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36)

<23화>

그는 무슨 말이든 해 보려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나 서원이 강경하게 나오자, 배 비서는 설득해도 안 될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는지 체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도련님께는 그렇게 전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야말로 무례하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혹시 모르니 계약서와 명함은 두고 가겠습니다. 마음 바뀌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네.”

배 비서는 아무리 강경한 서원이라도 계약서를 보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서류 봉투에 든 계약서와 자신의 명함 한 장을 함께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배 비서는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시선으로 서원을 바라보다가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원은 그런 그를 대문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져 풀썩 소파에 앉는데, 배 비서가 두고 간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왜 흔들리게 하는 거야.”

서원이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중얼거렸다.

도겸이 찾는 게 제 몸뚱어리뿐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서원은 그가 저를 찾는다는 소식에 조금 흔들리고 말았다. 아이를 비밀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그래서 더는 파트너를 못 이어 가겠다고 설득했을 때 금방 수긍한 그였다. 오 년 동안 별 탈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거냐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거냐고 궁금해하기는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를 찾는 건지.

다른 오메가들은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내쫓는 이유가 뭔지…….

제가 떠난 사이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 *

“……도련님.”

“안녕.”

배 비서가 찾아왔던 날에 곧장 이사라도 가야 했던 걸까?

배 비서가 미련을 잔뜩 남기고 떠난 지 일주일째 되던 날, 꿈속에서 몇 번이고 마주했던 얼굴이 제 눈앞에 나타났다.

진짜 서도겸이었다.

일주일 전에 배 비서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이 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과 얼굴을 하고서 나타났다. 둘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배 비서는 보디가드나 조폭 같은 느낌을 풍겼으나 도겸은 젊은 비즈니스의 선두자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도겸도 키가 190cm에 다다르는 거구에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반듯한 자세와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느껴져 저 혼자 다른 곳에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도대체 어떻게 이 시골 한구석에 와도 저런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 건지…….

집 앞까지 찾아온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입만 달싹이는데, 도겸이 집 외관을 슬쩍 보며 말했다.

“계속 세워둘 건가?”

그는 자신을 바로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고 대문 앞에 세워두는 것이 거슬리는 듯했다.

약속도 하지 않고 멋대로 찾아온 것이니 그를 안으로 들일 의무도 없었고, 이제는 그와의 관계도 끊었으니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취급해 줄 의무도 없었다.

그러나 포장도 되지 않은 길 한복판에 서 있는 외제 차에 심상치 않은 사람의 등장에 마을 주민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배 비서나 도련님이나 이렇게 차려입지 않아도 충분히 시선을 끌 외모인데, 왜 이렇게까지 하고 오는 건지…….

과한 모습에 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서원은 어쩔 수 없이 가로막고 있던 대문 앞을 비켜주었다.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하지.”

도겸은 그다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말하며, 마치 집 주인인 양 당당하게 서원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서원은 난감하게 숨을 내뱉으며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다행히 오늘 아침에 청소해 둔 터라, 집 안은 나름 깨끗했다. 워낙 오래된 집이라 아무리 쓸고 닦아도 한계가 있긴 했지만, 저번에 배 비서를 안에 들였을 때보다는 나은 수준이었다.

서원은 도겸을 거실에 있는 소파로 안내한 다음, 저도 맞은편에 앉으려다가 너무 허전한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커피 드실래요? 믹스밖에 없긴 한데…….”

“뭐? 너 그런 걸 먹어?”

저번 주, 배 비서님이 불쑥 찾아오신 이후로 손님 대접용으로 뭐 좀 사다 둬야겠다고 생각하고 인스턴트 커피를 구비했다. 그것을 떠올리고 대접하려고 했던 것이었건만, 믹스 커피라는 말에 도겸은 무슨 그런 싸구려를 먹냐는 반응을 내보였다.

하기야, 도련님이 믹스 커피 같은 걸 입에 대 봤을 리가 없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기에 이해는 하지만, 저는 커피를 끊어서 그것도 못 마시는데 손님이 올까 봐 몇 개 준비해 둔 것을 핀잔받으니 조금 서운했다.

서원이 시무룩하게 얌전히 대화나 하려고 하는데, 그가 갑자기 고개를 젓더니 의견을 바꿨다.

“……아냐, 한 잔 타 줘.”

“무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네가 타 주는 거니까 다르겠지.”

“…….”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제가 타든 다른 사람이 타든 믹스 커피의 맛은 거기서 거기이건만,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무튼, 서원은 커피 한 잔과 제가 마실 차를 준비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도겸은 자신이 커피를 타 달라고 했음에도, 막상 서원이 내미는 잔을 미심쩍은 얼굴로 바라봤다. 독을 탄 게 아닌지 판가름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누가 보면 억지로 마시라고 시킨 줄 알겠다. 서원이 그냥 마시지 말라며, 그래도 된다며 잔을 치우려는데 도겸이 먼저 잔을 들더니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저렇게 바로 먹으면 뜨거울 텐데……. 저러다 혓바닥이 다 데지 않을까 걱정하는데, 도겸은 빠르게 컵에서 입을 떼며 미간을 확 찌푸렸다.

