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정리했나?”
“…….”
그날로부터 딱 일주일이 되던 날. 도겸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당연하게 서원의 집을 찾아왔다.
역시 이사라도 갔어야 했던 걸까? 딱 일주일 준다고 선전포고를 하긴 했지만, 그가 두 번씩이나 이런 시골에 걸음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그는 시간 낭비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서울에서 이 마을까지 내려오는 데 빨라야 다섯 시간이었다. 일 분 일 초가 금, 아니 금보다도 비싼 남자가 왜 이곳까지 직접 걸음을 하는 건지. 도겸의 탈을 쓴 다른 사람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색적인 행보였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 파트너를 그만두겠다고 한 건 단순한 변덕이 아닌데……. 서원은 눈을 감았다가, 한숨 내쉬듯 힘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이렇게 찾아온다고 해서 바뀔 거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만나지도 않으면서 아직도 마음 정리 못 했어?”
“……제 뒷조사 좀 하지 마시죠.”
“그러게, 뒷조사하기 전에 돌아왔으면 됐잖아.”
“…….”
뭐 이런 적반하장이 다 있는지……. 뻔뻔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도겸은 일 잘하는 남자가 아니던가. 협상할 때 보통 이런 식으로 일하지는 않을 텐데. 제가 그와 오랫동안 함께했기에 아직도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걸지도 몰랐다. 서원 역시 그를 도련님 대하듯 정중히 대하고 있었으니까.
서원은 답답함을 느끼며 도겸을 내려다봤다. 그는 자연스럽게 서원의 집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분명 대문에서부터 쫓아내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자연스럽게 그에게 집을 내어주고 말았다. 제 불찰이었다.
“……아무튼 이만 나가 주시겠어요?”
“나갈 생각 없는데?”
“가택침입으로 신고할 겁니다.”
“신고해 봐. 그게 통하는지.”
“…….”
도겸은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신고를 해 봐야 통할 상대가 아니긴 했다.
너무나도 거만한 태도에 서원은 그를 무시하고 싶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긴 다리가 포개지는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190cm에 다다르는 장신인데다가 비율도 좋은 편이라 모델 못지않게 다리를 꼬는 모습이 멋있었다. 길기만 한 것뿐이 아니라, 꽉 조여지는 탄탄한 허벅지 역시 근육으로 옹골차 있다는 걸 알기에 더욱 시선이 갔다.
그를 쫓아내야 하는 마당에 다리 길다고 감탄이나 하고 있다니. 욕망에 충실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서원은 머릿속에 가득 찬 음기를 몰아내고 애써 냉담한 목소리를 냈다.
“도련님이…… 집에 계신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텐데요.”
“얼마나 잘 살길래 내 조건을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는지 알아야겠어.”
“웬만한 건 뒷조사하셔서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잘 살아서 거절하는 것 같으면 이런 시골로 내려올 것 같습니까?”
“그러게 왜 이렇게 먼 곳으로 와? 여기까지 내려오는 데 몇 시간이나 걸리는 줄 알아?”
도겸은 여기까지 내려오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짜증스러운 일인지 아느냐고 책임을 전가했다.
“안 오시면 되는 거잖습니까.”
“종일 집에 처박혀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수작질 그만하지. 페로몬 뺄 파트너가 필요하다는데 그게 어려워? 파트너를 못 하겠다는 진짜 이유가 뭐야?”
도겸은 서원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다는 듯이 물었다.
서원은 제가 무작정 일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와 정착하기까지, 그가 다시 저를 원할 거라고, 뒷조사하고 저를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제게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기에 이렇게 빨리 거짓말한 것을 들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이럴 때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조차도 생각해 본 적 없다.
서원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눈동자를 흠칫 떨었으나,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저었다.
“이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그딴 거짓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해?”
“……모든 사람이 도련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도련님의 생각이 다 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이고 편견이죠.”
“내가 착각하는 거다?”
“네.”
“…….”
