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36)

<35화>

서원은 고개를 젓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도대체 어떻게 제가 서울에 있다는 걸 알아냈는지.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제가 시골로 이사 간 것까지 알아낸 그인데 이 정도는 알아내기 어렵지도 않겠다 싶었다.

저번에 히트사이클의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쉬었을 때처럼 잠적을 탔다간 또 어떤 오해를 할지 몰랐다. 거래에 이길 자신이 없어서 도망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찾아온 걸지도 모르고.

이런저런 이유로 만나야 할 듯했다. 서원은 핸드폰만 챙기고 나가려다 힐끗 거울을 봤다. 방금까지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몰골이 영 초췌해 보였다. 머리는 부스스했고, 초음파 사진을 보다가 눈물을 훔친 탓에 눈두덩이는 살짝 부어 있었다.

그에게 더는 기대하지 않기로, 단념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여전히 부끄럽고 민망했다. 그는 흐트러짐 없이 멀끔한 모습을 하고 있을 테니 더 비교될 것 같았다.

급한 대로 머리만 대충 정리한 서원은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고 마당으로 나갔다. 굳게 닫힌 철문을 열자, 그 자리에 도겸이 서 있었다. 한 손에 담배를 든 채.

“윤서원.”

그는 서원이 나오자마자 담배를 꺼트리며 이름을 불렀다.

고작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도 왜 이렇게 늦게 나왔냐는 책망이 잔뜩 묻어나는 것 같았다.

피곤해서 자느라 연락을 못 받았다고 해명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연을 칼로 자르듯 딱 끊어내야 하는 마당에 그런 해명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서원은 해명 대신,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을 따지듯 물었다.

“……제가 서울 온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 중요한가.”

도겸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하기야. 시골 집까지 찾아왔던 마당에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가 이 세상에 못 하는 게 뭐가 있을까. 솔직히 웬만한 건 그의 재력으로 해결 가능했다. 심부름꾼이든 뭐든 썼겠지.

어떻게 알았는지 알 것도 같아 서원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도겸이 가만한 시선으로 서원을 훑어봤다. 온몸을 구석구석 훑는 눈길이 뭔가를 찾는 것처럼 집요했다.

“연락 왜 안 받았어.”

도겸은 여전히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서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건지. 제가 옷을 이상하게 입었나 하는 생각에 힐끗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평소와 비슷했다. 뭐지?

“자느라 연락 온 지도 몰랐어요.”

“여태까지 자고 있었다고? 어디 몸 안 좋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오랫동안 버스 타느라 좀 피곤했나 봐요.”

“…….”

의심스럽다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 시선을 받고 있자니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소심하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눈치가 보여 차마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고, 의심이라도 하는 거냐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볼일 없어야 하는 사람이라며, 눈치 볼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습관적으로 그의 앞에선 작아져만 갔다.

서원이 우물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도겸이 숨을 작게 내뱉으며 화제를 돌렸다.

“서울은 무슨 일로 왔어?”

“아, 그……. 부모님 만날 일도 있고 해서요.”

“그것뿐이야?”

“그럼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사실은 산부인과 검진 때문이었지만, 그건 말할 수 없어 시치미를 뗐다.

그에게 거짓말하다 성공했던 적이 별로 없어서 이번에도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스르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침을 꼴깍 삼키는데, 한참 서원을 바라보던 도겸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입을 열었다.

“서울 올 일 있으면 다음에는 나한테 연락해. 태워 줄 테니까.”

“네? 그게 무슨. 도련님이 그걸 왜 해요? 운전기사도 아니고.”

“그 기사 노릇 해 줄 테니까 말하라고.”

도겸은 빈말로 하는 말이 아닌 듯 표정에 미동도 없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저렇게 딱딱하게 말해도 배려라고 하는 말인 건 알았다. 그렇지만 굳이 도겸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해 준다고 해도 저런 배려는 거절하고 싶었다. 왕복으로 몇 시간인데 그걸 해 주겠다고……. 괜한 고생이었다.

“됐어요. 뭐하러 그런 짓을……. 돈 내면 다 차 태워 주는데요.”

“버스 말하는 거야? 불편해서 그런 걸 어떻게 타고 다녀?”

“도련님이나 안 타지, 다른 사람들은 다 타고 다녀요. 저한텐 엄청 편하고요.”

“내 차가 더 편하잖아.”

“아뇨. 도련님이랑 함께 있는 것도 불편하고, 전 버스가 좋아요.”

그가 왜 버스를 불편하다고 하는지는 안다. 최상위의 서비스만 받는 사람이니 그렇기도 하고, 도겸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체구가 큰 편이라서 더 그랬다.

그렇지만 서원은 불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버스를 타는 것보다 도겸과 단둘이 차를 타고 가는 게 지금으로선 더 위험하고 불편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거절하자, 도겸이 우물거리다 답답하다는 듯이 숨을 내뱉었다.

“하……. 그럼 서울 올 때 연락이라도 해. 비서 통해서 보고받는 거 짜증 나니까.”

“아니, 왜 그런 보고를…….”

