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쾅쾅쾅!
“윤서원! 문 열어!”
곧장 차를 타고 빠르게 도착한 윤서원의 집. 도겸이 거칠게 아파트 현관문을 두드려도 보고 이름도 외쳐 봤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혹여나 저번처럼 핸드폰 충전을 하지 않았다고 하며 멀쩡히 집에 있을까 봐 확인차 두드려 본 건데, 이번에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정말 쓰러지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머릿속에서 툭, 하고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났다. 도겸은 미리 챙겨 온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도어락까지 이중으로 잠겨 있긴 했지만, 도어락도 제가 달아 줬던 것이기 때문에 비밀번호쯤은 알고 있었다.
“윤서원!”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도겸은 다급하게 집 안으로 쳐들어갔다.
도겸이 방황하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서원을 찾는데, 무언가 이상한 점이 눈에 밟혔다.
“뭐야, 이게…….”
저번에 왔을 때와 달리, 집안에는 짐이 하나도 없었다.
윤서원이 이곳에서 머물렀었던 흔적이 조금 남아 있긴 했지만, 이전에 서원에게 아파트를 처음 내어줬을 때처럼 가구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인테리어를 바꾸려고 정리한 걸 수도 있겠다 싶어 모든 방을 둘러봤지만, 윤서원의 머리털 하나조차도 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 파트너도, 도련님의 집에서 지내는 것도…… 다 그만두겠습니다. 아파트에 있는 짐은 이른 시일 내에 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며칠 전에 윤서원이 그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아파트야 어떻게 하든 상관없었다. 긴 시간 동안 파트너로 지내 줬으니 포상으로 그냥 가지라고 줘도 됐단 말이다.
그렇지만 그날, 도겸은 서원이 파트너를 그만두겠다고 한 것에만 신경이 몰렸다. 그가 파트너를 그만두는 것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파트너를 더는 못 하겠다는 것도. 그게 너무 충격적이라서 아파트를 어떻게 하겠다고 한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억지로 떠안겨 줄 걸 그랬다.
“그래서…… 벌써 이사한 거야?”
이른 시일 내에 가겠다고는 했지만, 그날로부터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다른 집을 구해서 이사한 건지.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이렇게 빨리……. 저번에 서원이 휴가를 연달아 쓸 때 도망이라도 치는 거냐고 따지듯 물은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도망의 현장이었다.
“도대체 왜…….”
도겸은 순간 미국에서 윤서원이 히트사이클이 터져 저와 하룻밤을 보냈던 날이 떠올랐다.
당시 윤서원은 계약 해지를 두려워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었는데, 고작 며칠 사이에 계약 해지를 다시 결심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제 과실로 그날 계약을 해지했더라면 몇 배의 해약금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무엇보다도 윤서원은 제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더는 파트너를 못 하겠다는 이유를 대며 계약 해지를 요구했다. 돌이켜보면, 미국에서는 계약 해지하지 말아 달라고 애걸복걸했으니 그새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생겼다는 거였다.
미국에서 다녀온 이후, 윤서원은 며칠간은 앓아누워서 집에만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 짧은 시간 내에 생길 리가 없잖아?
도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고, 뭐가 문제였던 건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도겸이 어이가 없다는 눈초리로 집안을 둘러보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사뭇 날카로워졌다.
* * *
“부모님 집에도 없으면, 걔가 어딜 가는데?”
“죄송합니다. 핸드폰 번호를 알아내서 지금 연락도 했고, 혹시 몰라 위치 추적도 요청했습니다.”
허탕 친 도겸이 다시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배 비서에게 따지듯 물었다. 타박하는 말투에 배 비서는 제 잘못이 아님에도 눈치를 봤다.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서원이 어딜 가 봐야 그의 어머니네 집에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윤서원은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를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했으니까.
그런데 윤서원이 그 집에 없단다. 그것도 모자라 번호도 바꿨다고 한다. 야반도주하는 것도 아니고, 그 짧은 시간에 거주지와 번호를 다 바꿨다고 하니 뭔가 이상했다.
“걔가 가 봤자 어딜 간다고.”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찾아내겠습니다.”
배 비서는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는 듯 허리를 꾸벅였다.
도겸은 사과하는 배 비서를 마뜩잖게 바라봤다. 윤서원의 행보가 평소와 조금 이상하긴 했어도, 오전에 지시한 사항을 여태까지 못 해냈다는 게 무능하게 느껴졌다. 서원이 이사를 가 봤자 서울 이 근처일 텐데, 그걸 찾는데 이렇게 오래 걸린다고?
도겸의 수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처리 방식이었다. 도겸이 싸늘한 시선으로 배 비서를 바라보자, 그는 도겸이 페로몬 때문에 한껏 예민해졌다고 생각하는지 말을 돌렸다.
“오늘 안에는 무리일 것 같은데…… 다른 오메가를 찾아볼까요?”
“됐어. 이만 가 봐.”
“…….”
도겸이 이만 나가보라며 고개를 까딱이자, 배 비서가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도겸은 다시금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두통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렇지만 약으로도 가라앉히지 못한 두통을 손으로 누른다고 풀릴 리가 없었다.
“하……. 윤서원, 무슨 생각인 거야.”
