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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6/136)

<16화>

“…….”

그나마 다행인 건 일인용 침대가 아니라는 걸까?

서원이 이 집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가구, 전자제품들은 전부 비닐도 뜯지 않은 새것으로 놓여 있었다. 아마 제가 안 들어왔다면 세를 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서원이 이 집에 머물게 되면서 가구들도 자연스레 연식이 들었다. 이 침대도 벌써 6년이나 됐으니 바꿀 때도 됐지만, 좋은 침대인 건지 고장이 나질 않았다. 제 명의의 집도 아니다 보니 굳이 가구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내버려 두기도 했다.

서원은 조금 고민하다가, 이렇게 서 있어도 바뀌는 건 없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도겸의 옆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도겸은 정자세로 누워 있는 게 조금 불편했는지, 서원이 누워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잘 자.”

“……도련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가볍게 대답한 서원은 은은하게 방을 밝히던 탁상 스탠드까지 끄고 눈을 감았다.

그 어느 곳보다 마음이 편한 우리 집, 내 침대, 늘 자던 시간, 어두컴컴한 방까지. 수면을 위한 완벽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왠지 서원은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오지를 않았다.

최근 며칠은 눕기만 하면 바로 잠들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는데, 몸이 괜찮아져서 그런 건지 도겸이 곁에 있어서 그런 건지 잠이 오지를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체감상 삼십 분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눈만 감고 있었던 것 같다. 이대로 잠들기는 그른 것 같아, 서원은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도겸을 바라봤다.

“…….”

도겸은 벌써 잠들었는지, 고르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가만히 감고 있었다.

빛이라고는 창밖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불빛뿐인데, 그의 자는 얼굴을 자주 봐서 그런지 쉽게 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와 함께 잘 때, 새벽에 뒤척거리다 깨거나 그보다 일찌감치 깼을 때마다 그의 모습을 이렇게 훔쳐보고는 했다.

그의 자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매번 기분이 좋았다. 그가 저 말고는 다른 파트너를 둔 적은 없으니, 이런 모습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가족 외에는 저밖에 없을 거라고, 이상한 충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그의 모습을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관계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6년이라는 세월 동안 파트너 관계는 잘 유지되긴 했지만, 며칠 전 러트와 히트사이클을 겪기도 했고, 이제 그도 나이가 있으니 결혼을 생각할 때가 됐다.

최근 사모님이 선 자리를 잡아 주려고 노력하기도 하셨지. 도겸은 그런 자리는 딱 질색이라고 선을 긋기도 했고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사모님은 포기하지 않은 눈치였다. 그의 나이는 둘째치더라도 사모님은 제 존재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듯했으니 어떻게든 옆자리에 누군가를 끼워 넣으려 할 것이다.

그가 결혼하거나 저번과 같은 일이 한 번 더 생긴다면, 정말로 끝이 나겠지.

서원은 여태까지 그의 파트너로 있으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고.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옆자리를 지켜 왔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그 관계의 끝이 보이는 듯한데, 마음은 계속해서 도겸에게로 향했다. 매사에 그렇게 까칠하면서도, 오늘처럼 챙겨 주고 같이 자고…… 그럴 때마다 괜히 욕심을 부리게 됐다.

“후…….”

서원은 작게 숨을 내뱉었다. 발현할 때부터 그를 줄곧 좋아했으니, 벌써 12년째 짝사랑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끝이 명확하고 저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그에게 의존하지 말고 새로운 할 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사색에 젖을 때마다 찾아오는 현실적인 고민에 잠겨 있는데, 순간 가만히 있던 도겸이 입을 열었다.

“왜 안 자.”

“네? 아, 안 주무셨어요?”

“시선이 열렬해서 잘 수가 있어야지.”

도겸은 자다 깬 것도 아니고, 애초에 잠든 것도 아니었다는 듯 졸음 하나 없는 눈빛으로 서원을 마주했다.

그도 삼십 분 내내 자지도 않고 그냥 눈 감고 숨만 쉬고 있었던 건가? 피곤하다고 했으면서.

아니, 그것보다…… 보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자는 척을 하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서원은 민망함을 괜히 도겸의 탓으로 돌리며, 그에게 짧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제 안 볼게요.”

반대쪽으로 아예 몸을 돌려 시선을 두지 말아야겠다……. 서원이 그런 생각으로 몸을 반대로 돌리려는데, 순간 팔뚝이 붙잡혔다.

“누가 그러래? 이쪽 보고 누워.”

“저 때문에 못 주무신다면서요.”

“등지는 게 더 싫어.”

“…….”

마주 보되, 눈은 뜨지 말라는 건가? 그것도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도련님의 변덕이야 늘 있었던 일이었기에 서원은 다시금 몸을 도겸 쪽으로 돌리고 누웠다.

그가 손을 뻗어 서원의 머리칼을 살짝 정리해 주며 물었다.

“왜 안 자고 쳐다보고 있었어.”

“그냥, 뭐……. 잠이…… 안 와서요.”

