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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41/136)

<41화>

도겸은 화가 난 사람처럼 험악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데이트? 또 그 짓이야? 분명히 말했을 텐데. 눈앞에 데려오기 전까지는 못 믿는다고.”

“이번엔 진짜입니다. 그렇게 의심되시면 저번처럼 쫓아오시든지요.”

“……쫓아오라고?”

도겸은 이번에도 당연히 쇼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지, 쫓아와도 된다는 말에 움찔 몸을 떨었다. 짙은 눈썹이 씰룩하고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서원이 그래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 당황한 듯 가만히 있던 그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는 데이트에 방해되니 어쩌니 하더니만……. 무슨 생각인 건데?”

“그렇게 말해도 따라오실 거 아니까요. 그리고 매번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못 믿는다고 하시니 저도 이 방법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고요.”

“…….”

“제발 두 눈으로 보시고 저 좀 찾아오지 마세요.”

무슨 생각이기는.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러니까 찾아오지 좀 마. 그 말이었다.

* * *

“이런 부탁을 하다니.”

“……미안.”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서원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서원이 도겸에게 보란 듯이 떵떵 소리치고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슬기의 오빠. 프로게이머 이지환이었다.

처음에는 그에게 이런 부탁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이 시골에서 만나기 힘든 동갑내기 친구니까 조금 친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니, 그는 서울에서 왔다고 했고 저와 동갑인 알파였다. 키도 크고 외모도 나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지환이야말로 서도겸을 속일 상대로 딱 적합한 사람이지 않나.

그래서 처음 그를 만난 날 무리하게 부탁을 했다. 좀 더 친해진 다음 부탁하면 좋았겠지만, 그는 가끔씩만 시골에 내려오는 사람이었다. 또 언제 이 마을에 올지 모르니, 있을 때 부탁하는 게 좋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이유 말이야……. 저번에 다니던 회사에서 상사한테 고백했다가 차였거든.’

‘뭐? 그런 이유로 시골까지 내려왔다고?’

‘마음은 안 받아주는데 회사에 자꾸 복귀하라고 하더라고. 불편해서……. 잠시 내려왔는데 여기까지 쫓아오셔서.’

‘그렇게 일을 대신할 사람이 없나?’

‘그런가 봐. 아무튼 이 마을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서울로 다시 돌아갈 일 없다고 둘러댔거든. 근데 눈으로 봐야 믿어 주겠다고 해서……. 혹시 연기를…… 해 줄 수 있나 하고.’

서원은 그날, 미친 셈 치고 반쯤 거짓말을 섞어 지환에게 무리하게 부탁했다. 임신했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그래, 좋아.’

‘저, 정말? 진짜로 도와줄 거야?’

‘돈 필요하거나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할 것 하나 없는 시골이라 심심하던 참이었는데 잘됐지.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다행히 그는 흔쾌히 부탁을 받아들였다. 먼저 무얼 해야 하냐고 물을 정도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허락을 구하고 말을 맞추긴 했지만, 평범하지 않은 부탁인 건 맞아서 미안했다. 서원이 부탁할 당시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트리자, 지환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나야 주말에 할 일도 없고 심심하면 놀자고 부를 생각이었으니까 상관없는데……. 그래서 네 짝사랑 상대였다는 전 직장 상사라는 사람이 저 사람이야?”

지환이 한쪽을 슬쩍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서원이 그쪽 방향으로 조심스레 시선을 옮기자, 도겸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따라오라고 해서 그런지, 아예 존재 자체를 숨기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대놓고 지켜보라는 얘기는 아니었는데……. 부담스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지환은 답도 없는 것을 봤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와……. 사람을 찼다면서 왜 저렇게 쫓아다닌대? 너 개빡치겠다.”

“빠, 빡치는 건 아니고…….”

“야, 넌 스토킹 당하는데 빡치지도 않아? 네가 저 사람한테 어떻게 굴었는지 훤히 보인다. 네가 그러니까 저 사람이 미련 못 버리고 졸졸 쫓아다니는 거야.”

“…….”

그런 거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틀린 말이 아니라 부정할 수가 없었다.

확실하게 선 긋겠다고 마음만 먹었지, 미적미적 굴다가 며칠 전에는 그의 품에서 잠들기까지 했다. 듣고 나니 도겸이 끈질기게 저를 쫓아오는 것도 제 탓인 것 같았다.

잠시 반성하던 서원은 퍼뜩 이상함을 느끼고 이성을 되찾았다. 아니, 근데 이건 쫓아오는 사람이 잘못한 거잖아?

항의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데, 지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 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알파라는 작자들은 제가 제일 우월한 줄 알아. 오메가랑 사귀고 사랑을 나누면서도 그런다고.”

“……근데 너도 알파잖아?”

가만히 듣는데 뭔가 이상했다. 알파 중에 알파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이 많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지환은 자신도 알파면서 알파를 욕하고 있었다. 보통은 안 그러지 않나?

서원이 이상하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며 묻자,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그런 놈들이랑은 좀 다르지.”

