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도겸의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제가 잘 마시는 건지. 홀짝홀짝 잔을 비울 때마다 도겸은 자연스럽게 잔을 채워 줬다. 그러다 보니 와인의 절반 이상은 제가 다 마신 것 같았다.
몇 잔을 마셨을 때였을까,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윤서원, 취했네.’
딱히 취한 티를 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도겸은 금방 서원의 변화를 알아채고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왜 웃는 거지? 제 모습이 웃긴가 싶기도 하고, 고작 이 정도에 취했냐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서원은 몽롱해져 가는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최대한 멀쩡한 척 대답했다.
‘생각보다 도수가 센가 봐요…….’
‘아무리 달아도 술은 술이니까.’
하긴……. 달아서 술이라는 것 잊었는데, 술은 술이었던 모양이다.
후우우. 속이 펄펄 들끓었다. 서원이 뜨거운 느낌에 숨을 내뱉는데, 도겸은 이제 다 마셨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그만 마셔. 일해야지.’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일하러 온 거였지. 서원도 덩달아 잔을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나 미적미적 침대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한두 걸음밖에 걷지 않았을 때 도겸이 픽 웃으며 서원의 팔목을 쥐었다.
‘아쉬워?’
‘조금요.’
서원은 평소 도겸의 말에 그 듣기 좋은 방향으로 대답하는 편이었는데,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평소보다 솔직하게 대답하게 됐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그럼 저 와인, 한 병이든 두 병이든.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해 줄게.’
‘부탁……? 그게 뭔데요?’
도겸이 무언가를 부탁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고 뭐든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다 보니, 누군가에게 자존심을 굽혀 가며 부탁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가 제게 뭔가를 부탁한다는 게 흥미로웠다. 서원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그가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리곤 입을 열었다.
‘오늘은 네가 직접 움직여 봐.’
‘……네?’
움직이라는 게 무슨……. 서원이 단번에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 머뭇거리는데, 도겸이 서원의 엉덩이를 콱 틀어쥔 채 가까이 바싹 끌었다.
훅, 눈 깜짝할 찰나에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짙은 알파 페로몬과 방금 마시고 있던 달콤한 와인의 향기가 섞여 물씬 풍겼다.
‘네가 리드해 보라고.’
‘…….’
리드라니…….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이 된 것처럼 하얘졌다.
와인은 ‘술이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맛있긴 했지만, 애걸복걸할 정도로 받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목석처럼 누워 있던 제가 싫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저런 요구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맛있는 와인보다도 도겸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부탁을 들어주려고 보니 오히려 더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매번 도겸이 이끄는 대로 따랐기 때문에,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가늠도 오지 않았다.
도련님은 보통 어떻게 했었더라? 보통 입맞춤부터 시작했던 것 같은데…….
어디서 보던 대로 따라 하는 게 고작인데, 몸을 겹쳐 본 건 도겸 뿐이었다. 그래서 서원은 그를 따라하기로 했다.
서원은 키 차이가 10cm가 넘게 나는 도겸과 키를 맞추기 위해 까치발을 세웠다. 그리고 도겸의 옷자락을 붙잡아 내리며 그의 단정한 입술에 제 것을 포갰다.
입술에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살결이 닿았다. 입맞춤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고작 입술을 맞대는 것뿐인데 그 어떤 행위보다 낯간지럽고 예쁜 마음이 들었다. 몸을 겹칠 때보다 더……. 저 혼자만의 일방통행이지만 사랑을 나누는 기분이라 좋아하는 행위였다.
이런 제 마음을 알면 도겸이 더는 키스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꼭꼭 욕망을 숨겨야 했다. 조금 소심하게, 한편으로는 몽글몽글하게 피어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도겸의 입술을 살짝 혀로 훑자 그의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쪽, 쪽……. 혀를 내어주기에 그것을 가볍게 빨아당겼다. 도겸이 이렇게 해 줬을 때 좋았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전의 경험을 떠올리고 따라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직접 키스를 리드해 보기는 처음이라, 애들 장난 같은 움직임이라고 타박해도 할 말이 없을 어수룩한 애무였다.
그때였다.
‘흣…….’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도겸이 갑자기 서원의 목덜미를 감싸 끌어당겼다.
달려들 듯한 행위에 서원이 흠칫하여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도겸이 팔로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퇴로를 막았다.
도겸은 입술을 벌렸다 다물며 서원의 입술을 삼킬 듯 굴었다. 저보고 리드해 보라고 할 땐 언제고, 그가 훨씬 더 적극적으로 나오니 뭔가를 할 틈이 없이 휘말려 들었다.
