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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136)

<28화>

궁금한 게 있다고 하기에, 당연히 방금 푼 학습지에 관련된 물음일 줄 알았다. 그런데 뭐……? 빚쟁이?

저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놀랍지만, 저게 과연 초등학생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요즘 애들은 그런 단어도 알고 있나? 아니, 그것보다…….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어?”

“아줌마들이 그러던데요? 선생님, 그래서 갑자기 여기 온 거라고.”

“…….”

저번에 옆집 아주머니가 서원을 그런 식으로 봤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마을에 그런 소문까지 퍼졌을 줄이야.

분명히 그런 거 아니라고 해명을 했건만, 배 비서와 도겸이 번갈아 가며 저를 찾아오니 이상하게 본 사람이 많아진 모양이다.

그런 의심을 살 만한 모습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애들 앞에서는 말조심 좀 해 주시지……. 서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 거.”

“그럼 선생님 집에서 나오던 그 사람은 뭐예요?”

“……혹시 봤어?”

“네. 선생님보다 훨씬 잘생긴, 완전 연예인 같은 사람이 선생님 집에서 나오던데요? 타던 차도 번쩍거리고 멋있었어요!”

“그래……?”

그냥 어디서 주워듣고 온 줄만 알았는데, 도겸을 두 눈으로 보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를 것처럼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보는 눈은 정확하네……. 어려도 도겸이 특출나게 잘생겼다는 것과 그가 타고 다니는 차가 좋은 차라는 건 보이는 모양이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사람이야. 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왔더니 다시 복귀하라고 해서.”

“어? 그럼 왜 안 돌아가요? 서울이 여기보다 훨씬 좋잖아요!”

“서울 가 봤어?”

“가 봤어요. 저희 오빠가 서울에서 살아서 몇 번 가 봤는데 정말 좋았어요!”

“그래? 오빠가 서울에 혼자 살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나 보다.”

“네. 음, 저랑 몇 살 차이지? 선생님이랑 비슷할 것 같은데……. 아니! 선생님, 지금 말 돌리는 거죠?”

슬기는 서원의 물음에 대답하다가, 주제가 넘어갈 뻔했다며 버럭 언성을 높였다. 하여간, 눈치도 빨랐다.

“그 사람 돈 엄청 많고 착해 보이던데, 왜 안 가요?”

도겸은 누가 봐도 한 성격 할 것처럼 생겼기 때문에 착해 보인다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보다는 서울로 돌아가 그와 일하는 게 더 좋지 않겠냐는 물음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굳이 도겸을 만나는 일을 하지 않더라도 서울에 가면 이곳보다 일자리도 훨씬 많고 돈도 더 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를 피하려고 온 거니까. 도겸이 찾아오는 바람에 말짱 도루묵이 된 감이 있긴 해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시골로 내려온 척을 했으니 서울로 다시 올라갈 수도 없었다.

“잠깐 사정이 있어서 여기서 지내기로 했거든. 동네도 마음에 들고…….”

“선생님 취향 특이하다. 서울에 맛있는 것도 많이 팔고 좋던데.”

저 나이대에는 그냥 맛있는 걸 많이 팔면 좋은 동네인 걸까? 너무 단순한 이유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면 자신도 이 마을에 정착한 이후 프랜차이즈 카페가 없어 디카페인 커피를 못 마시는 게 아쉬웠었다. 여기엔 그 흔한 배달 음식도 손에 꼽았으니 그렇게 느낄 만했다.

서원은 픽 웃다가, 학습지 마지막 문제에 동그라미를 크게 그리곤 슬기에게 말했다.

“채점 다 했다. 이제 공부하자.”

“아……. 벌써요? 좀 더 놀아요.”

서원이 이만 수업에 집중하자는 말을 하자, 슬기가 한껏 아쉬운 얼굴을 했다.

이제 보니, 공부하기 싫어서 괜히 다른 소리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께 괜히 첫사랑을 물어보는 것처럼 별 쓸데없는 주제를 꺼내는 거지.

요즘 애들은 진짜 똑똑하다니까……. 흥미로움으로 가득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지루함으로 바뀌는 것을 보며, 서원은 틀린 부분의 공식을 설명하는 것에 집중했다.

* * *

“윤서원, 문 열어.”

서원은 이제 주말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주말이 되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도겸이 또 서원의 집을 찾아왔다.

서원은 정말로 그를 무시하고 싶었다. 그를 우연히라도 마주칠까 봐 계획에도 없던 시골 마을로 내려온 거건만……. 매주 찾아올 줄 알았다면 시골이 아니라 몸 편한 서울에 있었을 거다.

