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36)

<37화>

도겸의 말에 서원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여태까지 몇 년 동안 페로몬 파트너를 한 건 뭐야. 지금까지도 다시 파트너로 돌아오라고 매주 찾아오면서…….

그렇게 따지고 싶은 것이 울컥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그렇지만 엄마 앞이었다. 엄마는 제가 그간 도겸의 페로몬 파트너 일을 했다고는 꿈에도 모르니까 그렇게 따질 수가 없었다.

울컥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삼키는데, 지희는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앞서서는 호기롭게 말했지만, 사실은 서원처럼 그다지 말주변이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강경한 성격도 아니었고.

이번에는 어떤 이유를 들먹거리며 반대할지 말을 고르는 사이, 도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원이가 갑자기 일을 그만둬서 곤란한 문제들이 있는데, 시간이 오늘밖에 맞지를 않아서요.”

페로몬 이야기라면 이해하겠지만, 도겸은 마치 서원이 인수인계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업무에 차질이 생긴 사람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발끈하는 말이 나오려 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단순히 제가 그의 밑에서 일한다고만 알고 있으니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 일찍 끝나면 저도 돌아가겠습니다. 저도 굳이 자고 갈 생각인 게 아니라, 시간이 여의치 않을까 봐 여쭤본 것입니다.”

“아…….”

이 남자가 일찍 돌아갈 리가 없는데……. 서원은 답답하기 그지없었으나, 설득에 엄마는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공사다망한 사람이라는 건 지나가던 초등학생도 알 정도다. 업무차 찾아온 거라고 하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실상은 전혀 그게 아닌데.

서원이 답답함과 억울함에 입을 뻐끔거렸다. 그녀는 서원의 눈치를 보듯 힐끗거리다, 한숨 같은 숨을 작게 내뱉곤 입을 열었다.

“회사 일이라니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고 가는 건 좀 곤란해요. 최대한 빠르게 일 끝내고 돌아가 주세요.”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엄마가 나서서도 도겸이 집에 쳐들어오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나마 자고 가는 것은 안 된다고 못 박아 다행이었다.

예의 바르게 서원의 엄마에게 인사한 도겸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서원을 보며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네 방으로 가자.”

“…….”

도겸은 네 방이 어디인지 모르겠으니 안내하라는 듯 눈짓을 줬다.

이래도 되는 걸까……. 방까지 들어오는 걸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집까지 들어온 데다가 엄마 핑계도 댈 수 없고 말릴 수가 없었다.

자고 가지는 않겠다고 하니까 괜찮겠지……? 서원은 침을 꼴깍 삼키며 도겸을 올려다봤다.

* * *

“도, 돌아다니지 마시고 거기 앉으세요.”

방에 들어서자마자, 도겸은 좁은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을 눈에 담았다. 별거 볼 것도 없는데도 뭐가 있는지 하나하나 눈에 담으려고 하는 것처럼 바삐 구경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제가 이사 간 시골집에 처음 들어올 때에도 구경하느라 바빴다. 그때는 다 구경하고서 ‘부동산 사기라도 당한 거야?’하고 묻기에 집이 난장판이라 이곳저곳 둘러보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원래 남의 집에 관심이 많은 스타일인 모양이었다.

다행히 엄마가 정리해 두고 있던 방이고, 와서는 잠만 잤기 때문에 지저분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집만큼 넓고 좋지는 않으니 비교될 것 같았다.

서원이 민망함에 그만 보라고 에둘러 말했으나, 도겸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음을 흘리며 원목 책상 위에 있던 액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사진 뭐야?”

도겸이 집어 든 것은 서원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의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였다.

액자 속의 사진에는 어린 서원이 학교의 교단 앞에서 화사한 노란색 옷을 입고, 풍성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는 뻣뻣해지는 서원이었으나, 이날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서원은 사진 속 제 모습이 너무 바보 같이 웃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엄마는 그 사진을 가장 좋아했다.

서원은 사춘기의 아이처럼 민망함 반, 멋쩍음 반으로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사진인데, 엄마가 가져다 놓은 거예요.”

“센스가 좋으시네.”

“…….”

센스가 좋다니……. 아무래도 놀리는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을 바라보는 도겸의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가는 것이 웃긴 것을 보고 참는 모습처럼 보였다.

뭐가 저렇게 웃긴 거지? 저 나이일 때 실제로도 숱하게 많이 봤으면서, 왜 저렇게 처음 보는 것처럼 유심히 들여다보는지 모르겠다.

도겸에게 그만 보라고 해 봐야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수치스러워서 서원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생각을 비우려 노력했다. 그때였다.

찰칵.

“응?”

서원이 미처 생각을 비우기도 전에 어디선가 핸드폰에서 나는 카메라 셔터음이 들렸다.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리니 도겸이 핸드폰으로 액자를 찍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저런 짓을? 이해할 수 없는 도겸의 행보에 서원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 그걸 갑자기 왜 찍어요?”

“응? 귀여워서.”

“귀엽기는 무슨, 제 사진이잖아요! 그렇게 막 찍으면 어떡해요?”

“찍으면 안 돼?”

도겸은 남의 사진을 멋대로 찍어 놓고서는 안 되는 거였냐며 눈을 깜빡였다.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이었다. 황당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연히 안 되죠.”

