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36)

<34화>

병원에서 이런 것도 다 해 주는구나.

초음파 사진은 다시 봐도 신기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서원이 신기한 눈으로 수첩을 들여다보는데, 간호사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희 병원에서는 초음파 검사받을 때마다 이렇게 사진을 붙여 드리니까, 검진받을 때 꼭 들고 오세요.”

“감사합니다.”

병원에 자주 오면 뒷장까지 초음파 사진으로 꽉 채울 수 있을 것 같지만, 상황 탓에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서원이 고개를 꾸벅이곤, 수납을 마치고 산부인과를 나왔다. 나와서도 멍하니 수첩을 보고 있자, 엄마도 그것을 함께 들여다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귀엽다. 그렇지?”

“네……. 그러네요.”

사실 보이는 것도 별로 없지만, 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여태까지는 어떤 생각으로 아이를 낳으려고 했었더라……. 다음에는 아이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과 도겸의 아이라는 생각만 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왠지 모를 책임감이 느껴졌다.

멍하니 바라보는데, 엄마가 기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태명은 지었어?”

“태명이요? 아뇨.”

“태명 붙여 주고 이름도 불러 주면서 예뻐해 줘.”

태명이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진짜 이름도 아니고 태명일 뿐인데 왠지 신중해졌다. 서원이 선뜻 태명을 붙여 주지 못하자, 보다 못한 지희가 끼어들었다.

“어떤 아이였으면 좋겠어?”

“저는……, 글쎄요. 지금은 건강히 태어나 주기만 해도 좋을 것 같은데.”

딱히 어떤 아이를 낳고 싶은 게 아니라서 잘 태어나 주기만 해도 고마울 것 같았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아이를 품고, 제 몸이 열성 오메가이기까지 했으니까. 감히 똑똑했으면 좋겠다든지, 아니면 예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서원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자, 사뭇 진지하게 고민하던 지희가 좋은 의견이 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럼 찰떡이 어때?”

“찰떡이요?”

“찰떡처럼 착, 붙어 있으라고 찰떡이. 어때?”

찰떡처럼 착? 아마 열성 오메가는 조산이나 유산의 위험이 다른 이들보다 몇 배는 더 컸기 때문에 그런 태명을 생각한 것 같았다.

“의미는 좋은 것 같은데, 너무 촌스럽지 않아요?”

“태명이 촌스러울수록 태아가 건강하다는 말도 있잖아.”

“그런 말도 있어요?”

“그럼.”

진짜라는 듯 지희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진짜인가? 의아하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근처에서 들은 태명도 대부분 단순한 이름이었던 것 같다. 튼튼이, 쑥쑥이처럼…….

그렇게 생각하니 찰떡이라는 태명이 갑자기 마음에 들었다. 정말 찰떡처럼 착, 떨어지지 않고 제게 붙어 있어 줘서 잘 태어나 주면 좋겠다.

“그럼 찰떡이로 할래요.”

그렇게 대답한 서원은 찰떡이의 초음파 사진을 몇 번 더 만지작거리다가, 뒤늦게서야 시선을 떼고 수첩을 가방 안에 넣었다.

* * *

“후우…….”

도겸은 갑갑함에 넥타이를 살짝 끌어 내리며 숨을 내뱉었다.

출근 이후 오전부터 쭉 이어진 회의는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제가 예민해진 탓인지, 아니면 직원들이 오합지졸인 건지 하나도 제대로 준비해 온 것이 없었다. 그 탓에 평소면 한두 시간이면 끝날 회의에 몇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회의가 아니더라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사실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업무를 보려는데, 배 비서가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도겸은 지금 뭔가를 들었다가는 또 예민하게 반응할 것 같아,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또 업무 이야기면 이따가 하지 그래.”

“아뇨, 그게 아니라……. 지금 윤서원 씨, 서울에 있다고 합니다.”

“……서울? 왜?”

어떤 말을 해도 다음으로 넘기려고 했건만, 윤서원의 이야기라면 달라졌다.

갑자기 서울에 내려왔다고? 혹 마음을 바꿔먹은 건 아닐까 하는 기대가 일었다.

저번 주말까지만 해도 절대로 제게 오지 않을 것처럼 굴던 윤서원이었다. 그렇지만 그사이에 그 구질구질하고 좁은 집에서 지내는 게 싫을 수도 있고 시골 생활이 불편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고, 더는 제게 그딴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고……. 뭐, 이유는 많으니까.

역시 윤서원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건 거짓말이었어. 제 생각이 맞았다는 생각에 슬며시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데, 배 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전에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나왔다고 합니다.”

“병원? 어머니가 어디 아프신 건가?”

“아뇨. 진료는 윤서원 씨가 받았다고 합니다.”

“……윤서원이? 어디가, 뭐 때문에 진료를 받은 건데?”

윤서원이 진료를 받았다는 말에 도겸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갑자기 무슨 사고라도 난 게 아닌지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산부인과에서 페로몬 검사를 받았다고 보고받긴 했지만, 정확히 어떤 이유로 진료받았는지는…….”

“그걸 알아 왔어야지.”

“의료법 때문에 환자의 진료 기록을 확인하는 건 힘듭니다.”

“그걸 내가 몰라? 그렇게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거였으면 내가 직접 알아봤겠지.”

“……죄송합니다. 다시 알아보라고 하겠습니다.”

답답한 대답에 도겸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날카로운 말투로 쏘아붙이자, 배 비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정확히는 배 비서가 아니라 윤서원에게 붙여 놓은 인간들이 제대로 일하지 않은 거였지만, 이놈이나 저놈이나 답답하기 짝이 없는 건 똑같았다.

