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범법자도 아닌데 웬 도망? 서원은 제가 그에게서 도망이라도 쳐야 할 만큼 무슨 문제라도 일으킨 건가 싶었지만, 그는 휴가를 운운했다.
휴가 사유를 ‘병가’라고 쓰면 이것저것 캐물을 것 같아, 대충 ‘가족 여행’을 적어 제출했었다. 그런데 멀쩡히 집에 있으니, 그는 서원이 일부러 자신을 피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왜 그가 왜 그렇게 버럭 화를 내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뭔가 회사에 문제가 생겼는데, 제가 문제를 일으키고 도망을 친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일주일씩이나 페로몬을 빼지 못해서 예민해진 건가?
서원은 일단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아, 일단 도망 같은 걸 친 게 아니라며 급히 해명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병가라고 쓰면 걱정하실까 봐 가족 여행으로 적었던 겁니다. 그리고 여기가 도련님의 아파트인데, 여기로 도망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서원은 제가 진짜 도망이라도 쳤다면, 집에서 이러고 있겠냐고 덧붙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서원이 머무는 아파트는 도겸의 명의였다. 이전에 파트너를 제안할 때부터 내걸었던 복지 중 하나가 집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맨몸으로 저택에서 나오게 됐을 때, 월세로 원룸을 구하지 않고 바로 좋은 집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됐다. 따로 집세도 받지 않는 터라 굉장히 좋은 복지라고 할 수 있었다.
서원의 해명이 통했는지,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던 도겸의 표정이 사그라들었다. 그러고는 묘하게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서원의 뺨을 감싸며 물었다.
“병가? 어디 아파?”
뺨에 닿는 손길이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도겸과 있으면 이런 게 문제였다. 평소에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인색하면서 아프다고 하면 순간 다정해져서. 단순히 몸뿐인 관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기대하게 됐다.
차라리 몸을 겹치는 건 익숙해졌는데, 이런 사소한 것에는 왜 이렇게 하나하나 반응하게 되는 건지. 서원은 귓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작게 대답했다.
“단순한 몸살입니다.”
정확히는 히트사이클을 러트와 함께 보냈기 때문이었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도겸을 탓하는 게 됐다. 안 그래도 계약 위반으로 파트너를 그만두네, 어쩌네 했었기에 그런 말은 삼키게 됐다.
그렇지만 도겸은 이 대답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와락 좁혔다.
“단순한 몸살은 일주일이나 가지 않아. 그때도 안색이 안 좋았던 것 같은데. 병원은 갔어?”
“아뇨…….”
“가 보라고 했잖아.”
미국에서 돌아온 날 그가 제게 병원을 가 보라는 말을 하긴 했었다. 산부인과를 가 보라는 말인 줄 알았는데……, 걱정해서 그런 거였구나.
보통 임신인지 알아보려면 관계 후 조금 시간을 두고 가야 정확하게 검사를 받을 수 있기에 안 갔던 건데……. 이런들 저런들 병원은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다음에, 갈게요…….”
“…….”
서원의 대답에 도겸의 마뜩잖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는 어쩐지 지금 당장 병원에 갔으면 싶은 얼굴이었다.
뭐라고 할 것만 같은 얼굴이었지만, 다행히 그는 병원 문제로 더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핸드폰은 왜 꺼 놨어?”
“……꺼져 있었나요?”
도겸의 물음에 서원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생각해 보면, 정신이 없어서 핸드폰을 충전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딱히 연락이 올 곳도 없기도 했고…….
서원이 얼빠진 반응을 보이자, 도겸이 멈칫하더니 별안간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자조적인 말투로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하……. 갖은 방법으로 사람 미치게 하네.”
“저, 혹시 회사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도망이라는 것도 그렇고.”
“알 필요 없어.”
“…….”
혼잣말을 들은 서원이 조심스레 물었으나, 그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뭐지. 회사 내부에 비밀스러운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
무슨 일이었던 건지 궁금하긴 해도 오해는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서원이 작게 안도의 숨을 내뱉는데 도겸이 여전히 서원의 보들보들한 뺨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방금 일어나서…… 아직입니다.”
왜 이렇게 뺨을 만지작거리는 건지. 아까까지만 해도 열이 떨어졌었는데, 금세 다시 오른 걸까? 그와 있으면서 얼굴이 열이 오르는 걸 느끼기도 했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집에 먹을 건 있고?”
“죽 해서 먹으려고요.”
“그럼 누워.”
“네?”
분명 죽 해 먹을 거라고 대답했는데, 왜 갑자기 누우라고 하지?
서원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고 의문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서원의 뺨에서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사 올 테니까 기다리라고.”
“네? 집에 있는 거로 해 먹으면 되는데…….”
