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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136)

<26화>

긴 대화가 끝나고, 서원은 숨을 색색 내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원하는 대로 거래까지 했는데도 도겸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왜 안 가지? 할 말 끝났으니 이만 돌아갈 때도 되지 않았나? 다음 주에 계약서를 가져오면 될 텐데.

서원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는데, 도겸이 뒤늦게 “아.”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일 봐.”

“……네?”

“평소처럼 지내라고. 난 없는 사람 취급하고.”

“아, 아니……. 안 돌아가세요?”

“거래했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내려면 널 지켜봐야 할 거 아니야.”

“…….”

그런 거래였었나? 합법적으로 감시하게 하는 거래? 어쩐지 덫에 걸려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평소처럼 일 보라는 눈치였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저 혼자만 있던 좁은 공간에 저보다 커다란 사람이 들어와 꿰차고 있는데 신경이 안 쓰일 리가…….

무엇보다도 그에게서 은은하게 퍼져나오는 알파 페로몬의 존재감은 커다랬다. 그에게 열성 오메가의 페로몬 따위 무시할 수 있는 게 되는지 몰라도, 서원에게 그는 아니었다.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서원은 더 그와 입씨름할 기력이 없었다. 게다가 제 짝인 알파의 페로몬을 맡으면 아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하니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기도 하고.

“하…….”

불만스러운 눈으로 도겸을 바라보던 서원은 책상에 놓여 있던 얇은 테의 안경을 쓰고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오늘 들어온 외주가 있나 메일함을 살폈다. 지금 당장 급한 건이 없어 안도하는데, 도겸이 소파에 앉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시력 안 좋았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아……. 가끔 씁니다. 많이 나쁜 편은 아니라서요.”

“나랑 있을 땐 한 번도 안 썼잖아.”

“그땐 읽을거리가 없었나 보죠.”

“…….”

뭉뚱그려 대답한 말에 도겸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은, 도겸과 만나는 날에는 늘 렌즈를 착용했다. 그와 만나고 하는 일이란 먹고 자고 페로몬을 방출시키는 일밖에 없으니 딱히 시력이 좋아야 할 일은 없었지만, 그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선명하게 눈에 담고 싶어서였다.

안경을 써도 됐지만,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 렌즈를 택했다. 처음 한 달 정도는 도무지 렌즈를 끼고 빼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를 만나는 날이면 매일 고생을 했다. 렌즈를 빼느라 눈물도 줄줄 흘려 보고, 눈이 시뻘게진 채로 가서 울었냐는 말을 들은 날도 있었다.

이제는 렌즈를 끼고 빼는 게 아주 자연스러워졌지만…… 더는 그에게 잘 보일 일도 없으니 낄 일도 없겠지.

도겸을 위해 불편한 것도 감내하던 습관을 버린 게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보답받지 못할 짝사랑만 해 왔던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입이 썼다.

이제라도 흔들리지 말고 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마음을 겨우 다잡는데, 도겸이 빤히 서원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 말했다.

“잘 어울리네.”

“…….”

스쳐 지나가듯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일 거였다. 별 의미 없이, 새 옷 사면 잘 어울리네 하는 것처럼.

그렇지만 이제껏 안경 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혼자 아등바등했던 것이 필요 없었던 것처럼 느껴져 괜히 마음이 울렁거렸다.

왜 나는 그의 말에 의미를 담고 혼자 위로를 받는 걸까.

서원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페로몬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마음을 갈무리한 서원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대꾸했다.

“도련님. 없는 사람 취급하시라면서…… 너무 말이 많으신 것 같은데요.”

“……너 정말 변했어.”

“그런가요.”

서원은 덤덤하게 대답하며 시선을 모니터로 옮겼다. 그렇지만 하얀 팝업 창만 바라볼 뿐 손은 움직이지 못했다.

일해야 하는데. 파트너 일 아니더라도 잘 먹고 잘살고 있다고 보여 주고 미련을 털게 해야 하는데…….

잘 어울린다는 말 한마디가 만들어 낸 파동이 파도가 되어, 단단하게 막아 세우던 방파제가 조금씩 깎여 버리는 기분이었다.

* * *

“후…….”

처음 한 시간 정도는 마음이 붕 뜬 것처럼 일이 되지 않았지만, 원고 파일을 보고 억지로 손을 움직이니 조금은 집중할 수 있었다. 납품 기한이 넉넉하게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지, 오늘까지였더라면 죽 쒔으리라.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임신한 이후로는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팔다리가 찌뿌둥하고 힘들었다. 스트레칭을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문득 도겸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저를 감시해야겠다며 집에서 망부석처럼 나가질 않더니만, 언제부터인지 태블릿을 내려다보며 같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시간이 금인 남자니까 아무것도 안 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사람이 아니었다.