‘도련님, 하, 흡……!’
성마르고 갈급한 입맞춤이었다. 갈증이 나 미치겠는 사람처럼. 여태까지 그와 입맞춤을 나눈 게 처음도 아닌데, 이런 느낌은 새로웠다.
잠깐 멈춰 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도겸은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어깨를 붙잡고 잠시 밀어내려고 해도 역부족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한참 물리고 빨린 입술은 타액으로 번지르르하고 퉁퉁 부은 느낌이 들었다.
폭풍이 지나쳐간 듯 혼란스러운 눈으로 도겸을 올려다보는데, 그가 서원의 귓가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어디 가서 술 마시지 마.’
‘…….’
명령 같은 말에 서원은 멍하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런 소리를 들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입을 맞춘 것밖에 한 것도 없는데. 마치 제가 술주정이라도 하고 한소리 들은 것 같지 않나.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이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보며 한창 옛날 생각에 잠겨 있는데, 싹싹하게 굴던 직원이 큼직한 그릇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송어 회 나왔습니다!”
종업원의 말에 서원은 퍼뜩 정신을 차리곤, 테이블 위로 올라온 송어 회로 시선을 옮겼다.
송어 회는 사실 처음 먹어 보는데, 빨간 생선 살은 척 보기에도 부드러워 보였고 윤기가 반지르르해서 신선하고 맛있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침을 꿀떡 삼키는데, 종업원이 상추와 양배추, 당근, 고추 등 채소가 잔뜩 든 하얀 대접을 내려놓으며 설명했다.
“채소랑 초고추장이랑 기호에 맞게 섞어서 드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서원은 횟집이라고 해서 그냥 평범한 회를 생각했는데, 송어회는 조금 다르게 먹는 방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종업원이 친절히 설명을 해 줬지만, 서원은 고개만 끄덕일 뿐 제대로 알아듣질 못해 다른 테이블을 곁눈질하며 어떤 식으로 먹는지 따라 했다.
야채가 잔뜩 들어 있는 그릇에 송어회 몇 점을 올리고, 다진 마늘, 초고추장, 참기름을 뿌렸다. 마지막으로 콩가루를 솔솔 뿌려 주자 근사한 한 상이 완성됐다.
“음……!”
삭삭 비벼서 한 입 크게 무는데, 서원은 수저를 입에 넣자마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회를 오래간만에 먹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송어 회 자체가 맛있는 건지. 쫄깃쫄깃하고 담백하고 너무 맛있었다. 초고추장이랑 콩가루가 포인트가 되어 더 입맛을 돋우는 듯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임신을 해서 날것을 먹어도 될지 걱정이 많았는데, 서원은 언제 그런 걱정을 했냐는 듯 무아지경으로 식사에 집중했다. 원래 이렇게 음식에 환장하는 편도 아니었는데, 요즘은 입맛이 참 극단적이었다.
순식간에 그릇을 싹싹 비워 낸 서원은 조금 아쉬운 눈으로 빈 그릇을 바라봤다. 지금 심정으로는 매운탕까지 먹고 싶었지만,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다음에는 다른 사람이랑 오든지 해야지…….”
여기 진짜 맛집이네. 마을에 아는 사람이 몇 없고 또래도 없어서 같이 올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서원은 아쉬움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혼자 한 끼로 먹기에는 좀 비쌌던 값을 치르고 나오니, 날씨가 선선해져 있었다. 원래 시골이 이런 건지, 여기는 일교차가 유달리 큰 편이었다.
으슬으슬하네……. 이제 집에 돌아가야지.
쌀쌀한 기운에 닭살이 오소소 돋아나 팔을 손으로 쓸며 걸음을 옮겼다. 읍내 수준이었던 번화가를 지나 논두렁을 따라 흙먼지 풀풀 날리는 길을 걷는데, 키가 큰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보였다.
“다 놀았어?”
“…….”
어스름한 불빛 아래, 도겸이 무료한 눈빛으로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가 아직도 이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가지 않았더라도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를 마주하니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련님.”
맛있는 것을 먹고 고양됐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서원이 그대로 발걸음을 멈추자, 도겸이 피우고 있던 담뱃대를 떨어트려 발끝으로 담뱃불을 지지곤 성큼성큼 다가왔다.
넓은 보폭 하나에 좁아지는 거리만큼, 마음이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해졌다.
“왜 사람을 따라와요? 제가 따,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럴 것 같았으니까.”
도겸이 서원의 바로 앞에 마주 서며 대답했다.
그는 평소 담배를 한두 개비만 피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몸에서 매캐한 담배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