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36)

<38화>

서원은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딱 삼십 분이다. 계속 언쟁을 나누며 시간을 끄는 것보다 잠깐 누워 있어 주고 돌아가게 하는 게 낫지 않나…….

결국 아무리 밀어내려고 고민하고 아등바등해도, 도겸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속수무책으로 휘말리게 된다.

다년간 그와 함께 지내면서 서로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점에서 조금 여려지는지와 같은 걸 잘 알았다.

어쩌면 도겸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약한 척을 하면 제가 들어주리라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가 그의 부탁을 안 들어주는 일은 불가능이 아니고서야 없었으니까.

뛰어난 두뇌를 가진 덕분에 세세한 일도 잘 기억하고 사업가 기질이 있어서 기회를 넘보는 것 또한 잘하는 사람이었다. 제게 하는 행위들 또한 그 계산 아래에서 나온 행동들이라고 생각하면 기분 나빠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알겠으니까……, 누워요.”

밀어내지 못하는 내가 호구고 병신이지.

서원이 반쯤 체념한 목소리로 말하자, 도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곤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도겸이 내어준 아파트와 달리, 이곳은 엄마가 가구를 사고 인테리어를 해 줬다 보니 침대가 싱글 사이즈였다. 도겸이 누우니 침대가 가득 차서 제가 누울 공간은 없어 보였다.

“저는 못 누울 것 같은데요…….”

“내 위로 올라오면 되잖아.”

“네?”

도겸의 말에 서원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옆에 누울 자리가 없으니 제 몸 위에 누우라니. 생각하는 범위가 남들과 같지 않다는 점은 창의적이라고 칭찬해 주고 싶었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아, 안 건드린다고 하셨잖아요?”

“불가피한 상황이잖아. 그리고 안 건드리겠다는 건 키스랑 섹스 같은 건 안 하겠다는 거지.”

“…….”

그의 위로 올라가면 포옹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그건 쏙 빼놓고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포옹은 진한 스킨십의 범주에 들어가지도 않는다는 건가?

“안 누워?”

도겸은 이런 걸 과민하게 느끼는 제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몸 위에 눕는 게 뭐 어떻냐는 표정이다.

“알겠어요…….”

아무렴, 성적인 의도만 아니면 되겠지. 별것 아니고 딱 삼십 분만 버티면 되니까…….

서원이 조심조심 도겸의 몸 위에 제 몸을 겹쳐 누웠다.

그가 시키는 대로 가슴을 맞대고 눕자 도겸이 자연스럽게 허리를 안았다. 만지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싶지만, 그가 저를 안지 않으면 아래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르니 치우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나저나 도겸은 우성 알파고 저는 열성 오메가여서 그런지, 몸을 맞대고 누우니 새삼스럽게 체구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겹쳐져 있는 다리도 그의 것이 훨씬 더 길고……. 제 얼굴이 그의 가슴팍에 위치해서 그런지 얼굴도 너무 가까웠다.

얼른 재우고 보내야겠다 싶은데, 한편으로는 이런 상태로 잘 수는 있나 하는 근본적인 의구심이 들었다.

“무거워서 못 자지 않을까요?”

“살이나 찌우고 그런 얘기를 하든가.”

서원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도겸은 코웃음을 치듯 가볍게 대꾸했다. 네가 누워 봐야 무겁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아무리 살집이 없는 편이라고 해도 성인 남성이니 그 정도는 아닐 텐데. 어째 빈정거리는 것 같아서 서원은 딱히 대꾸하지 않고 그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 체중을 온전히 실었다.

가슴팍에 귀를 대니 심장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그의 위에 올라와 있느라 한껏 긴장한 제 심장 소리보다 더 빠른 것 같았다.

어디선가 잠을 못 자면 심장박동이 빨라진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몸 상태가 안 좋다더니, 진짜 안 좋은가 보다.

심장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어색해서 도겸의 몸 위에서 자세를 고치려 했다. 그때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도겸은 그게 퍽 신경에 거슬리는지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서원을 다그쳤다.

“꼼지락거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네.”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에도 힘이 발끈 들어가면서 어떻게 자세를 고칠 수가 없었다. 서원은 결국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편히 누울 수밖에 없었다.

도겸의 체구가 워낙 큰 탓인지 그의 몸 위에 누워 있는 것은 생각보다 안정적인 느낌을 줬다.

당연히 불편할 줄 알았는데, 과할 만큼 도겸에게 신경이 쏠리는 것 외에는 편하기까지 했다. 사람의 체온이 따끈하기도 하고.

도겸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일까. 진짜로 제가 그의 몸 위에 누워 있는데도 점점 숨소리가 자연스러워지고 잠잠해졌다. 그의 낯빛을 어둑하게 가라앉히던 근심 또한 서서히 사라져 나갔다.

진짜 이런다고 효과가 있는 건가? 서원이 힐끗힐끗 도겸의 얼굴을 훔쳐보는데, 눈을 잠잠히 감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오던 잠도 다 도망가겠다.”

“아, 안 쳐다봤거든요.”

서원은 황급히 시선을 내리며 시치미를 뗐다. 눈 감고 있었으면서 쳐다보고 있던 건 어떻게 알았대? 이마에 눈이라도 달렸나…….

