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36)

<43화>

옷이라는 말에 큰 의미가 있나? 다른 의미가 있나 생각해 보려 했지만, 지끈지끈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으…….”

서원은 작게 신음하며 생각하던 것을 멈췄다. 단순히 속이 안 좋은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속을 게워 내고 눈앞에서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도 아프고 피곤함이 몰려왔다.

이 상태로 데이트를 이어 간다고 해서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낼 수 있을까? 아니, 못할 것 같다. 지환도 저를 집에 보내려고 하는 것 같았고, 뭔가를 먹을 수도 없고, 힘도 없고……. 그냥 좀 누워서 자고 싶었다.

“그만 좀 싸워요……. 머리 아파 죽겠네…….”

서원이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러자 옥신각신하던 도겸과 지환이 대번 조용해졌다.

주변이 조용해지니 울렁거리던 속도, 머리를 쥐어짜듯 아파 오던 두통도 조금 잦아들었다. 서원은 작게 숨을 내뱉고는 지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환아, 내가 보자고 부탁했는데 미안해. 나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다음에 연락할게.”

“너 지금 저 사람한테 부축받아서 집에 가겠다는 거야?”

“응……. 집에 옷을 두고 왔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지…….”

“하…….”

지환이 어이없다는 듯 숨을 터트렸다.

그와는 대화를 많이 나눠 보지 않아 그가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지도 않은 사람이, 그것도 날카로운 인상인 그가 표정을 굳히니 좀 무서웠다.

그가 화를 낼 만한 상황이라는 건 이해했다. 제가 만나 달라고 부탁했는데 갑자기 속을 게워 내질 않나, 다른 알파가 나타나서 페로몬을 뒤집어쓰게 하질 않나. 저라도 어이없고 화날 것이다.

제대로 사과해야겠다 싶어 입을 열려는데, 지환이 서원과 도겸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사이인 줄은 몰랐네. 어쩐지 이상하더라.”

“뭐가……?”

“아냐. 가서 쉬어. 연락하고.”

지환은 방금까지만 해도 정말 화난 사람 같았고, 제가 데려다주겠다고 도겸과 옥신각신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의외로 금방 평소대로 표정을 갈무리하고 한발 물러섰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컨디션이 바닥을 찍고 있는 서원으로서는 다행이었다.

지환에게 할 말이 많았으나, 도겸이 곁에 있으니 일단 오늘은 집에 가고 사과와 상황 설명은 다음에 해야 할 듯했다.

“미안. 꼭 연락할게.”

“가자.”

서원이 미련 넘치는 목소리로 말하는데, 도겸은 더 시간 끌 필요 없다는 듯 서원에게 몸을 밀착해 부축했다.

도대체 저를 얼마나 환자로 보는 건지. 이렇게까지 부축할 필요는 없는데…….

“이, 이렇게까지 부축 안 하셔도 혼자 걸을 수 있어요.”

“해 주면 더 수월하잖아.”

과한 배려에 서원이 거절하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도겸은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에 힘을 주며 억지로 부축했다. 결국 그의 부축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서원과 도겸이 다방을 빠져나오는 동안, 지환은 화장실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 * *

“타.”

도겸이 거리에 주차된 차의 뒷좌석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서원은 그 모습을 조금 황당하게 바라봤다. 분명 걸어서 저를 졸졸 쫓아오는 걸 봤는데……. 언제 운전기사를 시켜 대기시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할 만한 일인가. 차를 타고 가야 할 만큼 먼 거리도 아니었고, 안 그래도 마을에 제가 사채업자에게 쫓기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이목을 끄는 도겸과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차에 타면 불타고 있는 가십거리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지 않나.

그러니 타는 게 꺼려졌지만, 친하진 않아도 몇 번 만나 이야기한 적 있는 기사님이 운전석에 있었다. 차마 무시하고 지나치기가 힘들었다.

