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36)

<24화>

집 주소를 알아낸 것부터 뒷조사를 했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저렇게 당당할 것까지는 없지 않나? 하기야 그렇게 눈치를 볼 사람이었으면 제 집에 이렇게 당당히 찾아오지도 않았으려나.

그는 서원이 거짓말하고 일을 그만뒀다는 걸 알아챈 눈치였지만, 그래도 제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까지 알아채지는 못한 눈치였다.

서원이 묵비권 행사하듯 아니라고도, 그렇다고도 대답하지 않자 도겸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곤 빈정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아니면 짝사랑하는 사람이 이 마을에 있나? 그런 것치고 젊은 사람이 없잖아. 취향이 늙다구리였어? 그렇게 눈이 바닥에 달린 줄은 몰랐는데.”

“…….”

늙다구리라니……. 사람을 뭐로 보고. 오히려 눈이 너무 높아서 문제였다. 감히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는 남자를 마음에 품었는걸.

서원이 굳이 해명하지 않자 도겸이 슬쩍 물었다.

“아니면 실연의 상처인가?”

“……제가 그것까지 말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 이런 모습은 신선하네.”

도겸은 서원이 완강히 거절하는 걸 처음 본다는 듯 황당하다는 웃음을 지었다. 서원이 여태까지 그의 아래에서 얼마나 충실한 파트너로 지냈었는지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일을 그만둔 지금에도 그의 앞에서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 심장 떨릴 정도로 무서웠지만……. 서원은 정말로, 그가 일확천금을 준다고 해도 돌아갈 생각이 없기에 단호할 수 있었다.

“어쨌든 저는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오메가 분을 찾으시죠.”

“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지.”

“……네?”

“네가 없으니까 안 된다고. 두 번 말해야 알아들어?”

도겸은 마치 제가 아니면 안 된다는 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자세히 묻고 싶었으나, 별거 아닐 거라는 생각이 금세 들었다. 그에게 제가 특별한 의미가 아닌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뭐가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도련님답지 않으십니다. 고작 제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내가 뭘?”

“도련님은 단지, 아이 낳지 않을 입 무겁고 충실한 열성 오메가가 필요하신 것뿐이지 않습니까.”

배 비서의 말로는, 어떤 파트너를 구해 와도 도겸이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침실에서 오메가를 내쫓아 버린다고 했다.

왜 그러는 걸까? 페로몬 파트너 계약서에는 비밀 유지 조항도 있고, 그에게는 실력 있는 법조인들도 있었다. 때문에 입이 무겁지 않으면 그의 파트너가 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데…… 왜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오메가를 구해 줘도 다 걷어차는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서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도겸을 바라보자, 그가 골치 아픈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랬지. 그런데…….”

“…….”

“너만큼 좋은 상대가 없잖아?”

“좋은…… 상대요.”

“그래, 구해오는 오메가들은 하나같이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질척거리고 짜증 나게 굴더군.”

도겸은 어떤 오메가를 떠올렸는지, 와락 표정을 구겼다.

도겸만큼이나 서원의 얼굴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결국엔 예상했던 대로, 도겸은 저를 부려먹는 게 가장 편한 것이다.

도겸은 재벌에 젊고 잘생기기까지 한 우성 알파였다. 그러니 그의 파트너로 들어온 오메가들이 제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혹시나’하고 기대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오메가들을 내치고 페로몬을 축적하고 있었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도겸이 저 아니면 서지 않는 건 아닌지 어렴풋이 추측했는데……. 아냐, 성관계를 몇 번 연속으로 내리 해도 지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그럴 리는 없겠지. 돈 굴리는 것만큼이나 섹스도 잘하는 인간이니 더더욱.

나는 어쩌다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서. 어쩌다 이런 남자의 아이를 품게 되어서……. 어쩌면 도겸의 말처럼 사람을 보는 눈이 바닥에 떨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얼굴이랑 돈 빼고는 이렇게 이기적이기만 한 남자를 왜 좋아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속이 갑갑해지는 것을 느끼는데, 도겸이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던 말이 자꾸만 생각이 나더라고.”

그는 단순히 서원이 편한 상대이기만 해서 이곳을 찾아온 게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이건 무슨 소리일까.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게 도겸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서원은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침을 삼키곤 물었다.

“……왜요?”

“네가 누군가를 좋아할 권리조차 나한테 있는데, 감히 떠났잖아.”

“하…….”

할 말을 잃게 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서원은 저도 모르게 도겸의 앞에서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릴 때면 모를까, 도겸의 파트너로 지내게 된 후 그의 앞에서 대놓고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도겸의 시선이 닿았지만, 서원은 지금만큼은 의식하지 않고 반박했다.

