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36)

<45화>

“……네?”

내가 임신한 걸 어떻게 알았지? 떠보는 것일까? 그렇다기에는 도겸은 너무나도 확신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병원 기록이 유출된 건가? 아니면 엄마가?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복잡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어서 몸까지 떨리는 것 같았다. 몸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것 같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주먹을 꽉 쥐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고 있을 때였다. 도겸이 한숨을 내뱉더니 어디선가 책자 하나를 가져왔다.

“이거, 네 임신 노트잖아.”

도겸이 가져온 것에 서원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며칠 전 산부인과에서 받아온 임신 오메가 수첩이었다.

“그걸, 어떻게…….”

서원은 물어보려다가 숨을 삼켰다.

분명 책상 서랍에 넣어놨었는데……. 저게 어째서 도겸의 손에 들려 있지?

제가 잠들었을 때 집을 뒤진 것이 틀림없었다. 불길한 느낌이 이걸 뜻하고 있었나. 도겸이 집을 뒤질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면 이곳은 제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니까. 그가 제 책상을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제가 너무 경계심이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서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모르겠다.

서원이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있을 때, 도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나랑 파트너 할 때 저놈이랑 원나잇이라도 했나 보지?”

“……네? 그게 무슨.”

“저놈, 서울에서 꽤 방탕하게 지냈다던데. 이지환. 나이 스물다섯. 현재 D 구단에서 프로게이머로 일하고 있고. 클럽에서 오메가들 만나고 다니기로 꽤 유명하던데……. 어쩌다 저런 놈을 만나서 임신까지 한 거야?”

도겸은 이미 지환에 대한 뒷조사는 끝마쳤다는 듯 그에 대한 정보를 술술 불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지환을 만난 건 일주일도 안 됐고, 그저 부탁했을 뿐이니까. 그런데 지환과의 원나잇이라니? 설마 제가 도겸의 아이가 아닌 지환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지?

그리고 제가 그렇게…… 클럽에서 만난 알파랑 원나잇을 할 정도로 문란해 보이나?

줄곧 도겸만을 좋아했고 그와의 파트너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 왔다. 그런데 제가 그의 눈에 그런 식으로 보인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오해하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그렇지만, 말해서 뭐? 말해봐야 제가 그의 아이가 아닌 도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만 알리게 될 뿐이었다. 그러면 제 아이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서원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이는 지켜야 했다. 제가 문란한 취급을 받더라도 그래야만 했다.

서원이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자, 그는 그것이 무언의 긍정이라고 느껴졌는지 확신에 차서 말을 더 이었다.

“넌 책임감 있는 성격이니까 아이를 낳으려는 생각이겠지. 그렇지만 저런 놈팽이가 너와 아이를 제대로 보살필 리가 없잖아.”

“…….”

“아이, 키우는 거 도와줄 테니까 그런 놈한테 마음 접고 돌아와.”

“……아이 키우는 걸 도와주겠다고요?”

“그래. 재단 결연으로 끝까지 도와줄 테니까, 저런 미래도 없는 놈한테 맡기는 거보다야 그편이 나을 거야. 돈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고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게 될 테니까.”

“아니……. 잠깐만요. 그걸 왜 해 주시겠다는 건데요? 이해가 되질 않는데.”

재단 결연은 일대일로 후원해 주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기업 재단에서 해 주면 좋기야 하겠지만, 갑자기 그걸 왜 해 주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자신의 핏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해 줄 이유가 없지 않나.

넓은 배포로 배려를 해 준 걸 수도 있었으나, 제가 아는 도겸은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서원이 반쯤 따지듯 묻자, 도겸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저런 양아치 새끼한테 널 넘길 수 없으니까.”

도겸은 지환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겉모습이 워낙 화려하기도 하고 뒷조사를 하며 알아본 내용이 찜찜하다는 이유인 듯했다.

“네가 저딴 자식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 착각하고 있는 거겠지만……, 뭐. 마음을 접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을 테니까 저런 놈한테 기대하지 말고 돌아와.”

“하…….”

도겸의 말을 듣던 서원은 저도 모르게 허탈한 숨을 터트렸다.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겠다고? 결국 파트너를 하라는 말이구나.

페로몬 문제 때문에 파트너에 집착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긋지긋했다. 서원은 아릿할 정도로 아랫입술을 꾹 물고 있다가, 가슴께에서 뜨겁게 터져 나오는 억울함을 토해 내듯 입을 열었다.

“필요 없어요.”

“뭐가 부족해? 네가 지키고 싶은 게 아이라면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하는데.”

“더는 도련님의 파트너 하기 싫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서원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도겸에게 짜증을 부렸다.

사실, 아이를 키워 주겠다고 하는 건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혼자 아이를 키우기 힘든 건 사실이었고, 도겸의 말대로 재단 결연으로 후원을 받게 된다면 최상위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도겸 또한 제 아이인 걸 모르니 아이를 지우지 않아도 되고.

그렇지만 서원은 이제 정말로 그와의 인연을 끊고 새롭게 살아가고 싶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 마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결국 상처받게 될 것을 아니까. 지금은 저를 찾는다지만, 그게 사랑은 아니니까. 다른 오메가를 만날 거라는 걸 아니까.