“그럼 지워 주는 대신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아니, 당연히 지워 줘야 하는 건데…….”

당연히 해 줘야 하는 것을 인질로 잡고 뭔가를 요구하려는 모양새였다.

물어보지 말고 그냥 지우라고 가자미눈을 뜨고 눈짓을 줬으나, 도겸은 모르는 척했다. 진짜 모르는 건지 어쩐 건지 뻔뻔한 낯짝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 전까지는 지워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서원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억울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진짜……, 또 뭔 짓을 하려고.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꾹 참았다.

“뭔데요?”

“감기 걸렸다는 거, 뭐야?”

도겸은 좀 전에 서원의 엄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금 화두에 올렸다.

방에 들어오고 딴짓을 하기에 그냥 넘어가나 했는데…….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서원은 은근슬쩍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데? 병원도 갔다면서.”

“그냥, 도련님이랑 비슷한 거죠. 뭐……. 요즘 좀 피곤하고 힘든데, 딱히 뭐라고 진단 내릴 건 없나 봐요. 감기랑 증상이 비슷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 엄마가 추측하는 거고요.”

어차피 산부인과에 갔다는 건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구태여 감기라고 우기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둘러대는 게 나을 듯했다.

서원의 대답에 도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윽고 뭘 생각했는지 심각하다 싶을 정도로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힌 얼굴이 됐다.

“넌 나처럼 페로몬 체증도 아닐 텐데, 다른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병원 잡아 줄까? 아예 종합적으로 다 검사를 받아보는 건 어때?”

“됐어요. 저 말고 도련님이나 병원 좀 가세요. 들어보니까 단순히 페로몬 체증의 문제가 아닌 것 같던데.”

“그건 너만 있으면 다 해결될 일이야.”

도겸은 제 문제는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단언했다. 그렇게 고생했다면서 왜 저러나 모를 정도의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걸 어떻게 도련님이 단언해요? 약도, 다른 파트너도 효과가 없었다면서요.”

“주말에 너랑 있으니까 확실히 두통도 덜해졌어. 그러니까 너랑 잠이라도 같이 자면 나아지겠지.”

“…….”

나랑 있으면 나아졌다고? 막무가내로 집을 찾아오는 게 저를 설득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그런 이유만 있는 것도 아니었나?

배 비서도 없이 혼자 내려왔을 때 왜 그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를 억누르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건가 싶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를 넘기던 그의 행동도 조금 이해가 되는 듯했다.

그런데 왜 하필 저랑 있으면 괜찮아지는 걸까? 꼭 그래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오직 한 사람에게만 반응한다는 점에서 각인이라는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서원은 도겸이 없어도 멀쩡했다. 저는 열성이니 우성인 그보다 반응이 덜한 거라고 해도 아무튼 생활에 불편감을 줄 만큼 영향을 주는 건 없었다.

보통 각인은 쌍방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고, 아주 흔치 않게 일방 각인이라는 저주 같은 일이 생기곤 하지만……. 그런 건 아닐 게 분명했다.

일방 각인은 사랑을 전제로 하는 데다가, 제가 도겸을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해 왔어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제가 그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그가 저를 좋아할 리가 없으니, 그런 일은 없을 거였다.

그럼 뭐지? 진짜 심각한 문제 같아서 미간을 좁히는데, 도겸이 그런 서원을 보다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병원 때문에 서울에 내려온 거 아니었어?”

“네? 아, 아니요……. 엄마랑 할 이야기도 있고 해서 잠깐 내려온 거예요. 이사하고 달에 몇 번은 내려오기로 해서…….”

병원 때문에 서울에 내려온 것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서원은 허겁지겁 그런 게 아니라고 주절주절 변명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물음이라 대답이 깔끔하게 나오질 않았다. 어색한 대답에 오히려 더 의심을 사지 않았을까? 서원은 힐끗 도겸의 눈치를 보다, 목을 가다듬고 지금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아, 아무튼…… 자고 갈 것도 아니라고 했으니까,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세요. 어차피 다음 주에 또 찾아오실 거면서 불편하게 버틸 필요 없잖아요.”

“허락도 받았는데 벌써 돌아가라고? 나 집에 발 들인 지 삼십 분도 안 된 것 같은데?”

“진짜 업무 이야기를 할 것도 아니잖아요.”

“네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잖아.”

“…….”

“지금으로부터 딱 삼십 분만 도와줘. 그럼 오늘은 더 말 않고 돌아갈게.”

“또 뭘…….”

“잠만 같이 자자고 했잖아. 삼십 분이라도 자고 싶어서 그래.”

삼십 분이라도 자고 싶다니……. 도대체 평소에는 얼마나 조금 자는 거지?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상태가 꽤 심각한 듯했다.

서원은 불면증을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어디에선가 불면증이 굉장히 괴롭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피곤한데 잠은 못 자고 정신력을 갉아먹는 그런 상태라고.

이번에 그의 요구를 받아준다면 이러한 요구를 또 해 올지도 모른다고.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런데…… 여전히 그를 좋아하고, 또 그가 아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졌다.

“하…….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그냥 누워만 있으면 돼. 나는 안 건드리고 옆에서 자기만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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