“그 권리가 왜 도련님한테 있습니까.”

“아닌 적이 있었나? 넌 줄곧 내 거였잖아. 다른 새끼가 네게 박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썩 더럽던데.”

도겸은 마치 제가 독점하던 서원이 남의 것이 된다는 게 불쾌하기라도 한 듯한 눈치였다.

제가 아무나 만나며 몸을 내주고 다닐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서원은 오히려 보수적인 편이었으나 그의 앞에서는 늘 순종적이었고, 재회하자마자 페로몬 파트너가 되라는 제안도 받아들였으니 문란하게 보였을 수도 있긴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몸을 겹치고 함께했는데……. 여태까지 저를 완전히 달리 보고 있었다는 것이, 그만큼 도겸이 서원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반증인 것 같아 그와 함께했던 지난 세월이 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무엇 때문에 도겸의 곁에 있었던 걸까.

그와 함께하며 몇 번이고 했던 생각했던 것이었지만, 오늘처럼 뼈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 만날 필요 없어. 내가 평생 책임질 테니까, 다시 내 밑으로 돌아와.”

“…….”

누가 들으면 로맨틱한 프러포즈라도 하는 줄 알겠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파트너로 평생 책임을 지겠다니……. 미래에 그가 옆에 둘 반려에게도 미안한 소리였다.

서원은 작게 숨을 삼키고는 최대한 목소리를 진지하게 내리깔았다.

“도련님.”

“그래, 뭘 원하는지 말해 봐.”

“도련님이랑 있던 시간이 아깝게 느껴집니다.”

“……뭐?”

서원은 애써 냉정한 말로 고리를 잘라냈다.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모진 말을 해도, 서원은 여전히 그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떨렸고, 코끝을 스치는 알파 페로몬에 아래를 적실 정도였다.

그렇지만 서원은 아이를 선택하기로 한 날, 모든 기대를 정리했다. 어차피 그가 제 마음을 받아들여 줄 리는 없으니, 아이와 함께하자고 결정했으니까.

“더 이야기했다가는 도련님과 있었던 좋은 기억도 다 없어질 것 같아요. 이만 돌아가 주세요.”

“윤서원.”

“몇 번을 물어보셔도 제 의견은 같을 겁니다. 도련님이 싫어하시는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이만 돌아가세요.”

비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서원은 도겸이 극도로 혐오하다시피 하는 시간 낭비를 이만 멈춰 주기를 바랐다.

일반인들에겐 아닌지 몰라도 도겸의 시간은 일 분 일 초가 금이었다. 이렇게 비생산적인 일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저번처럼 배 비서만 보냈다면 이해하겠지만…….

서원이 더는 그만하고 돌아가라며 직설적으로 말하자, 도겸은 순간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이윽고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황당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 살다 살다 윤서원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 건 처음이군.”

“죄송합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아? 날 이런 식으로 쫓아낼 만큼?”

도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을 좋아하기에 이런 조건을 전부 마다하고 서원이 당당하게 나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의 말에 서원은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말아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라고. 몇 년간 짝사랑했으면서, 그 말 한마디를 못해서 이러는 스스로가 싫었다.

“네, 좋습니다.”

“…….”

“도련님과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껄끄러울 정도니까,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원은 솔직하게 굴 수 없는 자신에게 환멸이 나는 만큼 도겸에게도 냉정하게 굴었다.

그에게 이런 식으로 구는 건 해가 서쪽에서 뜰 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도겸은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얼얼한 얼굴이 됐다. 순간 주변을 맴돌고 있던 알파 페로몬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당장 벼락처럼 화를 낼 줄 알았으나, 도겸은 날카로운 눈으로 서원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일주일.”

“……?”

“일주일 줄 테니까, 그때까지 마음 정리해.”

일주일 안에 마음을 바꿔 놓으란 말이었다.

마음이 바뀔 일은 없을 거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어째서 다시 대화가 원점으로 돌아온 건지.

서원이 황당해하는 사이, 도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간다는 말도 없이 서원의 집에서 나가 버렸다. 쾅, 하고 닫히는 대문 소리가 그의 분노를 대신하고 있었다.

거의 문이 부서져라 닫히는 소리에, 서원은 심장이 바싹 조여지는 것을 느꼈다가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아……. 왜 날 찾는 거야…….”

다시 도망이라도 쳐야 하는 건가 싶은데, 이번엔 또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제 겨우 마을에 적응했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도겸이 나가고 나니 왜인지 배가 싸르르 아파 왔다. 서원은 아직 티도 나지 않을 만큼 작은 아이를 품은 배를 작게 쓰다듬으며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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