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서원은 줄곧 그에게서 거짓말을 못 한다는 말을 들어왔기에 긴장됐지만,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고 능청을 떨었다.
“몇 번이고 구애하니까 만나주신다고 하더라고요.”
“네가 구애했다고? 천하의 윤서원이?”
도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놀란 어투로 물었다. 마치 윤서원은 구애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도겸의 반응에 서원은 왠지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6년이라는 기간 동안 함께하면서 그는 제가 해왔던 모든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서.
하기야, 그러니까 오랜 시간 저를 파트너로 둔 거였겠지만. 만일 도겸이 제 마음을 알았더라면 그리 오랜 시간 곁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너도 다른 오메가와 똑같다며 당장 내쫓았겠지.
차라리 쫓겨나는 게 나았으려나. 그러면 6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에게 기대하는 일도, 이렇게 몰래 임신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서원은 조금 씁쓸함을 느끼며 그에게 대꾸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죠. 안 그래요?”
“…….”
서원은 도겸이 아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따라 하며 선을 그었다.
그에 어이가 없다는 듯 도겸의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서원은 애써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저 정말 그 사람이랑 잘 되고 싶어요. 그러니까 방해하지도 말고, 따라오지 마세요.”
“내 두 눈으로 봐야 믿는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
“싫어요. 도련님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못 만나요.”
“왜?”
“전 직장 상사가 데이트에 따라와서 지켜보고 있으면 집중이 되겠어요? 다섯 살 어린 전 직원이 애인 사귀는 거 방해하려고 하는 거 아니면, 따라오지 마세요.”
“…….”
서원은 진짜로 제가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한다고 생각하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실제로 데이트에 쫓아오는 전 직장 상사는 정말 꼴불견일 테니까.
도겸을 이런 식으로 단호히 잘라내는 것은 늘 어렵고 마음이 찔렸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을 남자였다.
서원이 제가 말해 놓고선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쿵쿵거리는 심장을 다스리는데, 가만히 듣던 도겸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럼 나는?”
“뭐가요?”
“나는 이렇게 혼자 두겠다고?”
“그럼요?”
“하……, 난 아주 찬 밥 신세네.”
도겸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당하고 허무하다는 반응이었다.
서원은 그런 도겸의 반응을 조금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그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일반적으로 매주 감시하러 오는 사람을 환대라도 하길 바랐던 걸까?
황당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직접 운전까지 했다고 하고, 감시하러 왔대도 제가 아직 그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한 탓에 신경 쓰이긴 했다.
서원은 힐끗힐끗 도겸을 바라보다, 나름의 배려를 해 줬다.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쉬시다 집에 가셔도 되고요.”
“……언제 들어올 건데.”
도겸은 서원이 늦지 않으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할 것처럼 물었다.
그의 물음에 서원은 지갑을 챙기려다 말고 멈칫했다. 여태까지 기다리는 건 늘 제 몫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뒤바뀌었다는 게 새삼스럽게 실감 났다.
기다리는 사람은 외롭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쳤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더더욱 그랬다.
“글쎄요……. 늦을 것 같으니까 기다리지 마세요.”
그러니 기다리지 말라고 하는 게 나름 최대한의 배려였다.
도겸에게는 그게 더 쌀쌀맞고 차가운 대답으로 들리는 눈치였지만, 나름 경험에 기반한 배려였다.
서원은 가방에 지갑과 열쇠 등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현관문 앞에서 도겸을 돌아봤다.
“……그럼 저 갑니다?”
“…….”
도겸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가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시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에 왠지 발걸음이 무거워졌지만, 서원은 꾹 마음을 잘라내고 집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빠져나와 한참을 걷는데, 마치 뒤에서 뭔가가 따라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따라오는 걸까? 서원이 불안감을 느끼고 휙 뒤를 돌아봤으나, 허허벌판에 저를 쫓아오는 건 없었다. 도겸도 없었고, 그의 차는 집 앞에 얌전히 주차된 채였다.
그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따라오고도 남을 사람인데. 전 직장 상사 발언에 다섯 살 어린 전 직원의 연애를 방해하지 말라는 말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조금 충격받은 얼굴이긴 했는데…….
데이트하러 간다고 했을 때의 반응과 나간다고 했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던 도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아른했으나, 서원은 가방을 꽉 쥐어 잡고 걸음을 빨리했다.
향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와의 인연을 끊어내야 한다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 * *
“후우, 어딜 가지…….”
덩그러니 길에 혼자 남은 서원이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목적지도, 만날 사람도 없이 무작정 걸어 나온 거라서 어디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조금 막막했다.
늦게 들어올 거라고 호언장담했고, 도겸이 언제까지 제집에 있을지도 모르니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제집인데도 집에서 쫓겨난 사람처럼 방황하다 보니, 어느새 번화가까지 나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시골 한구석이었기에 번화가라고 한들 겨우 읍내 수준이었다. 청년이나 아이들이 별로 없는 탓에 즐길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괜히 오기를 부려서 나온 걸까……. 막막하게 거리를 터덜터덜 걷는데, 곧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간판에 오락실이라고 적혀 있는 게 보였다.
