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36)

<20화>

“으응? 뭐, 뭐가?”

“어제 집에 들른다고 전화했을 때 목소리도 그렇고, 얼굴이 반쪽이 됐는데 엄마가 못 알아보겠어?”

“…….”

얼굴이 반쪽이 됐다는 건 순전히 그녀의 의견이겠지만, 서원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는 능력만큼은 일등이었다.

서원이 수박을 찍어 먹던 포크를 내려놓자, 지희가 두 팔을 식탁 위에 올리고 대답을 재촉했다.

“뭔데 그래?”

오늘 서원은,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하려고 온 거긴 했다. 혼자 안고 가기에는 너무나도 큰 문제였으니까.

그러나 막상 말할 타이밍이 됐는데도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만 며칠 동안 했고, 혼자서 시뮬레이션까지 하고 왔는데도 그랬다.

서원이 머뭇거리자, 지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얘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하면서도, 심각한 이야기가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엄마. 사실은 제가…….”

한 마디를 말하려는 것뿐인데, 갑자기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평생에 잘못한 일을 고해성사하는 사람도, 범죄를 자백하는 사람도 이만큼은 떨리지 않으리라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떨리고 무서웠다.

사실대로 말한 뒤 보일 엄마의 반응도 무서웠고,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 자체도 무서웠다. 방금 맛있게 먹은 콩국수와 수박이 그대로 얹힐 것만 같은…… 가시방석이었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심호흡하듯 숨을 들이켠 서원은, 다시금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임신을…… 했어요.”

“뭐라고……?!”

이런 이야기가 나오리라고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 지희는, 충격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냈다.

커다래진 동공, 벌어진 입술, 떨리는 손……. 그녀는 식탁 위에 올려두고 있던 두 손을 통제하듯 잡고 당황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 서원아. 너무 갑작스러운데…….”

“…….”

지희에게 서원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렸을 때 저택 일이 바빠 잘 봐 주지도 못했고, 좁은 방에서 쥐 죽은 듯 살게 했고…… 그 탓에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아이였다.

아이를 아이처럼 키워내지 못한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컸는데, 연약한 열성 오메가로 발현하기까지 했다. 체질을 결정짓게 된 것은 유전적 요인보다는 외부적 요인이 많았던 것 같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아서 미안했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갑자기 임신을 했다니?

열성 오메가 판정을 받은 이후로 2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건만. 서원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것은 축복처럼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했다는 것 자체는 축하해 줄 수 있어. 그런데…… 알파는? 보여 준 적이 없잖아? 사귀는 사람이라도 있었니?”

그녀는 제 아들이 다른 사람과 사귀거나 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부터 줄곧 그랬다.

부모님에게 애인을 소개해 주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는 성향의 아이들이 많다는 건 알지만, 소개는 안 해 주더라도 누군가를 사귀는 그러한 낌새조차 없었다. 서원이 성인이 될 때까지 한 방에서 같이 생활했는데도 그러했다.

성인이 되고 난 후로는 따로 살게 되고, 모시던 도련님의 비서인지 무슨 일인지를 하게 됐다고 자주 보지는 못하게 됐지만……. 아무튼, 그래 왔기에 서원이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만큼이나 놀라웠다.

어렸을 적부터 의젓하던 아이이니, 좋은 알파라면 급하긴 해도 새로운 가족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지희는 그런 생각으로 물었지만, 그 말에 서원은 오히려 더 난색을 보였다.

“그게…… 사고 같은 거라…….”

“사고? 너 설마……. 얘가 미쳤어, 미쳤어! 아이는 어떻게 하려고?!”

안 그래도 사색이 돼 있던 지희는 완전히 핏기없이 얼굴을 하얗게 물들였다.

서원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도겸의 페로몬 파트너로 일했다는 것은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도겸의 아래에서 일하는 건 알았지만, 비서 정도로만 알았다. 그렇기에 상대가 도겸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벼운 만남으로 아이가 덜컥 생긴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서원은 도겸의 아이라고 설명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사모님은 어머니의 은인과 같은 분이었다. 아주 가끔 만나는 것 같던데, 엄마가 말실수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알파의 존재에 대해서는 서원 혼자 품고 가야 할 일이었다.

“……낳을 거예요.”

“알파라는 그 사람은. 그 사람한테는 말 안 하고 혼자 키우겠다고?”

“네.”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 거야, 서원아.”

서원의 결정에 지희는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이슈가 떠오를 때마다 생명이 중요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희는 그런 것보다도 서원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지희는 서원을 혼자 키웠기 때문에 혼자 아이를 낳고 키우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가 힘들었던 만큼, 서원이 아이를 지우기를 바라게 되는 걸지도 몰랐다.

지희가 다시 생각해 보라는 투로 말했지만, 서원은 이미 결정을 지은 거라는 듯 동요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이가 생기리라는 기대조차 한 적 없지만……, 지우면 다음에는 기회가 영영 없을 거래요.”

“서원아. 꼭 아이를 낳아야만 하는 건 아니잖니…….”

“제가 낳고 싶어요.”

“…….”

“엄마도, 그래서 저를 낳은 거잖아요.”

서원이 지희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서원이 배 속에 있을 시절에 아빠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니, 저도 다르지 않다는 말이었다.

