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처음에는 서원이 아기일 적의 기록이 담긴 수첩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책자가 새것처럼 보였다. 종이가 변색되지 않았고 빳빳하고 구겨짐 하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앞표지에 윤서원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이 눈에 밟혔다.
“…….”
도겸은 여태까지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집을 뒤지고 있었건만, 이제야 해서는 안 되는 걸 하는 사람처럼 가슴이 가쁘게 뛰었다.
서원이 굳이 제게 말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 멋대로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책자를 펼치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긴장감에 심호흡을 한 뒤 책자를 펼치자, 안에 사진 한 장이 붙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흔한 사진이 아니었다. 새카만 배경에 하얀 점이 찍혀 있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쓰여 있는 날짜는 서원이 서울에 올라와 산부인과를 방문했던 그날이었다.
“하…….”
태아 사진이구나.
윤서원이 임신을 했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도겸은 저도 모르게 억누르고 있던 숨을 크게 터트렸다.
산부인과라고 하기에 페로몬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서원이 오늘 속을 게워 내는 등 아픈 기색을 보여서 혹시 엄청난 병에 걸린 게 아닐까 걱정했었다.
생사를 오가는 심각한 병에 걸리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그런데…… 임신이라고?
윤서원은 열성 오메가이니 임신할 확률이 기적 수준으로 낮았다. 그래서 그가 산부인과에 가서 검진을 받았다고 해도 그건 아닐 거라고 넘겼었다. 그런데 임신이었을 줄이야. 기력이 없고 속을 게워 내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무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원이 제 페로몬 파트너를 해 줬으니, 만일 서원이 아이를 가진다면 그것은 제 아이여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윤서원은 제게 임신했음을 알리지 않았다.
“……왜?”
왜 제게 말을 안 한 거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생각을 이어 가는 도중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아까의 알파, 이지환이 떠올랐다.
연기라고 생각했지만, 둘의 분위기는 다정했고 서원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를 털어놓는 목소리에는 거짓이 없었다. 윤서원이 저를 속이려고 쇼를 하는 것이리라 불신의 눈을 가득 담고 봐도 그래 보였다.
그러고 보니 수첩에 적혀 있는 임신 날짜를 역으로 계산해 보면 서원이 페로몬 파트너를 그만두겠다고 말한 때와 얼추 비슷했다. 설마 그때부터 이지환과 관계를 맺은 건가? 저번에는 혼자 짝사랑했다고 하지 않았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제가 아는 윤서원은 무척이나 순진하고 책임감이 강했다. 어쩌면 비슷한 시기에 이지환과 원나잇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고 이지환을 사랑하게 된 거라고 착각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윤서원이 제 파트너를 할 수 없다고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도 말이 됐다. 다른 알파의 아이를 가진 채로 자신과 관계를 맺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이해와는 별개로 이 상황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머리에 터질 듯이 피가 몰리면서 짜증이 솟구쳤다.
어떻게 그런 놈팽이 같은 자식이 윤서원을 임신시킨 건지……. 윤서원의 부모도 아니면서 제 아들이 생양아치를 데리고 온 광경을 본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좆 같은 새끼가…….”
당장이라도 집에서 뛰쳐나가서 그 새끼의 멱살을 쥐어잡고 면상을 후려쳐 주고 싶었다. 다시는 서원의 앞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밟아 버리고 싶은 충동이 울컥울컥 화산처럼 끓어올랐다.
그렇지만 도겸은 겨우 충동을 눌러 삼키고 배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고 금방 전화 너머로 배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네, 도련님.”
“윤서원이 만난다는 이지환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 와 봐. 하나도 빠짐없이 꼼꼼하게.”
서원이 지환의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건 추측일 뿐이었다. 사후 피임약을 먹이긴 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히트사이클과 러트를 함께 보내기도 했으니 제 아이일 확률도 높았다.
제가 멋대로 소설을 써 내려간 건지, 아니면 진짜인지 진위 확인이 먼저였다.
배 비서에게 지시를 내리는 도겸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으음…….”
피곤하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머리가 연신 멍하고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무기력증이 온몸을 뒤덮은 것처럼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마음 같아선 쭉 침대에서 뒹굴고 싶었다. 그렇지만 오늘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그런지,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다방에서…….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서원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헉……. 그러다 잠들었구나.”
도겸의 차에 탄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언제 집에 들어온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럼 도겸은 어디에 있지? 두고 집에 먼저 간 걸까? 왠지 그랬을 것 같지가 않아, 서원은 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겸은 거실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태블릿을 들여다보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네.”
“안 가셨네요…….”
“환자를 두고 어딜 가. 밥 먹을래?”