그의 곁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상상을 하니 심장이 따끔거렸지만, 서원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모진 말을 뱉어냈다.

“이미 저희의 관계는 끝났어요. 그때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붙잡지 않으신 것도 도련님이었고, 저는 파트너 같은 건 더는 하기 싫어요.”

“너랑 인연 끊을 생각으로 말한 건 더더욱 아니야. 그 인간이 좋아서 더는 파트너를 그렇게 못 하겠으면 배 비서한테 일 배워. 비서 자리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럼 마음 걸릴 것도 없지?”

도겸은 굳이 페로몬 파트너가 아니어도 된다며, 갑자기 노선을 틀었다. 비서 일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켕기는 것도 없을 거라는 의미였다.

굳이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제가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증상이 완화됐다. 아마 그것을 노리고 제안하는 것 같았다.

“비서는 무슨 아무나 합니까? 그리고 이미 배 비서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두 명으로 늘면 일거리도 줄어들고 좋네. 배 비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걸.”

“…….”

그의 말에 순간 배 비서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번에 봤던 얼굴은 평소보다 수척해져 있었고 다크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오려고 하고 있었지. 안 그래도 도겸을 보필하느라 업무가 많은데, 근래 들어 도겸이 예민해지기까지 해서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애꿎게 고생하는 사람을 떠올리니 흔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니었다. 이제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었다.

“……싫어요.”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백번 양보해서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거 믿어 주겠다는데도 싫으면 내가 뭘 어떻게까지 해야 하는데?”

“도련님이랑 끝을 내고 싶다고 말하는 거잖아요. 눈치 없어요?”

서원이 눈을 질끈 감고 토해 내듯 말하자,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말만 하면 이건 어쩌네, 저건 어쩌네 하며 바로 대꾸했으면서 이상하리만큼 말이 없었다.

왜지? 서원이 눈꺼풀을 바르르 떨며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도겸이 충격받은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카롭게 말했다고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몇 번이고 말했던 내용이기에 저렇게까지 충격받을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양심이 쿡쿡 찔렸다. 제가 너무 말을 심하게 했나…….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듣지를 않는걸.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애써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가만히 있던 도겸이 나직하게 목소리를 내리깔며 물었다.

“그럼 정말 저 알파 새끼랑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

그건……. 빈말이라도 그럴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지금의 도겸이라면 결혼식까지 쫓아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환에게 그런 것까지 부탁할 순 없으니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서원은 고민하다 에둘러 답했다.

“아직…… 저 혼자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거라 확답할 순 없지만 그러고 싶어요.”

“정말로 그걸 원한다고? 정말 저런 놈한테 미래를 맡기겠다는 거야? 너도, 아이도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건 도련님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니에요.”

“신경 쓰여.”

“…….”

“네가 신경 쓰여서 미칠 것 같다고.”

도겸이 진심 어린 눈동자로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결국에…… 거래 같은 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가 확실한 게 좋다며 가져다줬던 계약서를 들이밀고 쫓아낼 수도 있었지만, 도겸이 미련 남은 사람처럼 굴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니까. 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걱정하는 사람처럼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약해지니까.

서원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약한 말이 나올 것 같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러다간 어물쩍 또 넘어가게 되고 말 것이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제 뒷조사를 할 수 있고, 지금은 제가 지환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더 뒷조사하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챌지도 몰랐다.

그러느니…… 차라리 문제의 본질을 해결해 주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결국 도겸이 저를 찾아오는 건 페로몬 문제 때문이었다.

그걸 해결해 주면, 더는 저를 찾아올 이유가 없어질 거였다. 그의 입으로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저한테 신경이 쓰이는 건…… 도련님이 저 없을 땐 아프셔서 그런 거예요. 제가 저번에 병원 가 보라고 했죠. 가 보셨어요?”

“맨날 똑같은 이야기만 하는 걸 뭐하러.”

도겸이 병원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저한테는 병원을 가 보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당부했으면서, 정작 자신은 가지 않고 있는 게 이상했다.

왜 그러는 거지? 문제가 있는 걸 본인도 알 텐데. 답답했지만, 서원도 처음 임신 증상이 나타났을 때 은연중에 불안함을 인지했는지 병원에 가는 것을 무의식중에 회피했었다. 어쩌면 도겸도 심각한 일일까 봐 두려운 걸지도 몰랐다.

“그럼 이번에 저랑 같이 가요.”

“같이…… 가자고?”

“그 문제 때문에 계속 저를 곁에 두려고 하시는 거잖아요. 치료받으실 때까지 필요한 게 있다면 도와드릴 테니까, 병원에 가자고요.”

짝사랑 상대니, 아이니 이야기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들으려고 하더니만, 병원을 같이 가 주겠다는 말에 도겸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솔깃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 나을 때까지 곁에 있어 줄 거야?”

“……도련님이 병원 진단서 가지고 조작질하지 않는다면요.”

“안 해. 이제 알았는데 의료법이 아주 까다롭고 성가시더군. 네 진료 기록도 못 보게 해서 깜빡 속을 뻔하기까지 했잖아.”

“…….”

당사자 앞에서 의료기록을 확인하려고 했다는 걸 대놓고 말하다니.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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