬 말고 다른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려면 오래 걸릴 텐데.”

“오래 걸리는 게 문제예요? 그렇게 아파서 고생하면 당연히 검사를 받아야죠.”

“중간에 가면 안 돼.”

“안 간다고 몇 번을 말해요…….”

서원이 힘없이 대답했다. 병원에서 검진을 받는 것부터 시작해서 저 없이도 생활에 불편감이 없을 때까지 도와주겠다고 말했건만, 도겸은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가면 안 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전에 누가 도망쳐서 한이라도 맺혔나? 저번에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휴가를 며칠 연속해서 썼을 때도 도망쳤다고 그러고, 파트너를 그만두고 시골로 이사 갔을 때도 배 비서가 제게 미리 연락했으면 사라졌을 것 같다고 하고…….

아니면 제가 그렇게 언제든지 튈 것 같이 굴었나? 그렇다고 하기엔 6년 파트너를 하는 동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도겸이 시간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차피 오래 걸릴 것 같은데 너도 검사해.”

“네? 저는 왜요?”

“어느 쪽이든 기다려야 하는 건 매한가지고, 네가 도망치지 않게 수시로 확인하려면 그편이 편하니까. 그게 훨씬 더 효율적이지 않겠어?”

도겸은 시간을 일 분 일 초로 나눠 쓰는, 시간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시간 낭비는 용납하지 않는 그런 사람.

제가 파트너를 그만두고 난 후로는 그 규칙이 많이 무너져내린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일분일초가 돈보다 귀한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도겸은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바에야, 서원도 같이 검사를 받으면 좋지 않겠냐는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서원은 생각할 것도 없이 거부했다.

“됐어요. 전 아픈 곳이 없어요.”

“임신했다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넌 열성 오메가니까 몸 관리에 힘써야지. 혹시 안 좋은 부분이 있으면 일찍 치료하는 게 좋잖아. 배 비서, 한 명 더 검사한다고 얘기하고 와.”

“제가 필요 없다는데 그걸 왜……, 아니, 배 비서님?”

제멋대로인 도겸의 태도에 서원이 재차 안 한다고 말하려 했지만, 배 비서는 바로 카운터로 가 버렸다. 서원이 급히 배 비서를 불러 봐도 그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서원이 허망한 표정으로 배 비서의 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도겸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검사 받아. 내가 뭐 안 좋은 거라도 시켰어?”

“…….”

안 좋은 건 아니지만,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지…….

서원은 도겸을 샐쭉하게 바라보다 시선을 휙 돌렸다. 어쩌다 제가 병원에서 진료까지 받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검사를 한다고 누구의 아이인지까지 나오는 건 아니었다. 유전자 확인은 아이가 태어나고 난 후에나 가능했으니까.

게다가 도겸도 제가 품은 아이가 지환의 아이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으니 그런 지저분한 일을 위해 검사시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꿍꿍이가 아니라 정말 저를 걱정이라도 하는 건가? 아까 차를 타고 오면서 지환의 험담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해서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는데, 그가 그러는 이유는 제 미래를 걱정해서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별다른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제 건강과 미래에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이유가 있나 싶다.

비록 마음이 통하지는 않았어도 오랫동안 몸을 겹치고 사이가 나쁘진 않았으니 걱정이 될 순 있긴 한데……. 저를 찾아오는 이유는 오직 그가 고통을 호소하기 때문이니까.

역시 도겸의 의중을 이해할 수가 없다. 서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뱉고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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