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흣…….”
숨 막힐 정도로 쏟아지는 알파 페로몬에 순간 머리가 몽롱해졌다.
안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극적이었다. 그런데 그의 페로몬까지 제 주위를 감싸니 공기마저 뜨겁게 느껴졌다.
눈앞의 남자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고, 가까이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도, 수려하게 이어진 콧날도, 촉촉해 보이는 입술도 뭐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맞추고, 침대로 향하고 싶었다. 그를 내 알파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들었다.
그렇지만 서원은 눈을 질끈 감으며 욕구를 감내했다. 그런다고 도겸이 제 알파가 되는 게 아니므로. 그저 이전처럼 페로몬을 해소할 열성 오메가 파트너가 될 뿐이니까.
“……죄송합니다.”
“…….”
“페로몬 좀, 거둬 주시겠습니까. 힘든데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서원이 그를 가까이서 보는 게 버거워 시선을 돌리는데, 순간 귓바퀴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도겸이 송곳니를 세우고 귓바퀴를 문 것이었다.
“아!”
“다음 주가 되기 전까지는 마음을 바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따끔한 감각에 서원이 억울하게 도겸을 바라봤으나, 그는 제 할 말만 하더니 그대로 나가 버렸다.
스트레칭하러 나가는 게 아니라, 아예 대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현관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알파 페로몬이 옅어졌다. 여전히 빠져나가지 못한 페로몬이 남긴 했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서원은 왜인지 조금 아쉬운 감정을 느끼며, 몸을 조금 굽히고 대문을 바라봤다.
페로몬 체증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한 건…… 연기였던 걸까, 아니면 그새 괜찮아진 걸까?
일주일에 질리지도 않고 몸을 겹치던 그였기에 정말로 페로몬이 쌓일 대로 쌓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키스 정도는 해 줄 걸 그랬나 싶었다.
아무리 그를 밀어내려고 해도 마음이 그대로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 * *
“서울로 돌아가지.”
“네.”
오만상을 한 도겸이 차 뒷좌석에 올라타며 말하자, 배 비서가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워낙 좋은 차라 평소에는 흔들림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포장되지도 않는 길을 차 타고 가자니 어쩔 수 없이 차체가 조금씩 흔들렸다. 작은 흔들림이 안 그래도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도겸의 신경을 건드렸다.
뭐 이런 촌구석에 틀어박혀서 사는 건지. 하여간 요즘의 윤서원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딱 하나. 페로몬을 빼고는.
도겸이 작게 혀를 차는데, 운전하던 배 비서가 힐끗 도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설득은, 하셨습니까?”
“……아니.”
도겸은 대답하다가, 머릿속에 떠오른 서원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며칠 전에 배 비서가 윤서원을 설득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기에, 배 비서의 능력이 이렇게 밑바닥이었나 의심했었다.
고작 윤서원 하나를 못 데려오다니. 헛짓거리만 하다 돌아온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 직접 그의 거처까지 내려가게 된 거였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완전히 무시당할 줄이야. 이 나이가 되도록 이렇게 면박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쯧, 어이가 없군.”
도겸은 혀를 차며 눈을 감았다가, 서원의 집에서 나오기 직전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렸다.
마당에 나가려던 순간 깨질 듯한 두통이 와서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러자 제 몸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오메가를 대할 땐 반응이 오지 않기에 고자라도 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윤서원이 아니면 반응하지 않는 몸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요망한 윤서원. 사실 서원은 성실히 계약을 이행한 것밖에 없건만, 도겸은 이 일은 제가 아니라 윤서원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탓을 돌렸다.
그래서 비겁하지만 알파 페로몬을 쏟아냈다. 페로몬 샤워를 시키듯, 내 오메가라고 각인을 시키듯 쏟아냈다.
분명 서원도 그에 반응하듯 침대에 함께 있었을 때처럼 혼몽하게 눈을 뜨고 저를 바라봤지만, 눈빛과 반대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냉담하기만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헛소리는 믿기지 않으니,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간의 잠자리가 문제였던 걸까? 늘 제멋대로 해 오긴 했지만, 오 년 동안 윤서원은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관계를 맺을 때마다 사정 횟수도 저보다 많은 편이었으니 잠자리가 불만족스러웠던 건 아닐 텐데…….
도겸이 고심하느라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우자, 차 안의 페로몬 흐름이 뒤바뀌었다. 배 비서가 그의 심기를 알아채곤 조금 헛기침하며 물었다.
“크흠, 어떻게 할까요? 아무래도 서원 씨가 복귀하는 건 힘들어 보이는데, 다시 다른 오메가를 알아볼까요?”
“됐어. 그보다,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지?”
“저번과 크게 다를 건 없습니다. 여태까지 저희가 지급했던 봉급 대부분은 윤서원 씨 어머님의 거처를 구하느라 거의 다 사용했고, 지금 어머님이 무릎 치료를 받는 중이라 꾸준히 들어가는 돈도 있다고 합니다.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편은 아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도 그 조건을 거절한다고?”
“네. 돈에 대한 욕심이 아예 없어 보입니다. 파트너로 있을 때도 윤서원 씨가 자신을 위한 걸 산 적은 몇 번 없잖습니까.”
“…….”
배 비서의 말에 도겸이 미간을 좁히며 턱을 쓸었다. 맞는 말이었다. 눈에 띄게 큰 지출이라고는 어머니에게 집을 사 드렸던 것과 어머니의 무릎 수술비밖에 없었다.