잠이 안 오기도 했고, 도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생각이 깊어져서도 있었지만……. 어떤 생각을 했느냐까지는 그에게 말할 의무는 없었다.

서원이 적당히 둘러대는데, 도겸이 대답을 듣곤 잠잠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도와줄까.”

“……네? 어떻게요?”

수면을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지? 눈을 감고 양 한 마리, 두 마리 세라고 시키기라도 하려고? 아니면 그가 잠이 안 올 때 쓰는 혼자만의 방법?

조금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도겸이 그대로 서원의 어깨와 뒷머리를 감싸고 양팔로 끌어안았다.

눈 깜짝할 사이 그의 가슴팍에 코를 박게 된 서원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어엇……? 가, 갑자기 이게 뭐하는…….”

“불면의 이유 중 대부분이 심리적 요인이래.”

“네……?”

“오메가는, 알파 페로몬에 안정감을 느낀다고 하니, 이러면 잠이 오겠지.”

그의 말은 즉, 안고 있으면 알파 페로몬이 더 잘 느껴지니 안겨 있으라는 뜻이었다.

어떤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았다. 적정한 수준의 알파 페로몬은 오메가에게 정신적인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했으니까. 마음이 안정되면 잠이 잘 올 거라는 뜻이었다.

“그, 그래도 이건 좀…….”

“왜, 나 의식돼?”

“이러고 있는데 의식 안 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의 뜻은 이해한다지만, 그의 품에 안겨 있자니 안정감은커녕 더 긴장되고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이런 자세로는 아예 잠도 못 자고 밤을 지새울지도 모른다.

서원이 대꾸하며 도겸을 한 번 더 밀어내려고 하는데, 반대로 그의 팔에 더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그는 커다란 돌덩이처럼 꿈쩍도 밀리지 않고 귀찮다는 듯 말했다.

“별 의미 없으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눈 감고 자.”

“…….”

그 말에 서원은 순간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던 손에 힘이 축 빠지는 것을 느꼈다.

허탈했다.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몸을 겹쳐도 도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게. 의식하는 건 저 혼자뿐이라는 것이. 그의 곁에 있으면서 몇 번이고 느꼈던 것이지만, 오늘은 체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서원은 도겸이 안하무인에 제멋대로 행동하는, 저 잘난 것만 아는 알파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필요 이상으로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이 그러했다.

그래서 그가 이런 행동을 할 때마다 혹시 하고 기대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제게도 이러는데,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더 잘해 주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더 마음이 심란해졌다. 서원이 오히려 그의 품에 더 바싹 안기자, 알파 페로몬이 포근하게 이불처럼 덮였다.

도겸은 안정을 도와주기 위해서인지 서원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리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서원에게 말했다.

“내일 꼭 병원 가.”

“……알겠습니다.”

서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앞으로도 계속 도겸의 곁에 있어도 되는 건지 근본적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지만, 그에게 안겨 있자니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래서 내가 당신을 놓지 못하는 건가 봐.

기대하지 말자고 몇 번이고 되뇌면서도 기대하다니. 서원은 제 자신이 바보 같다고 느끼면서도 차마 도겸의 옷자락을 놓을 수가 없었다.

* * *

“이 병원은 처음 방문하셨어요?”

“아니요. 저번에 검사받았고, 오늘 결과 받는다고 했어요.”

“아아. 그럼 성함 말씀해 주시겠어요?”

“윤서원이요.”

대학병원의 카운터. 서원은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접수를 했다.

잠시만 앉아 있어 달라는 간호사의 말에, 서원은 의자에 앉으며 모자를 벗고 부채질을 했다.

“후……. 더워.”

며칠 안 나온 사이에 날씨가 후덥지근해져 있었다. 곧 여름이 다가오려나 보다.

도겸과 하루를 지내고 난 후, 며칠 내내 끙끙 앓았던 것이 거짓말처럼 나았다.

서원이 생각하기엔 히트사이클 이후로 아팠던 것이니 알파의 페로몬으로 안정을 찾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병원을 갈 필요성도 못 느끼고 곧바로 출근하려고 했으나 도겸은 혹시 모르니까 병원도 가 보고, 며칠 더 쉬라고 했다.

아픈 사람을 파트너로 두어 적절한 시기에 페로몬을 못 푸는 것도, 아픈 사람을 안는 것도 도겸의 취향이 아니라고 했으니, 나름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날 온갖 세세한 정밀 검사를 다 받고, 오늘은 검사 결과를 받는 날이었다.

몸이 훨씬 가뿐해졌으니 별것 아닐 것 같아 발을 까딱거리며 기다리는데, 잠시간 뒤에 진료실 앞에 있던 간호사가 서원을 불렀다.

“윤서원 씨?”

“네.”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차례가 된 서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 의사분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거기 의자에 앉으세요.”

서원이 어색하게 인사하자, 의사가 친절하게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어정쩡하게 앉긴 했는데, 의사는 차트를 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막상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니 등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나 조용한지, 째깍째깍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괜히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의사가 당연한 것을 말하듯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임신이네요.”

“……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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