스트레칭을 할 생각이었는데, 그가 집에 있으니 괜히 방해하면 안 될 것 같고 눈치가 보였다. 내 집인데도, 왠지 제가 그의 공간을 멋대로 침범한 느낌이라 마당으로 나가서 몸 좀 풀고 오려던 참이었다.

“어딜 가?”

살금살금,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게 조용히 다녀오려고 했건만 도겸이 금방 눈치를 채고 서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집중력도 좋은 편이면서……. 서원은 제가 그렇게 부산스럽게 움직였나 싶어져 조금 멋쩍은 말투로 대답했다.

“아……. 마당에서 스트레칭 좀 하려고요. 뻐근해서…….”

“같이 가.”

“같이 하시려고요?”

“왜? 나는 하면 안 돼?”

왠지 같이 스트레칭을 한다는 게 상상이 안 가서 물은 것뿐이었는데, 도겸은 같이 하면 큰일이라도 생기냐며 삐딱하게 물었다.

좀 전에도 입씨름을 한창 주고받긴 했지만, 아까와는 날카로운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단순히 제가 파트너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좀 피곤하고 예민해 보였다.

일 때문에 그런 걸까. 하긴, 일하면서 기분 좋을 사람은 별로 없지.

“……그럼 같이 가요.”

도겸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마당에 가려고 한 거였으나, 그 때문에 마당으로 나가려고 했다는 말은 하기가 조금 그래서 같이 나가려고 했다.

함께 현관으로 나서려는데, 순간 도겸이 미간을 좁히더니 몸을 휘청였다.

그러곤 그가 서원의 어깨에 머리를 툭 떨어트리며 몸을 기댔다.

“어엇, 도련님……?”

도겸의 체중에 밀린 서원이 주춤거리다 등에 벽을 기댔다. 저보다 덩치가 훨씬 커다란 남자가 허리를 굽힌 채 제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는 게 이상했다.

왠지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떼어놓으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다 써 놓고서는 몸이 가까워지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

서원이 간신히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밀어내려는데, 도겸이 서원의 양쪽 팔뚝을 손으로 붙잡았다.

“윤서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정사 때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순간 기분이 아찔해졌다.

온몸을 감싸는 이상야릇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는데, 도겸이 이마를 비비적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 어지러워.”

“…….”

“아파.”

도겸이 어울리지도 않게 어리광을 부렸다. 흔치 않은 모습에 서원은 침을 꼴깍이며 그를 바라보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가 했던 말을 되물었다.

“……아프다고요?”

아프다니? 우성 알파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신체 조건이 뛰어났다. 체격도 그렇고 건강 또한 마찬가지였다. 잔병치레가 없어서 감기조차 안 걸린다고 했고, 술을 병나발로 불어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런데 제게 기대야 할 정도로 머리가 아프다니. 알파가 어지럽다는 건 신체에 큰 문제가 생겼을 때밖에 없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서원은 덜컥 겁이 났다.

서원은 그의 가슴팍에 거의 얹어두기만 했던 손에 힘을 줘 그를 밀어내려고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모,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데, 배 비서님 부를까요?”

“필요 없어.”

“그럼 의사라도…….”

“그걸로 해결됐으면 여기까지 내려오지도 않았겠지.”

“……네?”

“페로몬 못 빼서 머리 아파 뒤지겠다고. 너 때문이잖아.”

“…….”

무슨 말인가 했더니……. 그간 페로몬이 쌓여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는 거였다.

페로몬 체증으로 오는 통증은 약물로 어느 정도 해소가 가능하긴 하지만, 세간에 떠도는 말로는 그 약이 정력에도 영향을 준다고 했다. 그 탓에 약을 못 먹는 걸까?

……그렇지만 도겸의 평소 잠자리를 생각하면 조금은 먹어도 괜찮을 텐데. 서원은 한두 번만으로는 끝나지 않는 그와의 잠자리를 떠올리다, 남사스러워져 황급히 상상을 지워냈다.

“그건 저 때문이 아니라……, 도련님이 페로몬 체증을 풀지 않으셔서 그런 거잖아요.”

“똑같은 말 아닌가?”

“그게 어째서 같은 말이 됩니까……. 저 말고도…….”

말을 하던 서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다른 오메가를 만나 안아서 페로몬 체증을 가라앉히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그와의 인연을 정리하기로 했다지만, 그것까지 말하는 건 내가 너무 비참해지지 않나.

조금 서글퍼지고 있는데,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있던 도겸이 고개를 들고 서원과 가까이서 눈을 마주했다.

조금만 움직이면 콧날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도겸은 속삭이듯 달콤한 목소리로 서원을 꾀어냈다.

“키스라도 하게 해 줘. 그러면 조금 나을 것 같으니까.”

“…….”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훅, 짙은 알파 페로몬이 넘실거렸다.

그가 단순히 가까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오메가가 알파의 페로몬에 약하다는 걸 알고 일부러 페로몬을 풀어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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