산부인과의 페로몬 검사라……. 산부인과라고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이 임신이긴 했지만, 윤서원은 열성 오메가였으니 그런 일은 아니리라.

물론 꼭 임신이 아니더라도 산부인과에 갈 이유는 많았다. 오메가들은 페로몬이 안정적이지 않을 때 종종 그곳에서 진료를 받기도 하니 그런 이유일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시골이라도 병원은 있을 텐데, 굳이 서울까지 와서 병원을 갔다니. 이상했다.

그러고 보면 일을 그만두기 전에도 많이 아파했었지. 혹시 그때 그 미친놈들이 술에 히트사이클 유도제를 타서 부작용이라도 일어난 걸까? 만일 그 때문에 페로몬 샘에 문제가 생겨서 산부인과에 갔다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부작용 관련된 문제는 아무래도 시골보다는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할 테니까.

주말에 본 서원은 상태는 평소와 비슷했지만, 살이 부쩍 빠지고 피곤해 보였다. 저한테도 예민하게 굴고……. 추측은 점점 기정사실이 되어 가고 걱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하……. 그럼 지금은 뭐 하고 있대?”

“지금은 윤서원 씨 어머니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서울에서 머물 예정인지, 내일 오후 세 시에 버스 예약을 잡았다고 합니다.”

“…….”

배 비서의 말에 도겸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 위로 푸르스름한 핏줄이 선명하게 돋아났다.

당장 윤서원을 보고 싶었다. 매주 가서 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게 갈증이 일었다. 게다가 부모님을 대동하고 서울의 병원까지 갔다고 하니 무슨 일이냐고, 어디 아프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점심시간이 끝나면 다시 회의에 들어가야 했다. 게다가 최근 주말을 반납하고 매번 윤서원의 집을 찾아가느라 밀린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뭐 알아낸 거 있으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 회의 중이건 뭐건 상관없으니까. 특히 병원 기록, 꼭 알아내고.”

“……알겠습니다.”

배 비서는 병원 기록이라는 말에 난처한 얼굴을 했으나, 마지못해 고개를 꾸벅였다. 무리한 요구였으나, 불가능도 되게 해야 할 판이었다.

배 비서가 이사실에서 나가고, 혼자 남은 도겸은 불쾌한 페로몬을 양껏 뿜어내며 숨을 내뱉었다.

“후, 답답해…….”

태생부터 집안이 좋기도 했지만,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일에 매진하고 남들보다 더 일에 전념했다. 어릴 적부터 우성 알파라는 뛰어난 체질에 돈, 명예까지 있으면 원하는 건 뭐든지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 아래에서 일궈낸 것들이었다.

그런데 요즘에 들어서는 이게 맞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돈도, 명예도, 체질도 다 뛰어난데, 고작 윤서원이 곁에 없는 것만으로 제 생활이 완전히 기울고 있었다.

게다가 우성 알파가 그리 뛰어난 체질이라면서,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예전과 달리 하루가 다르게 피곤하고 힘들고 짜증으로 가득 찼다. 빌어먹을 페로몬 체증 때문이었다.

약을 먹어도 해결이 안 되니 이제는 저주에 걸린 기분이었다. 윤서원을 만나면 조금 괜찮아지던데…….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기분이었다.

* * *

병원을 다녀온 서원은 엄마의 집에 와서 푹 쉬었다.

오래간만의 서울행이었지만 용건이라고는 산부인과에 가는 것밖에 없었다. 게다가 임신한 이후로 체력이 부쩍 떨어져서 장시간 차를 타고 온 것만으로도 체력이 바닥나 버렸다.

산부인과 진료를 마치고 간단한 식사를 한 뒤, 서원은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다행히 어머니께 이 집을 사 드릴 때부터 함께 사는 것을 고려했기에, 제 방도 있고 침대까지 있었다.

그렇게 기절하듯 잠들고 얼마나 됐을까. 정신이 들었을 때는 창밖이 어두움으로 내려앉았을 때였다.

“얼마나 잔 거지…….”

낮잠을 잔 것 치고 오래 잔 것 같은데, 여전히 머리는 수면 아래에 가라앉은 것처럼 몽롱했다.

꿈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비몽사몽 앉아 있는데, 문득 방문이 열렸다.

“서원아. 일어났어?”

“네……? 네, 방금이요…….”

너무 오래 잔 것 같아 서원이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막 일어나려고 하는데, 지희가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밖에 도련님 오셨던데. 혹시 무슨 연락 받은 거 있니?”

“……도련님이요?”

도겸이 집 앞에 와 있다고?

자다 깨서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람. 그 말에 몽롱했던 정신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퍼뜩 선명해졌다.

혹시, 하고 든 생각에 핸드폰을 확인한 서원은 저도 모르게 작게 탄식했다.

“하…….”

몰랐는데, 도겸에게서 부재중 연락이며 메시지가 여럿 와 있었다. 아무리 잠들었어도 이렇게까지 연락했으면 알아챌 법도 한데, 정말 기절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연락을 뭐 이렇게나 많이 했대……. 저번에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쉬었을 때도 그러더니, 은근히 집착하듯 연락하는 경향이 있었다. 파트너로 지냈던 6년 동안 이랬던 적이 없는 걸 보면, 제가 매번 꼬박꼬박 연락을 잘 받아왔기 때문에 몰랐었나 보다.

서원이 떨떠름하게 부재중 연락 기록을 내려다보고 있자, 지희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다음에 오시라고 할까?”

“……아뇨. 제가 나가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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