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서원은 그에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담배 냄새에 예민한 편이 아니었으나 임신한 이후로는 꺼려지게 됐다.
조금 물러선 것뿐이었으나, 도겸은 그게 썩 불쾌한지 더 바싹 거리를 좁히며 서원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손아귀의 힘이 센 탓에 서원은 옅게 신음하며 미간을 좁혔다.
“윽……!”
“몰랐는데, 말을 오해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 데이트한다고, 잘되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하길래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만나러 가는 줄 알았잖아. 좋아하는 사람 없는 거, 맞지.”
도겸이 눈을 형형하게 뜨며 서늘하게 물었다. 어떻게든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려 혈안이 된 사람처럼 보였다.
억세게 잡힌 손목이 얼얼해, 서원은 손으로 겨우 그의 손을 뿌리치며 입을 열었다.
“……있어요.”
“아직도 그 거짓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해? 아아, 설마 그 열 살쯤 돼 보이던 여자애를 좋아한다고 할 생각인가? 그건 너무 양심이 없는데.”
“…….”
슬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집에서 나오고 첫 번째로 간 곳이 오락실이었던 걸 떠올리면 처음부터 따라붙었던 게 틀림없었다.
도겸을 속이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계획을 짜지 않고 충동적으로 나오게 됐을 때부터 오늘 일과를 들키는 건 각오했다.
그러나 집을 나올 때 도겸은 저를 따라 나오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한 탓에 충격을 받고 안 따라온 줄 알았다.
그런데 처음부터 다 지켜보고 있었다니……. 속은 기분이었다. 오늘 데이트하지 않았다는 걸 들킨 것보다도, 애들이랑 오락실에서 노는 모습도, 노래방에서 청승맞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송어회를 걸신들린 듯 먹던 것도 다 봤을 거라는 게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민망했다. 서원이 시선을 떨구는데, 도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숨을 터트리며 야수처럼 으르렁댔다.
“내가 말했지.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못 믿는다고. 이딴, 쓸데없는 짓은 안 통해.”
“……보여드려도 안 믿어 주실 거잖아요.”
“또 수작질 부리는 게 아니라면 믿지, 나도.”
“…….”
보여 주더라도 그때는 또 다른 꼬투리를 잡을 것 같은,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그의 모습에 서원은 갑갑한 숨을 터트렸다. 제가 다시 그의 파트너가 되기를 원하는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은 아니지 않나.
“……전 도련님이 저랑 뭘 하고 싶어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복귀하라고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꼭 저여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너여야만 해.”
도겸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저번에도 그랬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그때도 지금도 그 말에 마음이 요동쳤지만, 서원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른 오메가들은 마음에 안 든다고 쫓아내셨다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고작, 그들이 귀찮고 짜증 나서 그러시는 거잖습니까. 제가 보기엔 매주 여기까지 내려오는 게 더 귀찮고 번거로운 일 같은데요.”
“……그거랑은 달라.”
“어떻게 다른데요?”
“…….”
서원이 묻자, 도겸은 곤란한 질문을 들은 사람처럼 시선을 회피했다. 무슨 말이든 받아칠 것처럼 공격적으로 다가오던 방금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서원이 어디 대답 좀 해 보라며 시선을 보냈으나, 도겸은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일단……, 차에나 타. 데려다줄 테니까.”
“…….”
이 주제로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도겸의 반응이 오히려 서원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 결국 제 말이 맞지 않나. 꼭 저여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다.
서원은 시선을 돌리며 숨을 깊게 내뱉었다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됐어요. 걸어갈게요.”
“내 말은 아예 안 듣기로 했어?”
“도련님도 제 말 하나도 안 들으시잖아요. 저도 들어야 할 이유 없어요.”
말이 통해야 대화를 나누는 거지, 제 할 말만 하면 그게 대화인가. 서원은 그렇게 냉정하게 생각하며 도겸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도겸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서원의 팔목을 다시 붙잡았다.
“윤서원. 정말 내가 뭐라도 잘못했어? 히트사이클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때는 넘어가자고 했으면서 무슨 문제가 생긴 건데. 말을 해야 이해를 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도겸은 아무리 생각해도 서원이 파트너를 그만둘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때 그 사건 이후로 아이가 생겨 버렸으니까. 그렇지만 단지 그 이유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련을 쌓고 쌓다가 이제는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다는 걸 깨달은 거다.
“그거랑은 관계없어요.”
“지금 말,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거 알지.”
“…….”
“미국에서는 계속 파트너 이어가자고 울었으면서, 다음에 만났을 때 갑자기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더는 파트너 못 이어 가겠다고 한 게 너야. 그 사이에는 너 아프기만 했고. 이래도 내가 착각하는 거야?”
도겸은 정확하게 서원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었다.