처음엔 돈에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수중에 막대한 돈이 들어오면 명품이나 사치에 눈이 돌아가기 마련인데, 윤서원은 그러지 않았다. 가만히 두고 있으면 질 좋지 않은 옷만 입어 대서, 이따금 계열사에서 선물을 받았다고, 저는 입을 것 같지 않다며 서원에게 주곤 했다. 그렇게 선물해도 아껴 입느라 잘 입지 않았다.
돈이 부족한 게 아닌데 어떻게 저리 검소한가 신기하면서도, 그가 저와의 페로몬 파트너를 지속했던 걸 생각하면 의아했다.
제가 윤서원에게 파트너를 제안한 건 맞지만, 그럼 서원은 굳이 왜 파트너 관계를 이어 갔던 거지?
뭐, 미친 듯이 저축만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안 쓰는 것까지는 이해하더라도……. 세상에 돈 준다는 걸 싫어할 사람이 있나?
그렇게 좋아하는 저축 펑펑 하게 해 줄 테니 다시 복귀하라는 건데, 통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통한다고 생각한 가장 쉬운 방법이 먹히질 않으니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도겸이 불편한 기색을 풀풀 풍기자, 배 비서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어떤 조건을 제안해도 서류조차 읽어보질 않으시는데…… 역시 다른 오메가가…….”
“됐어, 내가 설득할 거니까. 윤서원한테 사람 더 붙여 놓고 특이한 행동 하면 바로 보고하라고 해.”
“……네.”
도겸이 의견을 굽히지 않자, 배 비서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배 비서가 룸미러로 도겸을 힐끗힐끗 보는 사이, 그는 다시금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왜 그런 거지.
도겸은 갑자기 넥타이가 목을 조르는 듯하여, 거칠게 타이 끈을 조정했다.
서원에게 느꼈던 감정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똑같았다. 어려서 그런지 자주 눈길이 가고 걱정도 되고 좀 예쁜, 그런 아는 동생.
유학 갔을 때도 몇 번이고 생각나긴 했지만, 순전히 귀여워서였다. 털 수북하게 났을 것 같은 동생들과 달리, 혼자 보송보송하게 생겨서 저만 보면 얼굴을 붉히고 좋아하는 아이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저택을 떠난다고 하기에 녀석을 못 보게 된다는 게 조금 아쉬웠고……. 파트너를 제안했던 건 순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파트너를 하면 서원을 곁에 둘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날은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유달리 페로몬이 쌓인 채였다. 페로몬을 어서 빨리 풀어내고 싶었다.
그렇게 육 년이나 파트너를 이어왔으니…….
“……몸정인가.”
도겸은 저만 들리도록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서원을 사랑하는 건 아닐 테니, 결론은 몸정밖에 없었다. 그래서 몸정이 무섭다는 말도 있는 거겠지.
서원이 아닌 다른 오메가를 안을 수 있게 되는 게 가장 좋겠지만, 금방 해결될 문제처럼 보이지 않았다.
도겸은 어떻게 해서든 서원을 이 마음에 들지 않는 촌구석에서 빼내 서울로, 그리고 제 곁으로 오게 하겠다며 다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 * *
서원은 그날 이후, 종종 도겸과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제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키스해 달라고 유혹하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그 탓에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실수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늘 감정적으로나 지위로나 을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도겸이 자신에게 그렇게 매달리듯 군 것이 처음이었다. 매달렸다고 보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긴 했지만, 그런 상황이 낯설고 자극적이라 자칫하면 휘말릴 뻔했다. 게다가 페로몬까지 쓰고……. 다시 생각해도 아찔했다.
그의 곁에 있으면 계속 이런 식으로 휘말릴 것 같은데……. 충동적으로 거래까지 받아들이는 바람에 도겸이 집에 찾아와도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서원은 분명 그가 더는 저를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거래에 조건을 단 것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불공정한 계약이었다. 그가 끝까지 못 믿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않나.
“하아아…….”
다행히 도겸은 제가 임신했다는 건 모르는 눈치였지만, 곁에 있다 보면 알아챌지도 모른다.
열성 오메가인데다가 원래 마른 편이라 배가 눈에 보일 만큼 부풀어 오르진 않았지만, 커피를 끊은 것도 그렇고, 시간이 갈수록 입덧도 심해지고 있고, 배가 더부룩한 느낌에 조금 힘들어하는 것도 잦아졌고…….
결정적으로 도겸을 속일 방법이 필요한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미간을 좁히며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낭랑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생님. 선생님?”
“어, 어?”
“다 풀었는데요.”
서원이 퍼뜩 정신을 차리자, 옆자리에서 학습지를 풀던 여자아이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새로 과외를 시작한 아이였다. 이슬기라는 이름의 초등학생 여자아이인데, 보면 빨간 체리가 생각날 정도로 통통 튀게 생긴 아이였다.
서원이 도겸의 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문제를 다 풀었는지 아이의 작은 손에 들린 학습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낙서처럼 적혀 있었다.
“아, 미안……. 선생님이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보자.”
또 도겸 생각을 하느라 실수하고 말았다. 서원은 부랴부랴 슬기에게서 학습지를 받고, 오른손에 빨간 색연필을 들었다.
시골로 내려와 소일거리를 하는 것 중에 가장 부담이 없고 재미도 있기까지 한 일은 이것밖에 없었다. 해이해졌다며 잘리면 안 되니 바짝 집중해야겠다.
서원이 눈을 또렷하게 뜨고 하나하나 채점을 하는데, 평소에는 뭐가 틀렸나 학습지만 쳐다보던 슬기가 오늘은 이상하게 서원을 쳐다봤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서원이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슬기가 우물쭈물하다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응? 뭔데?”
“빚쟁이들한테 쫓기다가 서울에서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게 사실이에요?”
“……뭐?”
예상치도 못한 물음에 서원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