위에서 들리는 바람과 비슷한 웃음소리와 기대고 있는 몸이 들썩이는 것이 거짓말임을 다 알고 있다고 대꾸라도 하는 듯했다.

뭐라고 더 따질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한 숨소리가 들렸다. 가슴팍은 일정한 주기로 오르락내리락했고, 과하게 뛰던 심장 소리도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이번에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조심 시선을 위로 올렸다. 곤히 잠든 도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 잘 못 잔다면서.”

서원이 그를 보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십 분도 되지 않았는데 잠든 도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잠을 설쳤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최근 그의 상태가 이상해 보이긴 해서 거짓말 같진 않았다.

그나저나, 도대체 뭐가 문제지? 진짜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조금 걱정 어린 표정으로 도겸을 바라보던 서원은 몰래 아래로 내려가고 싶었으나, 허리를 두르고 있는 도겸의 팔에 은근히 힘이 들어가 있는 탓에 그럴 수도 없게 됐다.

어차피 삼십 분이라고 했으니까, 가만히 있자. 괜히 움직이다가 도겸을 깨울 수도 있고, 그와 함께 있으면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도 하니까.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사진 지우라고 하는 거 잊었다. 깨면 지워 달라고 해야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이어 가는데 쩍쩍 하품이 나왔다. 졸음은 옮는다더니 진짜인 걸까. 나란히 누워 잠든 도겸을 보고 있자니 조금씩 졸음이 몰려왔다.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계속 잤었으니 잠이 안 올 법도 한데, 도겸의 기분 좋은 알파 페로몬이 방 안을 채우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 탓인 것 같았다.

서원은 가물거리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눈을 감았다. 어차피 삼십 분 동안은 꼼짝도 하지 못할 것 같으니 저도 잠깐 눈 좀 붙이자. 이 자세로는 오래 자지도 못할 테니까.

안일한 생각이었으나 수면은 너무나도 달콤했고, 서원은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 * *

“서원아.”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목소리. 워낙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감정이 딱딱한 사람이라서 건조한 목소리를 듣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목소리에 묘한 기분 좋음이 실려 있었다.

그래서 더 듣기 좋았다. 도겸이 저를 저리 달콤하게, 기분 좋게 부를 리가 없으니 꿈인 게 분명했다. 제 욕심이 넘쳐흘러서 꿈에도 나타날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깨고 싶지 않은 기분 좋은 꿈이었다. 서원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따듯함 속으로 더 파고들려고 할 때였다.

“안 일어날 거야? 아침인데.”

“음, 아침……?”

꿈인데, 왜 진짜처럼 아침을 찾는 거지. 기분 나쁘게…….

그때 갑자기 밤에 있었던 일이 해일 밀려오듯 번쩍 떠올랐다. 느지막한 시간에 도겸이 저를 찾아왔고 30분만 자고 싶다고, 침대에 함께 누워 있었던 일이.

“헉……!”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눈이 번쩍 뜨였다. 창밖으로는 맑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제 아래에는…….

“엄청 잘 자더라.”

도겸이 여전히 저를 끌어안고 있었다.

도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서원은 버둥거리며 도겸의 품에서 벗어났다. 도겸은 서원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다가도, 일어나려고 하니 손을 금방 풀어줬다.

부랴부랴 바닥을 딛고 일어난 서원은 평온하게 몸을 일으키는 도겸을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럴 수가. 진짜로 같이 자다니.

몸을 겹치지 않았고 별다른 일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자신의 안일함에 충격을 받았다.

방 안에는 어제 산부인과에서 받아온 임신 오메가 수첩도 있었다. 안에는 무려 초음파 사진까지 들어 있었다. 다행히 서랍 안에 넣어뒀고, 일어났을 때 도겸이 어제의 자세 그대로 누워 있던 것을 보아 그걸 보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자세로 자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일어났을 법한 일이었다. 서원은 아무튼 그런 자세로 푹 잤던 게 자신에게도, 그리고 도겸에게도 어처구니가 없어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니, 30분만 자기로 했는데, 왜 안 깨우셨어요?”

“네가 안 일어나 주니까 밀고 일어날 수가 없잖아.”

“깨웠어야죠. 밀어냈어야죠!”

“나도 아침에 일어났어.”

도겸은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서원은 가자미눈을 뜬 채 그를 바라봤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치고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이는데…….

그는 페로몬 체증으로 고생하기 전에도 수면 시간이 짧은 편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열한 시쯤에 잠들어서 지금이 여덟 시니까……. 그가 아홉 시간이나 잤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그래도 간만에 상쾌한 낯을 하는 걸 보면 잠을 깊게 잔 건 맞는 것 같은데. 서원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도겸을 바라보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났니?”

엄마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서원은 그녀를 보자마자 죄짓다가 들킨 사람처럼 마음이 따끔했다.

어제 엄마에게는 도겸을 돌려보내게 할 생각이라고, 임신한 건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놓고서는, 정작 저는 너무나도 쉽게 그를 받아들여 버리지 않았나.

게다가 임신한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모른다고 둘러댔으면서, 부모님의 집에서 알파와 하룻밤을 보냈다니. 성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이상하게 보일 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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