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서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서원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확인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기를 품으셨다고요. 임신 초기에는 다들 어지럽고 속도 안 좋고들 그래요.”
“…….”
의사의 친절한 설명에 서원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근래 조금만 움직이면 어지럽고, 속이 역하고, 토할 것 같고……. 지금 생각해 보면 임신과 비슷한 증상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인터넷에서 히트사이클을 처음 겪은 오메가들이 겪는 증상들과 비슷해서 다들 당연히 그러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설마하니 제가 임신을 했을 거라고는 아예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제 체질이 열성 오메가인데다가 그날 도겸이 챙겨 준 사후 피임약까지 먹었으니 아예 그쪽으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 임신이라니.
순간 이명이 온 것처럼 귀가 먹먹해졌고, 두 눈은 초점을 맞추기 힘들 정도로 흐려졌다. 서원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뜯으며 어찌할 줄을 모르는데, 의사는 축하의 말을 전했다.
“축하드려요. 열성 오메가는 임신이 쉽지 않은데.”
“저, 정말 제가 임신을 한 게 맞나요? 오진일 리는 없고요?”
“놀라신 것도 이해해요. 저희도 열성 오메가셔서 몇 번이고 재검사를 해 봤는데, 임신은 확실합니다.”
“…….”
“자세한 개월 수는 검사를 더 해 봐야 알겠지만, 임신 초기니 조심해야 합니다. 격한 운동은 해서는 안 되고…….”
의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서원의 앞에서 유의사항을 늘어놓았다. 그렇지만 그 말들이 혼란스러운 서원의 귀에 제대로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열성 오메가로 진단받은 이후, 서원은 한 번도 제가 임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열성 오메가가 임신한다는 건 거의 기적과도 같은 확률이었으니까.
미국에서 히트사이클과 러트, 거기에 노팅까지 함께 겪었으니 조금 위험할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사후 피임약까지 먹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인생이 기차라면, 별생각 없이 정해진 노선대로 향하다가 갑자기 선로가 뒤바뀌어 탈선이라도 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제 몸에 새로운 생명이 움텄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이 커다란데, 그것만큼 더 무서운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절대로 가져선 안 될 남자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도겸은 임신을 극도로 원치 않았다. 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의 아이를 빌미로 옆자리를 꿰차려고 할 수도 있고, 그의 성질을 이용해 좋은 체질의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 것도 있어서라고 했지만…….
그것보다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아이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극도로 혐오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제가 임신을 하게 됐으니, 너도 그 추악한 오메가들과 똑같다고 손가락질을 당할 것 같았다.
그와의 인연이 끊기는 것은 당연하고, 아이를 지우라고 할 게 분명했다.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자마자 지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눈앞이 아득했다.
“윤서원 씨. 서원 씨?”
“아, 네……!”
의사의 부름에 서원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서원이 창백해진 얼굴로 의사를 바라보자,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 작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열성 오메가이시니까 생각도 못 하셨겠죠. 놀라신 것도 이해해요. 그렇지만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더 단단히 먹으셔야 해요. 아시다시피, 열성 오메가는 임신한 후에도 관리가 쉽지 않거든요.”
“아…….”
열성 오메가가 임신한 것도 기적이라고 불릴 만했지만, 임신한 후에도 일반 오메가보다 훨씬 더 세심한 관리가 필요했다. 그만큼 아이를 잃기도 쉬웠다.
서원이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가 마저 설명을 이었다.
“알파의 페로몬이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니, 되도록 오랜 시간 같이 있는 게 아이에게 좋습니다. 아이의 아빠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해 주세요.”
“…….”
아이의 아빠와 함께…….
그녀는 어떻게 해야 앞으로 아이를 보호하고 무사히 낳을 수 있는지 강조했다. 그렇지만 서원의 머릿속은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움 뿐이었다.
스물여섯에 인생 최악의 난제에 부딪혔다.
* * *
임신이라는 진단을 받은 서원은 새파란 얼굴로 병원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떡하지……? 그에게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정말 지워야 할까?
저의 첫 번째부터 마지막까지의 경험은 전부 다 그와 함께였다. 누구의 아이인지 분명하니 아이를 지워야 한다는 결론이 뚜렷하게 나왔지만…….
서원은 열성 오메가였다. 아이가 생길 확률이 신이 점지해 주는 수준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희박한 열성 오메가.
안 그래도 임신할 확률이 낮은데 아이를 지우기까지 하면, 다음에 아이를 품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머리가 복잡해서 터질 것만 같았다.
“하아…….”
