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잠이요? 잠을 못 주무시는 거예요?”
도겸에게 불면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몸을 겹친 횟수만큼이나 그와 함께 잠을 청한 밤도 많았다. 누구보다 시간이 금 같고 바쁜 사람이기에 수면 시간이 긴 편은 아니었지만, 불면증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당장 일 그만두기 전에도 잘 자는 모습을 줄곧 봤는데…….
서원이 이상함을 느끼며 묻자, 도겸이 미간을 왈칵 좁히며 투정 부리듯 대답했다.
“나 아프다고 그랬잖아. 네가 그렇게 일 그만두고서 잠 한 번도 편히 잔 적 없어.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머리도 아프다고.”
“…….”
그러고 보면 저번에 파트너를 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어지럽다며 제게 몸을 기댈 때도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감 넘치고 번지르르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눈에 띄게 얼굴이 날렵해지고 피곤해 보이니 아프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병원을 가도, 약을 먹어도 해소가 안 되는 정도라면 저를 만나거나 다른 오메가를 안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처럼 보이진 않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도겸이 단순히 저를 고집하는 이유가 편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서원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페로몬 문제인 것 같은데, 병원은 안 가 보셨어요? 진통제나 수면제는요?”
“그게 통했으면 널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물음에 도겸이 고개를 힘없이 저었다. 그런 건 이미 진즉에 다 해 봤다는 반응이다.
통했더라면 저를 안 찾아왔을 거라는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콕콕 찔렀지만, 그가 굳이 저를 찾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기에 금방 괜찮아졌다.
그나저나 정말 그의 말대로라면 정말 큰 일인 것 같은데. 그의 재력이면 실력 있는 의사들도 충분히 만나봤을 거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됐다는 거니까…….
몸을 겹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같이 잠만 자자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시도해 볼 수 있지 않나 싶었지만, 서원은 휘휘 고개를 저으며 걱정을 떨쳐냈다.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 여지를 주는 것도 안 됐고, 더군다나 이곳은 부모님의 집이었다. 아무리 그가 애처롭게 굴어도 같이 잘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그, 그래도 안 돼요. 여기는 가족이랑 같이 사는 집이고…… 집에 엄마도 있는걸요.”
“어머니는 내가 설득할게. 그럼 됐지?”
“아니……. 그게 설득한다고 되는 일이, 자, 잠깐. 어딜 들어가요……!”
서원이 설득해도 안 될 거라고 말하려 했지만, 도겸은 자연스럽게 서원을 지나쳐 대문 너머로 들어가 버렸다.
긴 다리만큼이나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음도 빨랐다. 당황한 서원이 다급히 그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 * *
“안녕하세요, 어머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느새 식탁 앉은 도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지희를 마주했다.
도겸이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지낸 사람이지만, 그도 나름 사회인이긴 했다. 그러니 가끔은 이런 식으로 싹싹하게 굴 때가 있다는 건 알고 있는데, 서원은 그런 그를 볼 때마다 가면을 쓴 것처럼 보였다.
싹싹한 사람처럼 연기를 못 한다는 게 아니었다. 처음 그를 보는 사람이라면 혹하고 속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그렇지만 원래 그의 성격을 알기에 제게만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것 같았다.
도겸은 깍듯하게 지희에게 인사하더니, 조금 난처하다는 듯 눈썹을 팔 자로 늘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늦은 시간에 빈손으로 와서 죄송합니다.”
“아, 아뇨……. 그런데 이 시간에 도련님이 어쩐 일로……?”
“업무 관련해서 물어볼 것도 있고, 할 얘기도 있고 해서 왔습니다. 일찍 왔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시간이 이럴 때밖에 되지를 않아서요.”
“워낙 바쁘시니까요. 요즘 뉴스에 종종 나오던데……. 하하…….”
요즘이 아니라, 뉴스에 안 나오는 날이 적을 정도로 회사가 크고 계열사도 많았다. 굳이 나쁜 소식이 아니라 좋은 소식도 종종 나오곤 했으니까.
지희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자, 도겸은 감사하다는 듯 웃더니 빠르게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부족한데, 혹시 오늘 하루만 자고 가도 될지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네? 자고 가신다고요? 아니, 이렇게 갑자기요? 집을 하나도 정리하지 않았는데…….”
“사람 사는 집 같고 좋은걸요.”