“……너무 달아.”

“아, 죄송해요. 블랙 커피가 없더라고요.”

뜨거운 게 아니라 단 게 문제였구나. 하긴, 그는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편이었으니까. 그래도 이따금 제가 먹던 것을 나눠 먹을 때도 있기에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그의 입맛에 믹스 커피는 너무 단 모양이었다.

“네 집에 블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잘못한 거지. 너 이 썩을 만큼 단 거 좋아하잖아.”

“…….”

이 썩을 만큼은 아닌데……. 취향을 폄하 당한 느낌이었다. 원래 말투가 저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오래간만이라 그런지 그의 말 하나하나에 반응하게 됐다.

그래도 도겸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반응해 놓고서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마시긴 마셨다.

서원은 저도 함께 차를 홀짝이며 은근슬쩍 그의 모습을 훔쳐봤다. 오래간만에 보는 것이라 그런 걸까. 그리웠던 만큼 그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안 본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살이 좀 빠진 건지 특유의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 더 짙어졌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페로몬을 빼 줘야 하는 우성 알파이건만, 혹 그간 제대로 된 오메가와 관계하지 못해서 페로몬이 쌓이기라도 한 걸까? 그 부작용으로 수척해진 걸까?

작은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챈 서원이 속으로 걱정을 이어 가는데, 도겸이 반쯤 남은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곤 입을 열었다.

“떠나고 얼마나 잘 사는지 보려고 온 건데……. 썩 잘 살진 않나 보네.”

“…….”

도겸의 눈동자가 집 안을 세세하게 훑었다. 서원이 나름 깔끔하게 정리했다지만, 그의 눈에는 너덜거리고 후줄근한 집으로만 보였다.

도겸은 서원이 지금 지내는 집의 외관만 봤을 때도 몇 년도에 지어진 건지 감도 오지 않을 만큼 다 무너져 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 안도 못 볼 꼴이었다. 이전에 내어줬던 아파트보다는 훨씬 못했다.

서원을 파트너로 데리고 있는 동안 봉급을 쏠쏠하게 줬다고 생각했다. 한 해가 지날 때마다 섭섭하지 않게 올려 줬기 때문에 오 년간 서원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느닷없이 파트너를 그만두고는 이런 곳으로 내려온 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갑자기 귀농에 뜻을 가진 건가 싶기도 한데, 도겸이 아는 서원은 그런 걸 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성관계를 할 때면 매번 흐느적거리며 쓰러지는 인간이 무슨 농사란 말인가. 설마…….

“부동산 사기라도 당한 거야?”

“……아닌데요.”

“근데 이런 곳에서 산다고?”

서원의 대답에 도겸의 표정은 더 이상해졌다. 부동산 사기를 당하지 않고서야 들어오지도 않을 집 같은데, 어째서 이런 곳에 왔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마뜩잖은 눈으로 실내를 계속 돌아보는 도겸의 모습에, 서원은 나름 이 마을에 적응하고 주민들과 잘 지내면서 입에 풀칠할 정도는 하고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잘 지냈다고 대꾸를 해 봐야 도겸의 눈에는 자존심을 부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원은 반박하기보다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파트너 일로 오신 건가요?”

“그게 아니고서야 내가 널 찾아올 이유가 뭐가 있겠어.”

“……예, 그러시겠죠.”

당연한 거 아니냐는 대답에 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일주일 전에 배 비서가 왔었으니 의도를 알기 너무나도 쉬웠고.

그렇지만 혹여나 하고 물어본 것이었다. 왜냐하면 고작 파트너 일 때문에 그가 이렇게 먼 시골까지 행차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의 평소 행보와는 전혀 다르니, 혹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기대했을 뿐이다.

실망한 서원이 시선을 멀리 거두자, 도겸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낮은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왜 받아들이지 않는 거지? 조건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말이라도 해 봐. 뭐든 들어줄 테니.”

“조건은 더 좋아졌다고 들었습니다. 읽진 않았지만.”

“안 읽었다고? 배 비서는 분명히 너한테 계약서를 넘기고 왔다던데.”

“주시긴 했지만, 제가 그걸 읽어야 하는 의무는 없습니다.”

서원은 배 비서가 준 봉투를 열어 보지도 않고 고스란히 서랍장에 넣어두었다.

미련을 가지지 않기 위해 갈기갈기 찢어서 버릴까 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그 서류에 도겸의 페로몬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그리워하는 것도 그렇지만, 임신한 상태에서 짝의 페로몬을 받으면 아이의 발달에 도움을 준다고 들은 적이 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도겸과 만나지 않았으니, 이렇게나마 도겸의 페로몬을 받으면 티끌만큼이라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튼, 서원은 그런 이유로 파트너를 거절한 게 아니라며 해명했다.

“조건은 제가 그만두기 전에도 과분할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도련님의 파트너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못 하겠다고 했던, 그걸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만나는 사람 없잖아.”

“도련님은 모르겠지만, 있습니다.”

“내가 설마 그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을까.”

도겸은 그런 것은 핑계일 뿐이지 않냐며,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왔다는 눈치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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