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이렇다 할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이, 차가 멈춰 섰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다음에……, 다음에 생각하자. 당장 좋은 방법이 떠오를 것 같진 않으니까.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서원.”
서원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고리를 붙잡는데, 도겸이 말로서 붙잡았다.
이번에는 왜. 서원이 도겸을 돌아보자, 그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머뭇거렸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오묘한 모습에 서원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음 주말에 올게. 오던 시간에.”
“…….”
무슨 말을 하려고 머뭇거리나 긴장했는데……. 이제 보니, 제가 멋대로 찾아오는 게 불편하다고 해서 미리 말이라도 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이만하면 크나큰 발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거절할 수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약속이 아니라 통보 아니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좀…… 오늘은 이만 그만하고 싶었다. 임신한 이후로 부쩍 체력이 떨어진 것을 느끼는데, 그를 피해 낮부터 오락실과 노래방에서 체력을 다 쏟은 참이었다. 피곤했다.
서원은 따지고 입씨름을 더 하기보다, 체념하듯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늦었어요.”
“그래. 들어가.”
도겸은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머뭇거렸던 건지, 후련한 얼굴을 했다. 누가 보면 엄청난 문제를 해결한 줄 알겠다.
생각보다 시시한 부분이 있다며 서원이 차에서 내리고, 가방에서 열쇠를 찾는데 뒤에서 지이잉 하고 차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뒤에서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한 도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맞다. 냉장고에 마카롱 넣어 놨어.”
“……마카롱이요? 그게 어디서 났어요?”
“살 빠진 것 같아서 좀 먹으라고 사 왔어. 너 예전에 잘 먹었던 거 있잖아.”
“……?”
입덧을 심하게 해서 살이 빠진 건 맞았다. 그런데 제가 잘 먹었던 마카롱이 뭐지? 마카롱은 어떤 종류든지 원래 잘 먹는데…….
구체적으로 뭘 샀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 하는 사이, 도겸은 이제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차 창문을 올리고 차를 돌려 사라졌다.
궁금증이 든 서원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냉장고를 열었다. 그러자 한가운데에 흰색 박스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언제 가져다 놓은 거지……?”
분명 아까 집에 들어올 때 도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를 않았는데…….
마카롱 박스를 보니 어디서 사 온 건지도 알 것 같았다. 어렸을 때도 종종 그가 가져다주던 것이었는데, 파트너가 되고 나서도 협업 상대라서 마카롱 받을 일이 많다나……. 그렇게 말하며 종종 제게 주던 것이었다.
오래간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박스를 열어 보니, 알록달록한 마카롱이 6개씩 두 줄이 들어 있었다. 간만에 입맛이 돌아 송어 회를 한가득 먹고 온 참이라 배가 부른데, 마카롱을 보니 또 입맛이 돌았다.
서원은 원래 배가 부르면 아무리 맛있어도 더는 못 먹는 편이었다. 그런데 임신한 이후로는 입맛이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한 음식에 미친 듯이 꽂힐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러했다.
……한 개쯤은 괜찮겠지.
합리화를 한 서원은 조심스럽게 초코색의 마카롱 하나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다.”
햄스터처럼 우물거리던 서원이 작게 감탄했다. 원래 좋아하던 음식이니 맛있다는 건 알았지만, 오래간만이라 그런지 더 맛있는 느낌이었다. 꼬끄도 쫄깃하고 안에 들은 필링도 적당히 달고 맛있었다.
커피랑 마시면 진짜 맛있을 텐데. 그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마카롱은 맛있어서 한 개 더 먹고 나서야 다시 냉장고에 넣을 수 있었다.
* * *
마음이 복잡했던 주말이 지나고, 서원은 서울행 버스를 탔다.
벌써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서울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몇 시간이나 달렸을까. 버스 차창 너머로 익숙한 서울역이 보였다. 서원이 버스에서 내려서 찌뿌둥하게 허리를 펴는데, 근처에서 익숙하고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서원아.”
“아, 엄마. 기다리셨어요? 차가 막혀서 좀 늦었는데…….”
“아니, 방금 막 왔어. 예약 늦겠다. 얼른 가자.”
서원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려는데, 그녀는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조차 없다며 서원을 붙잡고 걸음을 바삐 했다.
서울행 버스에서 내려 또 택시를 타고,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산부인과였다.
접수처에서 예약을 확인한 둘은 간단한 검사를 마치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서원은 무릎 위에 얹었던 손을 꼼지락거리며 염치없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거 부탁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엄마가 도와준다고 했잖아.”
서원이 눈썹을 늘어트리며 하는 말에, 지희가 신경 쓰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사 간 곳이 허허벌판 시골이긴 해도 조금 나가면 산부인과쯤은 있긴 했다. 그렇지만 오늘 굳이 서울에까지 온 이유는 엄마와 함께 가기 위해서였다.
아이가 생겼음을 엄마에게 알리던 날, 그녀는 자신이 도울 게 없냐고 물었었다. 서원은 임신 후에 일어난 모든 일을 제가 다 짊어질 생각이었지만, 엄마는 아주 자그마한 것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눈치였다.
그래서 하나 부탁한 게 함께 산부인과에 같이 가 달라는 것이었다.
서원은 열성 오메가이다 보니 다른 이들보다 유산 가능성이 월등히 컸다.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땐 정말 버티기 힘들 것 같아서 저를 붙잡아 줄 사람이 필요해 부탁한 것이었다.
상상만 했을 뿐인데 입 안에서 쓴맛이 돌았다. 서원이 씁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지희가 그런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위로했다.