도겸은 좋은 호텔에 가도 깐깐한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만하면 충분히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기야 남의 집에, 그것도 부모님과 나이대가 비슷할 상대를 두고 집 꼴이 이게 뭐냐느니 하며 막말을 할 수 있는 사람도 몇 안 될 것이다.
도겸이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반응하자, 지희는 당황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꼭 그런 이유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서원이가 몸 상태도 별로 안 좋은데,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심이…….”
“몸 상태요? 어디가…….”
“어, 엄마!”
도겸이 물어보려 하는 기세이기에, 가만히 있던 서원이 다급히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버럭 언성을 높인 서원은 침을 꼴깍이며 도겸의 눈치를 봤다. 그는 갑자기 끊긴 대화에 수상쩍은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이제는 확신이 들었다. 도겸은 제가 임신했다는 사실까지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안다면 이런 식으로 행동할 리가 없었다.
서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희의 팔을 억지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잠깐…… 엄마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하던 얘기는 하고…….”
“이, 일 분이면 되니까. 잠깐만요.”
지희가 갑자기 얘가 왜 이러냐는 듯 난처한 얼굴을 했으나, 서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끌고 갔다.
가까운 방으로 그녀를 끌고 들어온 서원은 작게 숨을 내뱉었다. 제가 끼어들 타이밍을 놓치기라도 했더라면……. 그래서 아이를 지우게 됐을 거라 생각을 하니 등줄기를 타고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저도 모르게 마른 배를 쓸어내리며 아이를 떠올리는데, 지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서원아, 왜?”
“그……, 엄마. 저…… 제가 임신했다는 건 도련님한테는 비밀로 해 주실 수 있어요?”
“응? 아시는 거 아니었어? 퇴사했잖아.”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임신 사실을 말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도겸의 밑에서 일했었으니까 퇴사하면서 임신하게 됐다고 말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퇴사할 때 대충 둘러댔어요. 좀 껄끄러운 문제니까 말도 안 했고요.”
“아아…….”
지희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임신이라는 행위 자체는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사랑의 결실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축복받아 마땅한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서원의 경우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임신 사실을 밝히면 누구의 아이인지 묻는 건 거의 당연한 수순이었으니, 그게 거북할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는 눈치였다.
“그래. 말하지 않을게. 그런데 도련님은 정말 여기서 재울 생각이니?”
“아니요! 저는 안 된다고 했는데 고집을 꺾지 않으셔서요.”
“그렇구나…….”
지희가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사실 지희에게도 도겸은 그리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아들의 친구도 아니고, 아들의 전 직장 상사이자 옛날에 모셨던 사모님의 아들이었다. 단호하게 잘라낼 수 있는 인연이 아니었다.
아무튼 서원이 조심해 달라고 부탁하자, 지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도겸은 엿듣지 않았는지, 식탁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단지 서원에게 주는 시선이 조금 따가울 뿐이었다.
“그래서 어디가 아픈 겁니까?”
그는 아까 말하다가 끊긴 것을 놓칠 생각이 없는지, 되돌아오자마자 질문을 해왔다.
방 안에서 신신당부를 한 덕분에 지희는 미리 생각해뒀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했다.
“서원이가 감기에 걸려서 옮길 수도 있거든요. 좀 지독하게 걸려서.”
“……감기요?”
“네. 오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상태가 안 좋던지, 병원도 다녀왔다니까요? 다행히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다 나은 건 아니에요.”
사회생활의 연륜일까. 마치 이야기를 풀어내듯 말하니 실감이 났다.
그럼에도 도겸은 그다지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확신하지도 못 하는 오묘한 얼굴. 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은 것처럼 말하는 걸 보면 뭔가를 보고 받긴 했는데 정확히 어떤 걸 진료받았는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뒤를 밟았더라면 진단명은 몰라도 산부인과에 간 것도 알 텐데, 산부인과에서 감기라고 할 리가 없으니 이상하다고 여길 만했다.
그래도 서원의 엄마가 하는 말이다 보니,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도 뭐라고 하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이번에는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에 추궁받을 순 있겠지만. 오늘을 넘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내심 안심하는데, 도겸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싹싹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우성 알파라서 감기 같은 거 옮아 본 적 한 번도 없습니다.”
“우성 알파이신 도련님이 오메가인 서원이랑 같이 자겠다고 하는 게 부모 마음으로는 좀, 이해하기 힘드네요.”
“걱정하시는 게 뭔지 압니다. 그렇지만 서원이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봐 온 아이입니다.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서원이가 다섯 살 때부터 봤는데 그런 마음이 들 리가 없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