“뭐가 다른데?”

“난 좀 젠틀하지.”

“뭐……?”

젠틀? 내가 아는 영어 gentle을 말하는 거 맞나?

낯선 관계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준다는 점에서 성격이 나쁘진 않긴 했다. 그렇지만 딱히 그와 어울리는 말도 아니었다.

서원이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자, 지환이 멋쩍은 듯 눈을 굴리며 말했다.

“농담인데 너무 반응이 없다. 애인인 척해 달라면서 너도 좀 노력하지 그래?”

“……으응.”

“하, 근데 여기서 무슨 데이트를 하냐? 저기 다방이라도 갈까?”

“그래……. 그러자.”

20대 커플이 데이트할 만한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다방이라도 가기로 했다. 바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다니기에는 힘들고 덥기도 했으니까.

서원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지환이 가리킨 다방으로 이동했다.

* * *

“으, 커피 너무 달다.”

다방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지환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치 못 먹을 것을 먹었다는 반응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꽤 볼만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서원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

“넌 먹을 만해?”

“나는 뭐…….”

서원이 테이블 위에 있는 커피잔을 내려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서원이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하자, 지환은 이상하다는 듯 서원의 앞에 놓인 커피를 보더니 갸우뚱거렸다.

“하나도 안 마셨네? 왜 안 마셔? 너 커피 싫어해?”

“시, 싫어하는 건 아닌데…….”

당연하겠지만, 다방에는 디카페인이 없었다.

지환이 다방에 가자고 할 때 일단 가서 커피 대신 다른 메뉴를 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다방 아주머니가 메뉴 따로 만들기 귀찮다며 대충 커피로 메뉴를 통일해 버렸다. 다방 아주머니랑 대화도 몇 번 나눠 본 적 없는데 친한 척하며 그랬다. 순 제멋대로였다.

이런 식으로 장사해도 되나? 동네 장사인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저보다 어른에게는 따질 수 있는 성격이 되지를 못해서 그냥 커피를 받아오고 말았다.

아무튼, 지환은 커피에 입도 안 대는 이유가 궁금한 듯했다. 그가 원래 제 식성을 아는 것도 아니니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둘러대도 됐으나, 도겸이 다방까지 따라 들어와서 감시하는 탓에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거리도 가깝고, 다방에 저희 말고 손님이 없어 다 들릴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임신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제가 단 걸 좋아하는 걸 도겸이 훤히 아는데 단 게 싫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고…….

서원이 난처한 얼굴로 커피를 내려다보고만 있자, 지환은 굳이 이유를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쯧, 괜히 다방 왔다. 다른 곳 갈걸.”

“아니야. 어차피 갈 곳도 없었고, 앉아 있기 편하고 좋아.”

“아쉬운 대로 뭐라도 먹을래? 여기 떡이랑 고구마, 밤, 뻥튀기……. 빵도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로 안 먹어도 돼. 배고픈 것도 아니고…….”

“기다려. 빵 가져올 테니까.”

서원이 한사코 괜찮다고 말했으나, 지환은 가만히 둘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다방 아주머니에게로 향했다.

메뉴를 두 개 만드는 것도 귀찮다고 한 아주머니라 맛있는 걸 줄 것 같지도 않은데. 아까 슬쩍 봤을 때 맛있어 보이는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번 주 들어서 특히 입맛이 좋지 않아졌다. 며칠 전에 과외할 때 받았던 설탕 뿌린 토마토도 겨우 먹었을 정도로.

그렇지만 지환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빵 하나를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이거라도 먹으래. 젊은 애들은 이거 좋아한다고.”

“……가져다줘서 고마워.”

서원이 지환을 바라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서원은 그가 가져온 포크를 들고 빵을 살짝 뜯어 입에 넣었다. 보기에도 그리 맛있어 보이지 않았는데, 진짜였다. 꼭 바깥에 오래 꺼내 놓은 것처럼 퍼석퍼석하고, 그냥 밀가루를 뭉쳐 놓은 것처럼 맛이 없었다.

근래 더워서 그런가 유별나게 입맛이 없어지기도 했지만, 아이가 들어선 이후로는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엄청나게 심해졌다. 그래서 도저히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지환이 저를 배려해 가져온 것이라 차마 안 먹을 수가 없었다.

깨작깨작 뜯어먹고 있으니 지환은 흡족한 얼굴을 했다. 그는 입꼬리를 방긋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넌 내 어떤 점이 좋아?”

“푸, 읍……. 뭐?”

이게 무슨 소리? 너무 당황해서 먹던 빵도 뱉어 버릴 뻔했다.

서원이 뭔 생뚱맞은 소리냐며 눈썹을 찡그리며 묻자, 지환이 능청 떨며 다시 말했다.

“나 좋아한다며. 나한테 호감이 생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

다시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저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뭐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도겸의 자리에까지 저희의 대화가 들리니까 일부러 저런 말을 꺼낸 것 같았다.

아니, 그래도 이건 좀 곤란한데. 난처해진 서원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능숙하게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예 감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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