“나도 예전에 네 아빠 없이 혼자 산부인과 다닐 때 많이 힘들었어. 다른 사람들은 다 남편이랑 오는데 나만 혼자 오고……. 의사도 괜히 나를 안쓰럽게 보는 것 같고. 눈치가 보였지. 죄지은 것도 아닌데.”
“…….”
“그러니까 더 많이 부탁해 줘. 혼자 다 떠안지 말고.”
“……알겠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꼭 그래야 하는 거 아니면 집에 들어와. 아니면 서울로 오든지. 병원은 가까울수록 좋으니까.”
“……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쓴소리에 서원이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집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산부인과에 내원하며 자주 검진을 받아야 할 것이다. 특히 서원은 다른 이들보다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그리고 도겸과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골로 내려간 거였는데, 그가 매주 찾아오고 있으니……. 집으로 돌아오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도 거래 때문에 도겸이 계속 찾아오면 배가 부른 제 모습을 보고 임신한 걸 알아차리고 말 것이었다. 그러느니 도겸이 멋대로 찾아올 수 없도록 엄마와 지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윤서원 씨. 들어오세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진료실에서 서원을 불렀다.
원래는 일찌감치 진료를 봤어야 했지만, 그간 이사도 하고 바삐 지내는 바람에 진료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혹시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닌지 긴장이 됐다.
서원은 지희와 함께 진료실에 들어가 긴장감에 허리를 뻣뻣하게 폈다. 진료실에서 나는 특유의 약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무서운 건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따끔한 말을 들을까 걱정하는데, 차분히 차트를 확인한 의사가 온화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체중이 좀 빠지셨던데, 벌써 입덧 시작하셨어요?”
“네……. 심하진 않은데, 특정 음식이 아니면 평소처럼은 못 먹어요.”
“그런 것 같았어요. 아직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라, 앞으로 잘 챙겨 드시면 될 것 같아요. 알파 분이랑 같이 있으면 좀 입덧이 완화되니까 참고하시고요.”
서원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까 며칠 전 송어회와 마카롱까지 먹었던 날도 도겸과 함께 있었는데……. 그랑 같이 있었어서 입덧이 덜했던 건가?
잠깐 생각하고 있는데, 의사가 마저 입을 열었다.
“아이는 다행히 별문제 없이 잘 자라고 있네요. 검사한 것들 다 정상 수치로 나왔어요.”
“아…….”
진료 시기를 많이 놓쳤는데, 다행히 아이는 잘 자라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원이 무의식적으로 마른 배를 쓰다듬으며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의사가 “흠.”하고 차트를 한 번 더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초음파로 한 번 볼까요? 저쪽에 누워 보시겠어요?”
“아, 네.”
저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초음파 검사도 한다는 것이었다.
의사가 말한 곳에 누워 웃옷을 살짝 올리고 있자, 의사가 초음파 기계에 투명한 젤 같은 것을 치덕치덕 발랐다. 이윽고 그것을 배에 가져다 대자 새까맣던 화면이 지지직거렸다.
이게 뭐지. 고장 난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지지직거리기만 해서 뭘 보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서원이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영문 모를 얼굴을 하고 있자, 선생님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아기집이에요.”
선생님이 화면에 가리킨 곳에는 까만색으로 뭔가가 있었다. 정말 콩알만 하다는 게 어울리는 수준의 아주 작은 크기였다. 저게 어떻게 아기집이라는 건지 생각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엄청 작네요.”
“평균보다 좀 작은 편이긴 한데, 문제가 있는 정도는 아니에요. 모양이랑 위치는 괜찮네요.”
“아아…….”
서원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모양이랑 위치. 솔직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얼추 아이가 잘 크고 있다는 뜻 같았다.
걱정했는데 별일 없어서 다행이었다. 서원의 표정이 사뭇 부드러워지자, 의사가 씩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심장 소리도 들어보실래요? 잘하면 오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심장 소리요? 네. 들어볼래요.”
의사의 제안에 서원이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작은 것이 어떻게 심장까지 있다는 건지 믿기지 않는데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니. 듣고 싶었다.
서원은 일반적인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생각했는데, 의사가 들려준 소리는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마치 바람 소리처럼 들렸는데 그 소리가 엄청나게 빨랐다. 이래도 되는 건가? 서원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의사에게 물었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아기들은 원래 성인보다 심장 박동이 더 빨라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그렇구나…….”
정말…… 뭐가 있긴 있구나.
기분이 이상했다. 이전에 의사에게서 임신했다는 말도 들었고, 이리저리 제 몸에 끼치는 영향이 있어서 제 몸속에 아이가 있다는 생각은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두 눈으로, 두 귀로 보고 듣게 되니 마음이 뒤숭숭하고 벅차올랐다. 만약 엄마 없이 혼자 왔더라면 펑펑 울었을 게 분명할 정도의 울렁임이었다.
서원은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설명 몇 가지를 듣고 나서야 진료실을 나왔다. 엄마와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초음파랑 심장 박동이 신기하다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접수처에서 서원을 불렀다.
수납하라는 이야기 같아 카드를 꺼내는데, 계산을 마친 간호사가 작은 수첩 하나를 주며 말했다.
“맞다. 그리고 이것도 받아가세요.”
“이게 뭐예요?”
“임신 오메가 수첩이에요. 원래 저번에 받아가셨어야 했는데 검진이 늦어져서……. 여기 안에 보시면 오늘 초음파 찍었던 것도 보실 수 있어요.”
간호사는 손수 수첩을 열어 주며 수첩 내용을 확인시켜 줬다. 이상 징후는 없었는지, 지금이 몇 주차인지 적혀 있었고, 그리고 오늘 보았던 초음파 사진도 예쁘게 안에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