도겸은 제가 이렇게 된 것이 윤서원 때문이라고 탓을 돌리며,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당연히 제 곁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파트너를 이어 가지 못하겠다는 서원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기분이 쓰레기장에 처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더러워졌었다.
놓치기 아쉬운 파트너이긴 했다. 입도 무겁고 착하고 말도 잘 듣고, 성인이 되고 마주했을 땐 처음에 못 알아봤을 정도로 더 예뻐졌으니까.
게다가 서원은 특별한 페로몬을 가지고 있었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의 향 때문에 충동적으로 입맞춤할 정도로 매력적인 페로몬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맡기 힘들 정도로 옅지만,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게 들이켜면 기분이 좋아졌다. 아마 서원이 이렇게 매력적인 페로몬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저밖에 모를 것이다.
그러나 서원과는 페로몬 파트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그가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하든 저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기분 나쁜 것쯤은 금방 새로운 사람을 구하면 없어지리라 생각하고 파트너 계약을 해지했다.
그런데 설마하니 다른 이한테는 동하지 않을 줄이야.
대놓고 윤서원과 비슷한 호리호리한 체격의, 검은 머리를 한 열성 오메가를 데려오라고 지시한 적도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 안으면 비슷하지 않을까 했으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방법마저 통하지 않았다.
배 비서에게는 제 아랫도리 사정까지는 말하지 않았으니 윤서원을 찾는 게 급하다는 걸 모르겠지만, 아주 급한 상황이었다.
어서 윤서원을 만나 이 갑갑증도, 제 몸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지도 알아내고 싶었다.
* * *
“끄으응…….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서원은 컴퓨터 앞에 거북이처럼 앉아 있다가, 하단에 뜨는 시계를 보고는 점심때가 다 된 걸 알아챘다.
기지개를 쭉 켜며 자리에서 일어난 서원은, 바로 옆에 있는 커다란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큰 창을 여니, 드르륵 소리와 함께 맑은 공기가 폐부에 들어찼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창문을 열면 보이던 것이 서울의 고층 아파트 스카이라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듬성듬성 있는 단독주택 집들과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바다가 보였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리넨 소재의 가벼운 반소매 옷이 가볍게 산들거렸다. 전보다 조금 길어진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어느새 완연한 여름이 되어 바람마저 후덥지근했지만, 안 부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시골 공기가 좋긴 좋네.”
지금은 기분 좋게 창밖을 볼 수 있게 됐지만,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우울했었다.
무작정 도겸에게 파트너를 그만두겠다고, 아파트에서 나오겠다고 말은 했어도 사실 임신 소식을 듣고 하루 만에 결정한 거라 앞으로의 거처나 생활에 관해 계획을 짜 두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재정 상태는 여유롭지 않았다. 도겸의 페로몬 파트너로서 돈을 넉넉히 받아 왔지만, 그것으로 강남권에 엄마의 집도 마련해 줬고 불과 며칠 전에 엄마의 무릎 수술비도 수납했다.
수술도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몇 번 더 수술해야 할 수도 있다고 해서 혹시 몰라 돈을 아껴 둬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울에서 지내다가 도겸의 사람들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부른 배를 보고서 제가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난감했다.
‘시골로 내려갈까.’
그래서 생각한 게 시골행이었다. 해외로 나가기엔 비행기 값, 집세, 특히 병원비가 부담이었다. 게다가 임신 초기에 비행기를 타면 조산의 위험이 클 것이다. 그러니 같은 한국 안에서 그가 굳이 걸음할 리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시골에 관한 로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도겸이 시골에 내려올 일은 별로 없을 테고, 시골이면 집값도 아낄 수 있을 테고…….
취업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을 테니 아쉽긴 하지만, 안 그래도 다들 꺼리는 열성 오메가가 임신까지 한 상태면 받아주는 곳도 흔치 않을 거였다. 그리고 열성 오메가는 특히 주의를 많이 해야 하니 안정을 취하는 게 좋았다. 아무래도 내려가서 프리랜서 일을 하며 간간이 먹고 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내려가자. 내려가면 뭐라도 하면서 먹고 살겠지.’
서원은 나름 이름만 대면 안다는 국립 4년제 대학교를 나와 졸업하기도 했고, 의도치 않게 도겸을 따라다니며 해외를 자주 다니게 되면서 외국어는 특히나 잘하는 편이었다. 그 근처에서 학생을 모아 과외를 하든, 번역 일을 하든 생활비를 벌면 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으로 서원은 계획에도 없던, 이름도 모르는 시골에 집을 구해 내려오게 됐다.
시골 생활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연령층이 높아 또래가 없는 건 아쉬웠지만, 이웃들은 전부 다 친절해 보였다. 인터넷에서 본 것처럼 텃세가 심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오히려 서울에서 온 젊은 사람은 오래간만이라며 좋아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다행이었다.
아쉬운 점은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없다는 것 정도일까. 임신한 탓에 디카페인 커피만 마셔야 하는데, 디카페인을 팔 만큼 큰 커피숍이 없어서 강제로 커피를 끊게 됐다.
“공기 좋은 곳에 오고, 커피까지 끊다니. 덕분에 건강해지겠어…….”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커피는 평생 못 끊을 줄 알았는데.
쉬었으니 이제 점심이나 사 먹으려고 느긋하게 현관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바깥에서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옆집에 사시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서원 씨, 안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