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36)

<30화>

제 재정 상태를 걱정해 주는 슬기를 보고 있자니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귀엽기도 했다. 서원이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고 집까지 잘 바래다줬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서원은 시간을 확인한 후, 작게 숨을 내뱉었다.

“노래방이라…….”

노래방 역시 서원이 즐겨 가는 곳은 아니었다. 딱히 노래를 잘 부르는 편도 아니라서, 남의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왠지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오락실에 비해서 가격은 좀 그랬지만, 이 마을에서 시간을 보낼 만한 곳이 노래방 외에는 없을 것 같았다.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오락실도 꽤 괜찮았으니까……. 막상 가 보면 재밌을 수도 있지 않을까.

별로 기대가 되진 않았지만, 서원의 발걸음은 슬기가 알려 준 노래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삼 번 방으로 들어가세요.”

서원이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치자, 직원이 마이크에 씌울 새 커버와 함께 방을 안내했다. 낮이라 그런지 아니면 손님이 없는 노래방인 건지, 손님이라고는 저밖에 없는 것 같았다.

3번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는 방문을 열자마자, 서원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젊은이들을 겨냥한 노래방은 아닌지, 오색빛깔의 꽃무늬 벽지가 눈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노래도 없이 조용히 돌아가고 있는 오색빛깔 조명도 솔직히 봐주기 힘들 정도였다.

“초등학생이 놀러 올 만한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애들이 좋아할 만한 감성은 아닌 것 같았으나, 이 동네에 노래방이라고는 여기밖에 없긴 한 것 같았다.

그래, 인테리어가 뭐가 중요하냐. 노래만 부를 수 있으면 됐지. 서원이 그렇게 생각하며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묵직한 노래방 책자를 들었다.

소파에 앉아 무릎에 책자를 올리고 최신곡부터 확인하는데, 업데이트를 빠릿빠릿하게 하는 편이 아닌지 두 달 전 곡이 마지막이었다.

“부를 게 하나도 없네…….”

나름대로 노래를 자주 듣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는 노래가 몇 없었다. 눈에 익은 노래도 몇몇 있긴 했지만, 그건 또 혼자 부를 만한 노래가 아니었다.

책자로 보기를 포기한 서원은 기계를 이용해 직접 노래를 검색했다. 검색한 노래는 서원이 평소 일할 때 듣는 발라드곡이었다. 딱히 부르고 싶은 노래인 건 아니었지만, 아는 노래가 이런 것밖에 없었다.

‘시작’ 버튼을 누르자마자, 주변이 어두워지더니 구슬픈 전주가 흘러나왔다. 노래가 나오자마자 왠지 선곡을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어차피 혼자인데 못 불러도 상관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든 서원은 양손으로 마이크를 꼭 쥐어 잡으며 입을 열었다.

“사랑이 원래 아픈 건가요오…….”

그저 자주 듣던 노래를 선곡한 것뿐이었는데……. 이제 알았는데, 짝사랑의 애환을 그려낸 노래였다. 평소 일에 집중하면 가사는 잘 안 들리는 편이라 몰랐다.

별다른 생각 없이 부르면 그저 노래를 부르는 것일 테지만, 순간 제 모습이 청승맞게 느껴졌다. 노래 가사와 제 상황이 비슷하지 않나 싶어서. 몰래 한탄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콧잔등이 조금 시큰해졌지만, 서원은 꿋꿋이 노래를 불렀다. 다음 곡도, 다다음 곡도……. 다 아픈 사랑 이야기였다.

* * *

“배고프다…….”

노래방에서 나오니 하늘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저녁때가 되기도 했고 노래를 한창 불러서 그런지. 노래방에서 나오자마자 허기가 졌다. 서원은 아직 부르지도 않은 배를 쓰다듬다가 주변을 돌아봤다.

주변 상가가 그렇듯, 근처에서 파는 음식들 또한 구수하고 얼큰한 음식들 위주였다. 국밥집이나 칼국수, 술집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땅히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임신한 이후로 특정 음식이 아니고서야 먹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집에 가서 간단히 먹고 싶다. 도련님은 가셨으려나…….

어떻게 할지 모르고 미적거리고 있는데, 문득 번쩍거리는 전광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송어…… 횟집?”

원래도 회를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만, 송어회를 먹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글자를 보는 순간 갑자기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이전에 엄마가 콩국수를 해 줬을 때처럼 순간 입맛이 확 돋아났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귀신에 홀린 듯 걸어가던 발을 멈춰 세웠다.

임신 중인데, 회를 먹어도 되나? 병원에서 자극적인 음식이나 술, 담배, 커피를 되도록 피하라는 말을 듣긴 했는데 날것을 먹으면 안 된다고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괜히 먹었다가 탈이라도 나면 어쩌지 걱정되긴 했다. 시골이라 병원을 가려면 꽤 멀리 나가야 하기도 했고, 혹 이번 일로 아이에게 영향을 끼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됐다.

그렇지만…… 지금 제 눈에는 너무나도 맛있어 보였다. 임신하고 난 이후로 입맛이 뚝 떨어졌기 때문에 이런 느낌을 받는 건 흔치 않았다.

“한 번쯤은 괜찮겠지…….”

임신한 이후, 매일 같이 마시던 커피를 끊은 것만으로도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여태까지 참은 제게 한 번의 포상은 괜찮지 않을까?

목울대를 울렁이며 자기 합리화를 끝낸 서원은, 끝내 송어 횟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송어 횟집의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오자,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밝은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빈자리로 안내받은 서원은 안내판을 받으며, 주변을 휘휘 돌아봤다. 저녁때가 다 되어 가서 그런지 맛집인 건지 꽤 손님이 있었다. 대부분 어르신이었는데 벌써 술판을 까고 무르익은 곳들도 더러 보였다.