“하…….”

서원의 확고한 의지에 지희는 작게 숨을 내뱉었다.

간만에 아들이 온다고 해서 마냥 좋기만 했는데, 이런 폭탄선언과 함께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서원이 어떤 아이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제가 설득하더라도 서원이 마음을 바꿔먹지 않으리라는 것도, 그리고 이곳에 와 제게 사실을 털어놓기까지 얼마나 마음의 준비를 했을지 또한.

심려가 깊은 아이라 숨기고 싶었을 것을 겨우 털어놓은 것일 터다. 제가 유일한 가족이기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지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아이는 일찍 철이 들어서 어렸을 적부터 속을 썩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랬는데……. 오늘 딱 한 번. 그 길을 벗어나서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하는 아이를 제가 어떻게 말릴 수 있을까.

“……엄마가 도와줄 건 없을까?”

그녀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한참 고민하다가, 끝내 백기를 들었다.

반대를 할 수 없다면, 그 누구보다 아이의 편이 되어 줘야만 했다.

임신도,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든 일이니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 도와주고 싶었다.

* * *

“윽…….”

도겸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심기 불편한 알파 페로몬이 이사실을 가득 메웠다.

그가 갑갑함에 거칠게 넥타이를 잡고 끌어내리자, 곁에 있던 배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하얀 약 봉투를 도겸에게 내밀었다.

“전무님. 약을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봉투 안에는 며칠 전 주치의로부터 처방받은 페로몬 진정제 및 진통제가 들어 있었다.

도겸은 그날 이후, 몇몇 오메가를 더 만나 봤지만 만날 때마다 불쾌감뿐이라 결국 페로몬을 빼내지 못했다. 특히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을 맡으면 기분이 더러워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오메가의 페로몬이 역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도겸은 제 몸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 주치의를 찾았다.

주치의는 이 정도로 아프다면 각인 문제일 수도 있다며 관계를 맺어 오던 오메가와 함께 검사받기를 권했다. 여태까지 관계를 맺은 사람은 윤서원밖에 없으니, 그와 각인이 맺어진 게 아니냐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도겸은 그럴 리 없다고 부인했다. 각인은 사랑할 때나 이뤄지는 것이었다. 열렬히 짝사랑하다 보면 일방적인 각인이라는 불행한 일도 일어나긴 하지만, 도겸은 제가 서원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겠냐며 가벼이 넘어갔다.

그러나 페로몬 체증으로 오는 증상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줄 정도로 사람을 갉아먹었다. 가슴이 갑갑하고 온갖 것에 예민해지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너무 심할 땐 약을 먹으라는 주치의의 권고를 받고 약을 처방받기까지 했으나, 도겸은 고개를 저어 그것을 거절했다.

그리곤 약보다도 다른 게 더 급하다는 듯 배 비서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도겸은 잠시 약 봉투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됐어, 놔둬. 그것보다 윤서원은 어떻게 됐지?”

약이고 뭐고, 오메가를 안으면 단번에 해결될 일이었다. 다시 윤서원을 데리고 와서 계약 조건을 제시할 생각으로 오전 중에 배 비서에게 연락을 넣으라고 했는데, 왜 감감무소식인지.

어려운 걸 시킨 것도 아닌데 잊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도겸이 참다못해 먼저 묻자, 배 비서가 난감하다는 듯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 아직 연락이 안 닿았습니다.”

“뭐?”

“메시지도 남겨 보고 전화도 해 봤는데 아직 회신이 없으십니다.”

“……또 집에 쓰러져 있는 거 아니야?”

배 비서의 말에 도겸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대답했다. ‘또 쓰러졌다’라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저번에 가족 휴가라고 하고 휴가를 썼던 날처럼 아파서 집에서 꿈쩍도 못 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순간 몸에 핏기가 싹 가시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파트너를 그만두겠다고 했던 날에도 딱히 안색이 좋진 않았지.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했고.

윤서원은 아프면 아프다고 잘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꽁꽁 숨기는 편이었다. 저번에서 돌아왔을 때도 그렇고 잠자리를 나눌 때도 그랬다.

윤서원과 함께 침대에 있을 때면 가끔 저도 주체하지 못할 만큼 욕정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적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몰아칠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에도 서원은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관계가 끝난 후 음부가 퉁퉁 부은 것을 본 후에야 제가 서원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달려들었구나, 하고 반성할 뿐이었다.

아무튼 정말로 서원이 집에 혼자 쓰러져 있다면 큰일이었다. 도겸은 서랍장을 열어, 아파트 비상 열쇠를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서원네 집으로 가지.”

“네? 업무는…….”

“지금 그게 문제야? 내가 고작 저만큼을 오늘 안에 처리 못 할까 봐?”

“……죄송합니다. 차 준비시키겠습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았고, 백화점의 전무 이사로 있으면서 책임져야 할 것도 많았다.

그렇지만 오늘 안에 못 처리할 만큼 능력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사람이 걸린 일이었다. 쓰러져 있을 거라는 건 추측뿐인 데다가, 언제부터 도덕심이 투철했는지 몰라도 지금은 빨리 윤서원의 상태를 살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도겸은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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