비싼 세단을 끌고 오는 데다 옷차림새도, 그리고 이 바닥에서는 흔치 않은 훌륭한 외모 탓에 시선을 끄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며칠 전에는 슬기에게도 빚쟁이들한테 쫓기느라 이 마을에 정착한 거냐는 물음까지 들었기에, 마을에 더 안 좋은 소문을 만들까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는 사이 쿵쿵쿵, 하고 헐거운 대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참을성이 없기는. 서원은 한숨을 내뱉으며 대문을 열어줬다.

“하……, 제발. 조용히 하세요.”

“이렇게 안 하면 문을 안 열어 주잖아.”

서원이 문을 열어 주며 한소리 하자, 도겸이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여 낮은 대문을 통과해 마당까지 진입했다. 제집 들락날락하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서원은 그런 그를 어이없게 바라보며 그 뒤를 졸졸 쫓았다.

“바쁘지도 않으십니까? 제가 봐 온 도련님은 이렇게 한가하지 않았는데요.”

“이것도 내 업무 중 하나야. 업무 줄여 줄 생각이 있으면 얼른 인정하든가, 아니면 서울로 좀 올라오지 그래?”

“이게 무슨 업무라고…….”

“이거.”

서원이 저를 찾아오는 게 무슨 업무냐며 제멋대로 하는 거 아니냐고 따지려고 하자, 도겸이 기다렸다는 듯이 뭔가를 서원의 눈앞에 내밀었다.

계약서였다. 종이에는 저번에 도겸과 옥신각신하며 거래했던 내용이 훨씬 더 깔끔하고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거래했으니까 확인해야지.”

“…….”

도겸의 대답에 서원은 황당함에 숨을 크게 내뱉었다. 안 그래도 뻔뻔하던 그는 거래했다는 이유로 한층 더 뻔뻔해져 있었다.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받아들이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파트너를 그만둔 저를 찾아올 때부터 그답지 않았는데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원래 안하무인에 뻔뻔한 사람인 건 알았지만, 자존심은 세서 아무리 아쉬워도 이렇게 붙잡을 작자가 아닌데…….

도겸을 향한 마음을 완전히 단념하지는 못했기에 그를 볼 때마다 좋으면서도 난감했다. 서원은 그를 타박하기보다는 다른 이유를 들어 그만 좀 오라고 했다.

“운전 기사님도 이렇게 시골까지 운전하시는 거 힘들어요.”

“오늘 휴가야.”

“어……? 그럼 다른 분이 운전하셨어요? 배 비서님이 하셨나?”

주차된 검은 세단을 본 참이었다. 서원이 그럼 어떻게 찾아온 거냐고 의아하게 묻자 도겸이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니. 오늘은 나 혼자.”

“……혼자 오셨다고요?”

다른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상대가 도겸이라 믿을 수가 없었다.

운전을 못 하거나 무서워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일분일초가 귀한 사람이었다. 그와 같이 차를 타게 될 때면 그는 늘 손에 태블릿이나 서류를 들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운전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이유는 단순히 귀찮거나 피곤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 그래도 그가 저를 찾아오는 게 몇 배 더 부담스러워졌다.

“오셔서 하는 것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까지…….”

“보고 싶은 사람이 우물 파야지.”

“…….”

도겸은 농담을 하는 건지 모를 말을 하며 슬며시 웃었다.

보고 싶은 사람……. 그가 저를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서원은 애써 기대감을 삼키고 애써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마시고요. 어떻게 해야 안 오실 겁니까?”

“네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면.”

“……어차피 믿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서원이 툴툴거렸으나, 도겸은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너부터 믿을 만한 행동을 보이라는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믿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집에만 있는 사람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할 사람도 흔치 않을 테고.

믿어 줄 만한 행동이라도 해야 하나? 그러고 보면 보여 주기식이라도 집을 나가는 게 필요해 보였다. 이 시골에서도 다른 사람과 교류를 한다는 느낌을 줘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도겸과 한집에 있으면 불편하기도 하고, 일에 집중도 안 되니까. 무엇보다…… 저번에 그가 제게 키스하려고 했을 때 엄청나게 흔들렸으니, 만일 그런 일이 또 생긴다면 그땐 참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다른 날이라면 그를 속일 엄두도 나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도겸 혼자 온 날이었다. 저를 미행한다고 하더라도 한 명만 따돌리면 되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오늘 시도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원은 방으로 들어가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뒤, 신발장에 나와 검은 브랜드 로고가 그려진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 서원이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을 보고 소파에 앉아 있던 도겸이 은근슬쩍 물었다.

“어디 가?”

“약속 있어요.”

“약속? 설마, 데이트? 그 인간 만나러 가? 짝사랑이라면서?”

그저 나갔다 오겠다고 한 것뿐이건만, 도겸은 혼자 오해하여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이나 말투는 그렇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빠른 행동이 조금 동요한 것처럼 보였다.

오해를 끌어내기 위해 한 행동은 맞았지만, 생각한 것보다 반응이 격렬하고 즉각적이었다.

어쩌면 오늘 그를 단념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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