솔직히 서원은 거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도겸이 제가 좋아한다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까지 관심이 많을 줄은, 그리고 이렇게 붙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서원은 이번만큼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러자 도겸이 씨근덕거리던 숨을 고르더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거래했던 대로 당장 짐 싸서 서울로 올라와. 아파트 비워놨으니까. 그것도 힘들면 내 집에서 당분간…….”
“아뇨. 아직 아닌데요.”
“뭐?”
서원이 말을 토막 내 버리자, 도겸이 거슬린다는 듯 한쪽 눈썹을 움틀거렸다.
“거래, 아직 안 끝났다고요. 오늘은…… 약속이 취소됐는데 집에 돌아가면 도련님 있을 거 아니까 바깥에서 시간 때운 것뿐이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아. 아니, 그것보다 나를 왜 피하는데?”
“퇴사까지 했는데 전 직장 상사랑 한 공간에 있는 게 편하겠어요?”
“너…… 전 직장 상사라고 좀 하지 마.”
도겸은 거래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보다는 ‘전 직장 상사’라고 불리는 게 더 싫은 듯 콕 찍어 지적했다.
그러고 보면 아까도 ‘전 직장 상사’, ‘다섯 살 어린 전 직원’이라는 말에 한 방 얻어맞은 얼굴을 했었지.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가 그 말을 저렇게까지 의식하는 줄은 몰랐다.
너무 예의가 없었나. 서원은 반사적으로 도겸의 눈치를 살피다, 하소연하듯 토로했다.
“아무튼……, 이번 일은 아니에요. 솔직히 도련님도 저한테 너무하게 구셨잖아요.”
“내가?”
“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매주 집에 찾아오시고, 매번 감시하고, 따지고, 면박 주고……. 그게 편하겠어요?”
“…….”
서원이 도겸에게 지난 행보를 생각해 보라며 따지듯 물었다. 굳이 전 직장 상사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제멋대로 집에 쳐들어오고 사사건건 감시하는데 편할 리가 없었다.
도겸도 찔리는 게 있긴 한지,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주변에 있는 건 논두렁에 지나가는 사람도 없던 터라 찌르르 우는 풀벌레만이 적막을 달랬다.
과열됐던 분위기가 가라앉아서 그런가, 서늘한 공기가 피부로 다시 느껴졌다. 몸을 스치는 바람에 서원이 반사적으로 팔을 감싸자, 도겸은 서원을 놓아주고 차로 다가가 조수석 문을 직접 열었다.
“알겠으니까, 일단 차에 타. 춥잖아.”
“그럼 거래는…….”
“안 끝난 거로 해.”
“…….”
도겸이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자 서원이 미심쩍게 그를 바라봤다.
제가 설득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쉽게 넘어가는 것 같은데.
저번에 거래를 걸었을 때처럼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지 몰랐다. 불신으로 가득 찬 서원이 차에 올라타지 않자, 도겸이 한숨을 내뱉었다.
“또 뭐가 문젠데. 내가 또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그는 자신이 잘못한 걸 알긴 아는지, ‘또’라는 단어를 써 가며 물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막무가내로 굴었다는 건 인정은 하는 눈치였다.
집안도, 지위도, 체질도 누군가에게 한 번도 굽혀 본 적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가……. 그가 잘못한 게 있다는 걸 인정한 것만으로도 금방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리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라, 이제 말씨름을 그만두고 싶은 게 그의 얼굴과 말투에서 선명히 보였다.
“……아닙니다.”
서원은 고개를 젓고, 순순히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저도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련님은 여전히 제게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이리 거절하고 모질게 말하는 게 편할 리가 없었다.
차에 올라타자 도겸이 한숨을 쉬더니, 문을 닫아 주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짧은 거리임에도 서원에게 꼭꼭 안전벨트를 채워 준 그는 그제야 운전대를 잡았다.
우둘투둘 포장되지 않은 길을 지나가며, 서원은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은 잘 넘어가긴 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오늘의 도겸을 봐서는 정말 어떤 사람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믿어 줄 것 같지 않았다.
진짜 누구라도 잡고 애인 행세를 시켜야 하나……. 그렇지만 이 마을에 20대라고는 저밖에 없었다. 아무나 붙잡고 저 사람을 짝사랑하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짓말인 티가 철철 났다.
사랑에 나이 차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막무가내로 들이댈 수는 있겠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이 마을 토박이인데 조사하면 서울에 걸음도 하지 않은 사람이 수두룩할 거다. 도겸에게는 그렇게까지 조사할 능력이 있으니 아무나 잡고 그럴 수가 없었다.
“후…….”
서원은 들릴 듯 말 듯 작게 숨을 내뱉었다.
도겸이 제게 집착하는 게 좋으면서도, 그걸 제 손으로 떨어트려야 하니……. 모질게 굴어야 하는 것도, 방법을 떠올려야 하는 것도 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