도겸은 환자를 두고 돌아갈 만큼 냉정한 성격은 못 된다는 듯 말하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제가 무슨 엄청난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돌아가 주는 게 제게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서원은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이어 가다, 그가 밥 얘기를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고개를 기울였다.
“밥이요?”
“야채 죽 끓여 놨어. 데워 줄 테니까 기다려.”
도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더니, 태블릿을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까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근데 죽을 끓였다고? 사 온 게 아니라?
요리를 자주 하지는 않아도 솜씨가 없는 편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긴 했다. 좋은 음식만 먹고 자라서 입맛이 까다로운 편인데, 매번 사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니 요리할 때도 종종 있었다. 근데 그가 제 죽을 끓여 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도겸이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글자글 끓는 소리가 들렸다. 은은하게 풍기던 고소한 냄새도 한층 짙어졌다.
“먹어.”
도겸은 냄비에 담겨 있던 야채 죽을 적당히 퍼서 그릇에 담아 줬다. 서원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야채 죽을 내려다보며 그에게 물었다.
“이걸 언제 하셨어요?”
“너 잘 때. 냉장고에 있는 재료 좀 빌렸어.”
“재료 별로 없었을 텐데…….”
“몇 개는 사 왔지. 아, 열쇠도 빌렸어.”
도겸은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놨다.
내 열쇠가 왜 거기서 나와? 서원이 퍼뜩 제 주머니를 뒤지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제 것을 훔쳐다가 저를 침대에 눕혀 놓고, 또 제집 드나들 듯 장을 봐 온 모양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튼 배가 고파서 등가죽에 달라붙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서원은 더 묻지 않고 자리에 앉아 얌전히 죽을 떠먹었다. 아침부터 입맛이 없어서 힘들었는데, 죽은 속이 편안한 음식이라서 그런지 잘 들어갔다. 다음부턴 입맛이 없을 때 죽을 해 먹어야겠다.
그렇게 죽을 반쯤 먹었을 때쯤 되자,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면서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제가 잠든 사이에 뭘 한 건 아니겠지?
서원은 제 맞은편에 앉아 다시 태블릿을 보고 있는 도겸을 힐끗 쳐다봤다. 죽을 끓여 준 것 빼고는 평소와 똑같은 걸 보아 별거 없는 것 같았다.
서원은 다행이라며 안도하고는, 오늘 데이트가 끝나면 도겸에게 하려고 했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오늘…… 주셨던 서류 다시 가져가실 거죠?”
“뭐? 아파트?”
도겸이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 서원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아파트에 미련이 있어서 물어보는 건 아니고……. 일이 이렇게 됐으니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싶어 묻는 거였다. 그런데 도겸은 뭔 헛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살짝 좁히며 대꾸했다.
“그건 너 가지라니까. 넌 내가 뭐 줬다가 뺏는 쪼잔한 놈으로 보여?”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왜 물어봐. 그리고 그건 뇌물이 아니라 네가 6년 동안 파트너를 해 줬으니까 준 거라고 몇 번을 말해?”
“…….”
짜증이 가득 담긴 도겸의 목소리에 서원은 더 묻기를 그만뒀다.
파트너 대가라는 얘기는 듣긴 했지만……. 그래도 앞으로 도겸과 마주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부담스러운 건 여전했다.
아파트는 일단 서류상으로만 받아두고 언제든 돌려줄 상태로 둬야겠다. 서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파트보다 꼭 그에게 하려고 했던 말을 떠올리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일단, 알았어요. 근데 이제 그만 오실 거죠? 저,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 확인하셨으니까…….”
도겸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눈앞에 데려오면 믿어 주겠다고 했었다.
데이트를 시작하자마자 제가 속을 게워 내는 바람에 제대로 된 모습을 못 보여 주긴 했지만……. 사랑하는 사이라고 한 것도 아니고 짝사랑하는 상대라고 말해 둔 거였으니 잘하면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지환은 곧 서울로 돌아갈 사람이었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몰랐다. 서원이 부디 잘 넘어가기를 바라며 말을 꺼내자, 도겸이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좋아하는 사람?”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는 다시 서원을 바라봤다. 그리곤 심각하게 안면근육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순진하기는. 저런 날라리 같은 새끼가 꼬신다고 바로 넘어가?”
“네? 날라리……? 꼬셔요?”
“네가 저런 스타일을 먼저 좋아할 리가 없잖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증명하려고 한 건데 갑자기 스타일?
믿어 주는 건지, 어쩐 건지 모르겠어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상황을 살피는데, 그때 도겸에게서 충격적인 발언이 나왔다.
“네가 임신을 해서 그래.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서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