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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136)

<15화>

도대체 왜 이런 명령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솔직히 도겸은 그다지 다정한 성격은 되지 못했다. 안하무인에 자기만 아는 그런 성격이었다.

아프다고 해서 동정심이라도 든 걸까? 아니면, 제가 계속 휴가를 쓰면 페로몬 해소할 수 없으니까 빨리 나으라고 배려를 베푸는 걸까?

의아함에 서원이 도겸을 빤히 바라보는데, 그가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열 셀 테니까, 다 세기 전에 소파에 앉아.”

“네?”

“하나, 둘, 셋…….”

난데없이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숫자가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왠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열을 다 셀 때까지 소파에 앉지 않으면 어떤 페널티를 줄지 몰랐다.

특히 서원이 아는 도겸은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라’라는 말도 안 되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에 억지로 앉힐지도 몰랐다. 서원은 말을 더듬으며 후다닥 거실 소파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아, 앉으면 되잖아요…….”

고귀한 도련님이 설거지하겠다는 게 믿기지 않고 걱정돼서 그런 거지, 사실 그가 저 대신 집안일을 해 준다고 하면 좋은 일이었다.

결국 서원이 소파에 앉자, 도겸은 만족스럽다는 듯 한쪽 입매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말했다.

“거기서 꼼짝하지 말고 있어.”

“…….”

꼼짝도 하지 말라니. 그게 더 힘들 것 같은데…….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이것대로 고문일 것 같았다.

서원은 애꿎은 손만 꼼지락거리다가, 핸드폰을 보는 척하며 은근슬쩍 시선을 도겸에게로 돌렸다.

솔직히 말해서 도겸이 못 미더운 점도 있었다. 너무나도 고귀해서 설거지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데, 그릇을 깨거나 아니면 제가 다시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심정으로 힐끗힐끗 훔쳐보는데, 의외로 도겸의 자세는 안정적이었다.

그의 나이가 서른하나라는 걸 떠올리면 설거지는 할 줄 아는 게 정상에 가까웠으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훔쳐보는 것도 잊고 대놓고 구경하는데, 그새 도겸은 손을 씻고 있었다.

이렇게나 빨리? 서원은 그가 설거지를 다 마쳤음을 알아채자마자 얼른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 그가 설거지한 그릇들을 힐끗힐끗 확인했다.

서원이 생각하기에 도겸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 봤을 인간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설거지나 할 수 있을까 불안했는데, 기우였는지 전부 깨끗했다.

믿을 수가 없네……. 서원이 물을 마시는 척 새로 설거지한 컵을 꺼내 보고 있는데, 도겸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뭘 그렇게 확인까지 하고 있어.”

“화, 확인한 건 아니고…….”

“거짓말 진짜 못 하지.”

다 드러나는 거짓말을 왜 하냐는 듯한 도겸의 말에 서원이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서원이 평소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편이기도 했고, 잘 숨기는 편도 되지 못했다.

그에게 작정하고 거짓말을 하려고 한 적이 없기도 했지만, 안 그래도 거짓말을 잘 못 숨기는 편인데, 그의 앞에 있으면 너무 긴장되고 떨려서 더 티가 나는 것이었다.

서원은 이미 들킨 거,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작게 숨을 내뱉곤 입을 열었다.

“솔직히…… 설거지를 해 보셨을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요.”

“참나, 유학 갔을 때 혼자 살아 봤어.”

도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으나, 서원은 유학이라는 말에 몸을 굳혔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도겸은 유학 갔을 때의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

도겸의 갑작스러운 유학은 서원에게도 좋은 기억은 아닌지라 굳이 물어보지 않았기도 했지만……. 그도 마찬가지로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눈치라 물어보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먼저 유학 이야기를 꺼낸 것이 놀랍고 신기했다. 서원은 바닥으로 떨궜던 시선을 올려 도겸을 응시한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고용인은…… 안 데려가셨어요?”

“응. 도움 없이 혼자 살아 보고 싶다고 그랬어. 그래서 웬만한 건 그때 다 해 봤지.”

“…….”

“왜 그랬는지 몰라. 고등학교 3학년에 뒤늦은 사춘기라도 왔었나 봐.”

도겸이 대답하며 살짝 헛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유학길을 선택했을 만큼 왜 그렇게 마음이 복잡했던 건지 지금에 와서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사춘기라……. 어렸을 적 봐온 그는 원래부터 극도로 까칠하고 예민해서 그런지 사춘기가 온 것처럼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딱 한 번, 그의 모습이 180도 달라진 적이 있었다.