서원은 오락실에서 놀아본 추억 같은 건 없었다. 어렸을 적 지내던 도겸의 저택 근처에는 그런 오락실 같은 게 하나도 없기도 했고, 서원도 그다지 게임을 좋아하는 성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치려는데, 순간 오락실 안에 앉아 있는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슬기야.”
“어? 선생님!”
서원이 오락실 안으로 들어가 게임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여자아이의 어깨를 톡 쳤다. 그러자 슬기가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서원을 돌아봤다.
서원은 반가움에 아는 척을 한 것이었지만, 아이로선 노는 곳에서 선생님을 만난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닌 듯했다. 꼭 해선 안 되는 일을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가시방석에 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찔리는 게 있는 얼굴이군. 서원은 뭔지 알 것 같아, 일부러 슬기를 놀렸다.
“숙제는 다 하고 노는 거야?”
“그건…… 아직, 못 하긴 했는데 다음 시간까지 할 수 있어요…….”
“선생님이 믿어도 되지?”
“네? 네…….”
슬기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대답했다. 썩 믿음직스럽지 못한 뉘앙스였다.
뭐, 그렇다고 해도 원래 저 나이대의 숙제란 몰아서 하는 거니까 이해됐다. 이렇게 놀 거리 하나 없는 곳에서, 겨우 오락실에서 노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할 만큼 매정하지도 못했고.
서원이 혼내지도 않고 그저 주변을 기웃거리기만 하자, 슬기는 다시금 게임에 집중하려다 문득 궁금하다는 듯 서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락실엔 왜 오셨어요?”
“어……? 그냥…… 심심해서.”
딱히 오락실이라서 온 건 아니고, 슬기가 보여서 들어온 것뿐이었다. 딱히 할 것도 없고, 어떤 재미로 하는 건가 구경 좀 하려고 하는 건데…….
서원이 누가 봐도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대답하자, 슬기가 선생님에 대한 경계를 사르르 풀었다.
“그럼 선생님도 이거 해 보실래요?”
“응? 내가……?”
“네! 이거 2P도 가능한데,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옆에 앉으세요.”
슬기는 그렇게 말하더니, 목욕탕 의자처럼 작은 것을 끌어다 제 옆에 놓았다. 애들이나 앉을 법하지, 제가 앉았다간 부서질 것 같은 의자였다.
그렇기에 앉아도 되는 건가 좀 걱정이 됐지만, “빨리요!”하고 재촉하는 슬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빼기도 그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겠다. 서원이 작게 헛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자, 슬기가 잔뜩 신이 나서는 게임을 설명해 줬다.
플레이하는 동안, 서원은 솔직히 이런 게 왜 재밌다고 하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한껏 들뜬 슬기의 모습이 귀여워서 장단을 맞춰 줬다.
* * *
“와아, 진짜 재밌었어요! 선생님 게임 진짜 잘하시네요!”
오락실을 나오면서, 슬기가 격앙된 목소리로 서원에게 말했다.
이리저리 훈수를 받아 가며 몇 번이나 했는지……. 슬기가 한 번만 더 하면 깰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연스럽게 돈을 내 달라고 해서 도대체 얼마를 쓴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큰돈을 쓴 것도 아니고, 나름 재미있게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했다. 칭찬까지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서원은 조금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실수 많이 한 것 같은데. 보스전에서 죽었잖아.”
“보스전까지 가는 것만 해도 엄청 잘하는 거예요! 저희 오빠랑 했을 때 빼고는 보스전 가 본 적도, 깨 본 적도 없거든요.”
“오빠?”
“네. 저번에 말했던 서울에 사는 오빠요. 프로게이머거든요. 그래서 게임 진짜 잘해요!”
“아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굳이 오빠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면 오빠를 굉장히 좋아하는 아이 같았다.
서원의 친구들을 떠올리면 형제, 자매, 남매끼리 사이가 좋은 경우도 그리 흔치 않던데…….
하긴,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 서원도 도겸을 친형처럼 생각하고 좋아할 때도 있긴 했다.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친형으로 보기 어렵지만, 그때는 같은 집에서 살기도 했고 하루의 가장 긴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으니까.
그때도 독재자 같은 성향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가 귀여웠다.
좋았던 추억을 떠올리니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상황은 참담해도, 그때를 생각하면 모든 걸 다 가진 도련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잠시 생각을 이어 가고 있는데, 슬기가 “아!” 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집에 안 들어가세요? 이쪽 방향 아니잖아요.”
“응. 슬기도 집에 데려다주고, 그리고…… 더 놀다 가려고.”
놀다 간다고 하는 말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아직 해도 중천에 떠 있어서 집으로 돌아가기 뭣했다. 도겸에게 좀 집에서 쉬다가 집에 가라고 하긴 했지만, 안 갔을 수도 있으니까.
서원이 그럴 의도로 말하자, 슬기가 고심하는 얼굴을 했다.
“놀 거 없는데……. 아! 저기에 노래방 있는 거 아세요? 그것도 재밌어요. 좀 비싸긴 한데, 돈 있으면 애들이랑 돈 모아서 종종 가요. 추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