서원은 결국 남몰래 한숨을 쉬며 차에 올라탔다. 도겸이 따라 뒷좌석에 앉자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

차에는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지만, 누구도 말을 꺼내는 이 없어 조용했다. 좋은 차라서 소음 하나 없는 게 분위기를 더 불편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지환은 아까 왜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거지? 화난 것과 별개로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던데. 도겸이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연락해서 물어볼 생각이지만, 뭐 때문에 그랬던 건지 마음에 걸렸다.

심란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가만히 서원을 바라보던 도겸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데이트 못 하게 된 게 그렇게 속상해?”

“…….”

데이트를 못 하게 돼서 속상한 게 아니라, 지환을 그렇게 두고 온 게 미안해서인데……. 그리고 도겸에게 증명해 보이겠다고 해 놓고서는 이런 식으로 기회를 놓친 게 아쉽고.

그렇지만 사실대로 말하는 것보다야, 그런 식으로 보이는 게 정말 짝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서 대답하지 않았다.

서원이 입을 꾹 다문 채 창밖만 바라보자, 그가 위로하듯 말했다.

“데이트 같은 건 다음에 해도 되는 거잖아. 아픈데 꾹 참으면서까지 만나야 할 사람이면 안 만나는 게 나아.”

“…….”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면, 아프면 이해해 주고 배려해 줄 것이라는 의미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서원은 어쩐지, 그게 꼭 도겸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렸다.

저는 도겸과 있을 때 행복보다는 아플 때가 더 많았으므로.

마음이 비집고 나오지 않도록 꾹꾹 누르고 감정을 참고 감내했으므로.

그가 사모님이 억지로 만든 선 자리에 나가 오메가를 만날 때에도 차마 나가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없었으므로…….

서원은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것 같았다.

* * *

“윤서원. 일어나, 집 도착했어.”

“으응…….”

집에 도착했건만 윤서원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걸어서 다녀도 될 만큼 가까운 거리였는데, 윤서원은 그새 깊게 잠들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단순히 컨디션이 안 좋은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차에서 자게 내버려 둬도 됐지만, 앉아서 자는 게 편할 리가 없었다. 도겸은 서원의 몸을 흔들어 깨울까 하다가, 그냥 자게 놔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굳이 깨우지 않았다.

대신, 도겸은 소매치기처럼 서원의 주머니를 뒤져 집 열쇠를 꺼냈다. 그러곤 운전 기사에게 문을 열게 시킨 한 다음, 서원을 품에 안아 들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도 서원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희미하게 뭐라고 하는 것 같긴 한데 혀가 고꾸라진 것처럼 제대로 된 말을 하진 못했다.

비몽사몽 한 서원을 침대에 눕히니, 그는 금방 또 잠들었다. 아까는 단순히 상태가 안 좋은 거라고 하더니만…….

침대 밑에 앉아 서원의 얼굴을 들여다보는데, 같이 따라 들어왔던 운전기사가 도겸의 곁을 기웃거리다 물었다.

“더 시키실 일이라도…….”

“나가 봐.”

도겸은 서원이 깨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기사를 집 밖으로 내보냈다.

집주인이 자고 있으니 뭘 할 수도 없어, 도겸은 그저 가만히 서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파트너로 지내며 자는 모습을 숱하게 많이 봐 왔는데도…… 요즘은 서원이 자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파트너 관계였을 땐 서원의 자는 얼굴을 보고 어쩜 그 조빱 같던 애가 이렇게 자랄 수 있었는지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예전의 얼굴이 많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때는 귀엽기만 했고 지금은 예쁘기까지 했으니까. 오메가로 발현해서 그런가 하고 생각하고 넘길 뿐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꼭 놓치고 있었던 것을 되찾은 것처럼 귀하게 느껴져서 계속 쳐다보게 됐다. 서울에 왔던 날에도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깼는데, 제 몸 위에서 잠들어 있는 서원을 보고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다 아침이 되기까지 했다.

……내 거였는데 놓쳐서 그런가.