서원은 한숨을 쉬며 걷다가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담배 냄새에 고개를 들었다. 좀 멀리 흡연 부스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도겸도 종종 담배를 피웠기에, 서원은 담배 냄새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임신했다는 진단을 받은 후라서 그런 걸까. 왠지 조금도 맡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빨리하는데 속이 안 좋았다. 진단을 받기 전에도 몸이 좋지 않았건만, 임신이라는 진단을 받으니 더 어지럽고 속도 안 좋고 피곤한 느낌이었다.
일단…… 집으로 가야겠다. 집으로 가서 쉬면서 생각을 해 봐야겠다고 택시를 잡으려고 할 때였다.
지이잉, 지이이잉.
주머니 안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힘없이 핸드폰을 꺼내 바라보자, 액정에는 ‘서도겸 도련님’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떠 있었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서원이 이름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서원은 전화가 온 줄 몰랐던 척 받지 않을까 했다. 그렇지만 피했다가는 저번처럼 그가 집에 쳐들어올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서원은 침울함에 낮게 가라앉은 목을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윤서원입니다.”
- 왜 메시지 확인을 안 해?
도겸은 가타부타 인사할 것도 없이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갑고 건조하기 짝이 없었으나, 귀에 담아두고 싶을 정도로 멋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너무 좋아해서, 남몰래 업무지시를 통화로 전할 때 녹음을 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서원은 왜인지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 그 누구보다 저와 함께 있어 줬으면 좋겠으면서도, 이 순간에 절대로 같이 있어선 안 될 상대라는 게 저를 바닥으로 치닫게 했다.
서원은 도겸에게 제 넘실거리는 감정을 들키지 않도록 꾹 일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뒤늦게 대답했다.
“병원 좀 가느라……, 확인을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병원? 거기서 뭐래.
순간 도겸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그도 서원에게 계속해서 병원에 가라고 했었으니, 도대체 어디가 아파서 그랬던 건지 궁금한 눈치였다.
제가 임신을 했대요……. 도련님의 아이를요.
서원은 그 말을 할까 하다가 아랫입술을 꾹 다물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알려야 할 상대였으나, 그에게 알리는 게 맞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한…… 몸살이었습니다. 히트사이클 때문에 페로몬에 살짝 이상이 생겼었나 봐요. 그런데 무슨 급한 일 있으십니까?”
- 아아, 급한 일은 아니고. 오늘 열한 시쯤이나 호텔에 도착할 것 같으니까 먼저 가서 쉬고 있으라고.
서원이 적당히 둘러대자, 도겸은 겨우 그런 거였냐는 듯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서원은 오늘 약속이 원래 오후 아홉 시였던 것을 떠올리며, 열한 시면 원래 잠들 시간이었지만 그때까지 깨어 있어야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 그럼, 이따가 보지.
도겸은 이 말을 하려고 전화했다는 듯 바로 전화를 끊었다. 서원은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 새카매진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
생각해 보니까 이런 몸 상태로 약속 장소에 가면 안 되지 않나…….
해야 할 일이 떠올랐지만, 서원은 회피하듯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 * *
[17:43 윤서원] 도련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연락 부탁드립니다.
[21:24 서도겸 도련님] 시간 없어. 가서 봐.
“하아…….”
서원은 거의 네 시간이 지나서야 온 답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병원을 다녀오고 난 후로 집에서 몇 시간을 내리 고민하고 보낸 메시지였으나, 도겸에게서 온 답장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서 말하기가 두려워서 전화로 하려던 거였는데……. 그렇다고 메시지로 할 만한 대화도 아니라서 메시지만 덜렁 보낼 수도 없었다.
결국 서원은 도겸과 늘 관계를 맺던 호텔의 스위트룸에 먼저 가서 그를 기다렸다. 십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영겁 같은 시간을 기다려, 열한 시가 됐다.
- 삑.
스위트룸에 카드를 찍고 들어오는 소리였다. 서원은 그 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켜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도겸은 일이 이제 막 끝났는지 평소보다 예민하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6년 동안 페로몬 파트너를 해 왔음에도, 제게는 여전히 어려운 도련님이라서 먼저 말을 거는 게 어려웠다.
서원이 쭈뼛거리며 어떻게 말문을 틀지 고민하는데, 도겸이 나와 있는 서원을 보고는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신경질적으로 보였는데, 아니었던 걸까? 미묘한 차이였지만 긴장이 조금 풀려, 바로 그에게 말을 걸려던 참이었다.
“저, 도련……, 흡!”
입을 연 순간, 도겸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맞춰왔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라서 그의 가슴께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벽에 밀리는 게 먼저였다.
다행히 도겸이 서원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 준 덕분에 벽에 머리를 박지는 않았지만, 등 뒤로 딱딱한 벽이 부딪히듯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