장난처럼 가벼운 입맞춤한 그 날 이후로 도겸은 완전히 달라졌다. 하루가 멀다고 찾아오던 제 방은 오지 않았고, 갑자기 공부에 뜻이 생긴 사람처럼 공부만 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유학을 가 버리기까지 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도겸은 마치 그날의 사건이 없었던 것처럼 굴기에, 서원은 그에게는 그 정도의 사소한 사고였던 걸까 하며 조금 서운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만일 그 사건 때문에 도겸이 마음을 바꿔먹고 유학을 택한 거라면?

그날 도겸이 어떤 생각을 했고, 왜 갑자기 변한 건지는 여전히 미스테리였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인생을 뒤흔들 만큼의 큰 사건이었다고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서운함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도 저를 생각했던 것 같아서.

서원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도겸은 홀가분하다는 듯 표정을 풀며 마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미국 가서 마음이 많이 정리됐어. 갔다 오길 잘했지.”

“……다행이네요.”

사춘기 때 어떤 불안함이 들어서 유학행을 결정한 건지, 가서 어떤 마음의 정리를 했는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어쩐지 도겸이 대화를 급히 수습하는 것 같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분위기상 왠지 그에게도 좋은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다음에 또 들을 기회가 있겠지 하며 아쉬움을 느끼는데, 도겸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했다.

“그럼 이제 자자. 시간 늦었다.”

“네?”

“저쪽이 네 방이었지?”

도겸이 갑자기 걸음을 옮기더니, 서원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방……? 서원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도겸은 서원의 방문 앞까지 가 있었다.

그의 모습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갑자기 자고 가겠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서원은 다급히 도겸의 손을 잡아 그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자, 잠깐만요……! 자, 자고 가시려고요?”

“그럼?”

“왜, 왜요?”

“시간이 늦었잖아.”

도겸은 서원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듯 대답했다.

시간이 늦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자고 가야 할 정도로 늦은 시간도 아니었다. 그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열차 시간이 끝났다고 해서 여기서 묵고 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서원이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고 우물쭈물하는데, 도겸이 힐끗 잡힌 손을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놀라? 같이 자는 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아니…….”

서원이 말끝을 흐렸다. 이따금 도겸의 집에서 묵고 갈 때가 있긴 했지만, 그때는 관계를 맺은 후 정말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 날이나 기절한 날에나 그랬다.

그러면…… 설마, 그런 의미로 자고 가겠다고 한 걸까?

생각해 보면 제가 도망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도 계속 남아 있을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면…… 혹시, 하실 건가요?”

“뭘?”

“그……, 관계 말입니다.”

서원이 조금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연차를 썼으니 관계를 맺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굳이 이 집에서 같이 자고 가겠다는 건 그걸 원하는 걸지도 몰랐다.

만약 도련님이 그걸 원한다고 하면……, 해야 하는 거겠지? 여전히 몸이 다 낫지도 않았고 휴가도 쓰긴 했지만, 그래서 가지 않았던 거라면…….

“하…….”

서원이 생각을 이어 가는데, 갑자기 도겸이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윽고 그는 말투는 냉랭히, 그러나 서원에게 잡혀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떨쳐 내며 대답했다.

“안 해. 아픈 사람 붙잡고 하는 취향도 없고, 송장 치우는 취미도 없고.”

“그 정도는 아닌데…….”

“윤서원, 나 피곤해. 쓸데없는 거 묻지 말고 얼른 잘 준비나 해.”

“……죄송합니다. 갈아입을 옷이랑 칫솔 찾아드릴게요. 쉬고 계세요.”

서원은 오해했던 것이 민망해, 그를 소파에 앉게 하고 후다닥 방에 들어가 간단히 방을 정리하고 그가 잘 때 입을 옷과 세면도구를 챙겼다.

챙기면서 순간 얼렁뚱땅 그를 재우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를 쫓아낼 깜냥이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이 아파트가 도겸 명의라 집주인을 쫓아내는 것도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

“여기요.”

“나 먼저 씻을게.”

“……네.”

서원이 도겸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 주자, 그는 언제 차가운 반응을 보였냐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도겸이 먼저 욕실로 들어가고, 서원은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서서 남몰래 숨을 돌렸다.

제가 왜 그런 오해를 했었는지 민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겸 답지 않은 행보를 보였으니 오해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건지, 좀처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 * *

차례로 서원도 씻고 머리를 말리니, 정말 잘 시간이 됐다.

도겸과 함께 방으로 들어와 자려고 하는데, 뭔가 어색했다. 그와 잠자리를 하지 않고 같은 침대에서 잔다는 것이. 그것도 제 침대에서 그와 함께 잔다는 것이 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저 혼자 의식하고 있는 거란 걸 안다. 그래도 마음이 그렇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원이 차마 먼저 눕지도 못하고 쭈뼛거리는데, 도겸이 마치 제집 침대에 눕는 것처럼 먼저 한 자리를 차지하곤 옆자리를 톡톡 쳤다.

“윤서원, 이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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