파트너 관계일 때까지만 해도 서원의 자는 모습을 보는 건 당연한 일상이었는데, 그게 없어진 탓에 허전해서 계속 쳐다보게 되는 건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유도 모른 채 가만히 쳐다보는데, 순간 아까 데이트한다고 데려온 알파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겸은 서원이 저를 속이려고 쇼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가서 본 지환이라는 놈이랑 다방에 앉아서 나눈 대화가, 그리고 대화의 분위기가……. 평범한 사이는 아님을 보여 주고 있었다.

왜 좋아하냐고 물었지. 잘생겼고, 스타일이 좋고, 잘 챙겨 주고, 아닌 척하면서 잘해 주고. 사람 기대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좋아하는 이유를 털어놓는 윤서원의 목소리에는 거짓이 없었으나, 조금 걸리는 게 있었다.

윤서원이 그런 스타일을 좋아했던가?

도겸이 보기에 그 알파 놈은 양아치 같은 새끼였다. 겉보기에 썩 좋은 인상이 아닌데, 도대체 어떤 면에서 그 녀석이 잘생겼고 스타일이 좋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겸은 그 알파 놈의 외모와 옷 입던 스타일을 떠올리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봤다. 흰색 셔츠에 너무 달라붙지 않는 검은색의 단정한 바지. 그 알파 놈이 리넨 재질의 남방에 찢어진 청바지, 거기에 샌들을 신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면 정반대였다.

“……내가 너무 나이 들어 보이게 입나.”

근래 서원이 제게 계속 다섯 살 차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일 때문에 단정한 정장 스타일로 입을 때가 많기는 했다. 굳이 일이 없을 때도 제 취향이 화려하기보다는 단정한 것이기 때문에 차림을 가볍게 할 뿐 스타일 변화는 크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노숙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제 스타일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하, 아니. 근데 내가 이걸 왜 고민하는 거지? 눈에 들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것도 아니고.

도겸은 갑자기 짜증이 확 몰려와, 서원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고 있자니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게 되네.

도겸은 숨을 크게 내뱉으며 다른 생각을 하려 부단히 애썼다. 그리고 이내, 서원이 일어났을 때 먹일 약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 처방 받은 게 있을 것 같은데.”

약국에서 약을 사 오고 싶었지만, 병명을 몰랐다.

배 비서에게 서원의 병명을 알아내라고 시켰지만, 진료 기록을 알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의료법이고 뭐고 상관없으니 돈을 먹이든 어쩌든 해서 알아내라고 했건만, 하필 서원이 갔던 산부인과는 오메가의 인권을 중요시하는 병원이라 그런 건 절대로 발설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씨발, 병원도 돈 벌려고 하는 짓이면서. 내가 병원 기록으로 뭘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안 알려 주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저렇게 속을 게워 내고 힘들어하는데 단순한 감기일 리가 없고…… 뭔가 제게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집에 약이 있겠지.

도겸은 서원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집을 둘러보며 약을 찾았다. 그렇지만 보통 약을 둘 것 같은 식탁에도 약이 없었고, 주방을 다 뒤져 봐도 없었다.

“설마 나 온다고 꽁꽁 숨겨 놓은 건가?”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했지만, 서원이 꽁꽁 비밀로 부쳐 두니 심각한 병인 건가 하는 생각까지 다다랐다.

거기까지 생각하게 되니 모른 채로 넘어갈 순 없겠다 싶어졌다. 집안을 샅샅이 뒤지다 서원이 업무를 보던 컴퓨터 앞으로 가는데, 책상에 서랍이 있는 게 보였다.

매번 올 때마다 서원은 컴퓨터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본 적도 없는 서랍이었다. 설마 약을 이런 곳에 뒀을까 싶었지만, 고의로 숨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그곳까지 열어보게 됐다.

무감한 얼굴로 서랍을 뒤적이는데, 문득 분홍색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팜플렛 같아서 넘기려고 했지만, 표지에 써 있는 글자에 도겸은 순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임신 오메가 수첩?”

임신 오메가 수첩이라니……

윤서원이 왜 이런 걸 가지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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