서원이 단호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도겸이 말없이 서원과 눈을 마주했다. 속내를 읽어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모든 게 다 까발려질 것 같아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그라도 독심술을 할 줄은 모를 것이다.
서원이 손에 땀을 쥐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자, 도겸은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증거 없이 나불대는 주둥이는 안 믿어. 그러니까 나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싶다면 그 새끼 당장 내 눈앞에 데려와.”
“…….”
도겸의 확신 어린 말에 서원은 입속의 살을 꾹 깨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리 애인이라도 고용했을 텐데……. 이제 와서 고용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인터넷 이용 내역마저 그가 감시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서원은 나오려는 한숨을 억누르며 또박또박 단호하게 대꾸했다.
“저 혼자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도련님이랑 마주할 자리 같은 거 못 만듭니다.”
“고작 짝사랑 때문에 내가 제시한 조건들을 다 내친다고?”
“도련님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런 사랑도 있습니다. 헛다리 짚지 마시고 나가시죠. 도련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시간 낭비입니다.”
“이건 낭비가 아니라 투자라고 부르는 거지.”
“얻어내는 게 없으면 낭비입니다.”
“그건 지금 속단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거래라도 할까? 내가 맞는지, 네가 맞는지? 짝사랑하는 이가 있단 걸 이번 달 안에 증명하면 나도 깔끔하게 포기하지.”
도겸이 오만하게 거래를 걸었다. 그는 여전히 서원이 다시 제 곁으로 돌아오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마음에 걸리는 게 없으면 서원에게 거래를 받아들이라고 종용하고 있었지만, 서원은 거래 자체에 의문을 품었다.
“아니……, 말씀드렸다시피 보여드릴 수가 없는데 그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진짜라면 알 수밖에 없겠지. 내가 너랑 몇 년을 같이 지냈는데 그것도 못 알아볼까.”
“…….”
도겸의 당당한 말에 서원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6년 동안 제가 그의 파트너로 지내면서 짝사랑해 왔는데도 몰랐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자신만만할 수가 있을까.
답답함에 내가 좋아하는 건 당신이라고, 당신을 원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서원은 꾹꾹 욕구를 눌러 삼켰다.
아직 제가 임신까지 한 건 모르는 눈치니 확 고백해 버리고 연을 끊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인연을 끊는 것보다 그의 반응을 보게 되는 게 더 무서웠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자신은 훨씬 더 회피형 인간이었다.
서원은 고민하다가,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를 빌미로 도겸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져 고개를 끄덕였다.
“하죠, 거래.”
“하, 그럼 다음 주에 올 때 계약서를 하나 가져와야겠군.”
“뭘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해 두는 게 좋잖아?”
“……그러시든지요.”
굳이 그걸 계약서로 남겨둬야 할 이유까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정말 제가 도겸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가 알아채게 된다면……. 그때는 계약서가 유용하게 먹힐지도 모른다.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수긍하려던 서원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계약서에 조항 하나 추가하죠. 거래라면 제게도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해. 뭐, 돈이라도 필요해? 네가 이기면 서울에 집을 마련해 줄까?”
“그런 건 됐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게 맞다면……. 다시는 도련님과 제가 마주칠 일 없도록 한다는 걸 추가해 주세요.”
도겸은 서원의 제안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 사이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포악한 야수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것처럼 화내듯 대꾸했다.
“파트너 건이 아니더라도, 인연까지 끊을 이유는 없잖아?”
“아뇨. 어차피 그 일 아니고서야 접점도 없는 사이 아닙니까. 파트너 일 외에 제가 도련님에게 필요할 일은 없을 텐데요.”
“……도대체 무슨 수작질인지 모르겠군. 차라리 돈을 달라고 하는 게 쉽겠어.”
“수작질이 아니라, 말 그대로입니다.”
“그래, 뭐든 해 보자고. 누가 맞는지.”
도겸은 서원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묵직한 알파 페로몬을 풀풀 풍기면서도, 서원이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지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