서원은 평소 술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회에 소주가 어울린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아무리 양보해도 그건 안 되겠지. 아이에게 해가 가면 안 되니까. 서원은 씁쓸함을 삼키며 메뉴판을 종업원에게 돌려줬다.

“송어 회 한 접시만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종업원이 돌아가고 멍하니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문득 술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성인이 된 이후의 기억은 대부분 도겸과 함께인 탓에, 처음으로 취할 때까지 마셔 본 것도 그와 함께였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이리저리 술 마실 기회가 있었지만, 술 자체를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라서 취할 때까지 마셔 본 적이 없었었다. 보통 술자리가 밤늦게 잡히는데, 당시에는 저녁에 도겸을 만나 페로몬 해소를 도왔으니 그런 모임에 참석할 시간이 없기도 했다.

그날도 모임 대신 도겸을 만나러 호텔로 향했었는데, 웬일인지 도겸이 잠자리보다도 먼저 와인을 내밀었다.

‘와인을 받아 왔는데, 마셔 볼래?’

도겸은 그에게 잘 보일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종종 뭔가를 선물받곤 했다. 정작 그에게는 딱히 감흥 없는 것들이라서 서원에게 떠밀듯 줄 때가 많았다.

대부분 집에 가서 혼자 먹으라든지 하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같이 먹자는 뉘앙스로 말했었다.

처음으로 그와 술을 함께하는 것도 아니었고, 테이블 위엔 안주로 먹을 치즈와 크래커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미 준비한 걸 거절하기도 뭣했고, 무엇보다도 늘 그랬듯 그가 제게 권하는 것들은 다 맛있었다. 어쩐지 이번에도 제 취향에 맞을 것 같은 느낌에, 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통창 옆에 있는 테이블에 앉자, 도겸이 준비해 둔 잔에 와인을 따라줬다. 스파클링 화이트 와인인지 금빛 액체 속에서 보글보글 기체가 조금씩 올라오는 게 보였다.

도겸이 먼저 잔을 들기에 같이 홀짝였는데, 입에 머금고 있던 것을 넘기는 순간 서원은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하나도 안 쓰네요?’

‘달콤한 와인이라고 하더라고.’

도겸은 대답하면서도, 자신은 너무 달아서 별로라는 듯 말했다. 그래도 아예 못 먹을 정도는 아닌지, 그는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을 우아하게 썰어 먹으며 와인을 홀짝거렸다.

서원은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특유의 쓴맛이 별로 느껴지지 않아서 맛있었다. 여태까지 먹어 본 맥주나 소주, 그리고 와인 중에서도 단연코 제일 입맛에 맞았다.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데, 입술만 축이듯 살짝 와인을 삼킨 도겸이 갑자기 뜬금없는 것을 물어왔다.

‘대학교는, 다닐 만해?’

‘아……, 네. 신경 써 주신 덕분에요.’

서원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가 신경 써 준 덕분에 일하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됐다.

원래 페로몬 체증을 풀어주는 파트너는 자는 시간 빼고 온종일 붙어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학생인 점을 고려해서 저녁에만 만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그리고 비교적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학교에 들어갔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원이 감당하기에는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원래는 입학 후에 편의점이든 PC방이든 아르바이트를 병행할 생각이었는데, 도겸이 급여를 넉넉하게 준 덕분에 돈 걱정 없이 다닐 수 있었다.

이것도 일하고 받는 거긴 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과 몸을 겹치는 일이라 그런지 크게 정신적으로 힘들진 않았다. 가끔 쓸데없는 기대를 하게 된다는 것 빼고는.

서원이 속에서 피어오르는 씁쓸함을 삼키는데, 대답을 들은 도겸이 사실은 다른 용건이 있었다는 듯 다른 걸 마저 물어왔다.

‘너한테 자꾸 연락하던, 선배란 사람이랑도 잘 지내고?’

‘선배요?’

갑자기 웬 선배? 학교 다니는 이야기를 세세하게 나누는 편은 아닌지라, 동기나 선배에 대해 아는 게 없을 텐데…….

누굴 말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는데, 문득 저번에 도겸과 잠자리를 가질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날 잠자리를 이어 가는 동안 자꾸만 서원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는데, 그게 방해가 됐는지 도겸이 짜증스럽게 제 핸드폰을 본 적이 있었다.

같은 학과의 윤철 선배로부터 온 메시지였는데, 같은 동아리를 들면서 친해진 선배였다. 매번 술자리에 빠져서 아쉽다고, 다음에 꼭 같이 마시자는 메시지를 보냈던 거였는데……. 서원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건만, 도겸은 그게 줄곧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아…… 윤철 선배요? 네, 근데 갑자기 유학 간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 자주 못 볼 것 같아요.’

‘유학? 잘됐네. 한국에만 있는 것보다 해외 나가는 게 배움의 폭은 클 테니까.’

‘그러게요. 유학 생각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못 들었는데……. 별일이 다 있어요.’

객관적으로 잘된 일이긴 하지만, 서원은 솔직히…… 조금 서운했다.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지만 유학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떠난다고 하니까.

게다가 서원은 유학에 대한 그다지 좋지 않은 인식이 있었다. 도련님과는 우연히 다시 연이 닿았지만, 윤철 선배와는 그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입 안이 썼다. 서원은 괜히 잔을 들고 벌컥벌컥 남은 와인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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