어처구니가 없었다. 시골로 이사 간 집을 찾아올 때도 당당해서 당황스러웠는데, 이건 대놓고 저를 감시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어떻게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지……. 감시하지 말라고 해도 어차피 거래를 들먹거리거나 안 하겠다고 하고 할 사내인 걸 알았다. 그걸 알기에 애초에 그런 걸 하지 말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 이야기를 듣기 싫으면 보고를 받지 않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네가 언제 어디서 뭘 하는지 신경이 쓰이는데, 어떻게 보고를 안 받아.”

“그러니까 왜 신경을…….”

대꾸하는데, 순간 등줄기를 타고 싸한 기운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꿰고 있다면, 제가 오늘 산부인과에 간 것도 알지 않았을까?

지금 제게 묻지 않는 걸 보아서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방금 자연스럽게 몸이 안 좋냐고 물어봤기 때문에 아는 것 같기도 했다.

설마…… 벌써 제가 임신했다는 걸 들킨 걸까?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지만, 만일 아이가 생긴 걸 알았더라면 버럭 언성을 높이고 당장 지우라고 할 남자였다.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을 보아 어떤 것을 진료받았는지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럼 제가 먼저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들지. 서원은 앞으로 일거수일투족에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말을 돌렸다.

“그, 그래서, 여기까지 왜 오셨어요? 태워 주겠다고 말하려고 오신 거였어요?”

“아니. 이러려고 온 건 아니지.”

“그럼 뭔데요?”

“보고 싶어서 온 건데.”

“…….”

예상치도 못한 도겸의 대답에, 서원은 뭐든 받아칠 준비를 하다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용건이 있다고 하기에, 또 거래를 들먹거리며 트집을 잡으려고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들어나 보자고 삐딱하게 서 있었는데……. 보고 싶었다고.

저번부터 생각한 거지만, 사람을 이상한 기분으로 만드는 데 재주가 있었다. 특별한 의미도 아니면서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거라며 혼자 시골까지 운전해서 내려온 것도, 지금도…….

도겸이 다른 사람과 시시덕거리며 연애질하는 건 본 적이 없지만, 다른 오메가에게도 이랬더라면 그에게 기대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저 또한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를 놓지 못한 거겠지. 지금까지.

마음 한구석에 곱게 접어 뒀던 미련이 멋대로 펴지려고 했지만, 서원은 눈을 잠시 감아 마음을 다스렸다.

겨우 평정을 되찾은 서원은 조금 건조한 목소리로 다시 그를 돌려보내려 애썼다.

“확인했으면, 이제 가세요.”

“너무 빨리 보내는 거 아니야? 얼굴 본 지 십 분도 안 됐는데.”

도겸이 서원을 매정한 사람 취급하며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정이 없냐고 서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보다 더 보고 싶은 건 나인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서원은 꾹 눌러 삼키며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다.

“6년 동안 그렇게 봤으면서 또 뭘 봐요. 새삼스럽게……. 질리지도 않아요?”

“안 질려. 오랜만이라 더 반갑고.”

“뭐가 오랜만이라고. 저번 주말에 봤잖아요.”

“주말에 네가 초등학생이랑 데이트한다고 나가서 별로 못 봤잖아.”

“데이트 아닌데…….”

초등학생이랑 데이트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날은 그를 한번 속여 보겠다고 집을 나갔기에 그와 함께한 시간이 얼마 안 되긴 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도겸이 주고 간 마카롱을 먹으면서 직접 운전해서 왔다는데 기다리게만 한 게 조금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었지. 물론, 그가 멋대로 집에 쳐들어온 거라는 건 변함이 없지만…….

아무튼 그런 생각을 했었던 탓에 ‘그런가?’하고 흔들렸지만, 어쨌든 그와 함께 있을수록 마음이 흔들리니 빨리 돌려보내야 했다. 서원은 또 겨우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튼 오늘은 시간이 늦었잖아요. 얼른 주무셔야죠. 내일도 일 나가시잖아요.”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

“네?”

도겸에게서 나온 말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어서 순간 제가 말을 잘못 들은 줄 알 정도였다. 그러나 눈앞에서 고개를 까딱거리며 대답을 재촉하는 도겸을 보고 있자니 제가 정확히 들은 게 맞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저런 부탁을 하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게 무슨. 근처에 집 있잖아요. 훨씬 넓고 좋은데.”

“거기엔 네가 없잖아.”

“…….”

네가 없는 집은 싫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리면, 제가 너무 확대 해석 하는 걸까?

서원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였다. 만일, 이전에 이런 말을 들었더라면 정말 자고 가라고 했을 것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아팠을 때도 그가 시간이 늦었다며 막무가내로 나와도 함께 잤었으니까.

왜 매번 밉게 말하다가 저런 식으로 사람을 뒤흔드는 걸까.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매번…… 사람을 힘들게 만들어.

일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서원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며 거절의 말을 고르는데 도겸이 마저 말을 이었다.

“너랑 자고 싶어서 그래. 섹스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잠만 같이 자자고.”

“왜요?”

이번에는 다시 파트너로 돌아오라고 꼬드기는 것도 아니고. 왜 자고 가겠다고 하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저는 그저…… 편한 상대일 뿐이지 않나. 이미 그런 의미 이상으로 그가 제게 집착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말로 해 주지 않으면 몰랐다. 제가 오메가로 발현하던 날에도 입술에 뽀뽀해 놓고서는 아무런 의미 없었다는 듯 구는 작자였으니까.

서원이 왜 그런 걸 요구하느냐고 진지하게 묻자, 도겸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네가 있으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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