“네가 해 먹어 봐야 흰쌀 죽이지. 기다려.”
“아니…….”
그건 맞는데……. 서원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도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빠져나갔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서원은 서서히 닫히는 현관문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도겸이 갑자기 집을 찾아온 것부터, 대뜸 죽을 사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하는 것까지 전부 다 비현실적이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던데. 아픈 건 서원인데 왜 그가 안 하던 짓을 하는 건지 적응이 되지를 않았다.
* * *
“먹어.”
“……감사합니다.”
도겸이 죽이 든 종이봉투를 내밀기에, 서원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는 정말 금방 돌아왔다. 평소 서원과 걸음 속도가 비슷한 편이었는데, 어떻게 이리 빨리 다녀온 건지 모르겠다. 죽집까지 걸어서 십 분은 걸리고, 주문하고 조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있을 텐데…….
서원은 그가 사 온 죽을 식탁 위에 정리하면서 은근슬쩍 손을 씻고 나온 도겸의 얼굴을 훔쳐봤다. 바깥에 바람이 많이 불었는지 그의 머리칼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서원은 그가 머리를 단정하게 포마드 형식으로 넘긴 것도 좋아했지만, 자연스럽게 헝클어져 있는 머리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예쁜 이마와 곧은 눈썹이 조금 가려진다는 게 아쉽긴 했다. 그렇지만 공식 선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사적인 모습 같아서……. 괜히 그게 좋았다.
힐끗힐끗 조금씩 눈에 담고 있는데, 순간 고개를 든 도겸과 눈이 마주쳤다.
“뭐해, 안 먹고.”
“머, 먹을 거예요.”
서원은 괜히 시선을 들킨 것만 같아, 부랴부랴 죽이 들어 있는 통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전복죽이 들어 있었다.
입맛도 없고, 재료도 없어서 흰쌀 죽을 대충 해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맛있는 걸 먹게 됐다.
전복을 자주 접하지는 않다 보니 침을 꼴깍 삼키는데, 문득 도겸의 시선이 느껴졌다. 도겸이 서원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도련님도 드실 건가요? 반 나눠드릴까요?”
“너 다 먹어. 이거 잘 먹잖아.”
도겸의 말에 서원은 조금 의아해졌다. 제가 전복죽을 좋아하는 건 맞는데, 그의 앞에서 이걸 먹었던 적이 있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예전에 그의 일정을 따라 제주도에 갔었을 때, 조식으로 전복죽이 나왔었다. 제주도에서 갓 잡은 전복에 참기름의 고소한 맛이 더해져서 진짜 맛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때 이후로는 먹은 적도 없었던 것 같은데 기억력도 좋았다.
하기야, 전 세계에서 일 퍼센트만 갈 수 있다는 대학교를 졸업할 정도로 우수한 머리를 가지고 있지. 사사로운 것도 잘 기억하는 편이긴 했다.
서원은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그릇 하나를 꺼내 전복죽을 반쯤 덜어내며 말했다.
“어차피 저 이거 다 혼자서 못 먹어요. 아직 저녁 안 드셨죠?”
“…….”
“……아, 드셨나? 그럼 반은 냉장고에 넣어둘게요.”
“그럼 같이 먹어.”
안 먹을 기세기에 반은 냉장고에 보관해 두려고 했는데, 도겸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먹었는지 식탁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안 먹을 것처럼 굴기에 식사하고 온 건가 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혼자 먹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이랑 함께 먹는 게 좋았다. 게다가 도겸이 사 온 죽이니까.
그렇게 한술 뜨고 뜨거운 것을 호호 불어먹는데, 기대만큼 맛있지가 않았다. 평소에는 고소하고 맛있다고 생각했던 전복죽이건만,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비렸다.
서원보다 입맛이 까다로운 도겸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아 상한 것 같지는 않은데……. 정말 제가 어디가 아프긴 한가 보다.
서원이 편식하는 사람처럼 깨작깨작 먹자, 도겸이 먹다 말고 서원을 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 못 먹어.”
“입맛이 별로…… 없네요.”
“그렇게 새 모이만큼 먹으니까 안 낫는 거야. 입맛 없어도 먹어.”
“…….”
평소 서원이 하는 생각과 일치하긴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몸이 받아주지 않는 걸 어떡하라고.
그래도 그가 사 준 정성이 있으니 다 먹으려고 노력하는데, 먼저 식사를 끝낸 도겸이 계속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평소엔 그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열이 올랐지만, 오늘은 마치 다 먹는지 안 먹는지 감시라도 하겠다는 듯한 눈빛이라 조금 부담스러웠다.
왠지 체할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그렇다고 시선을 거둬달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또 언제 시선을 받아보겠냐는 생각이 있기도 했고, 오랜 시간 그를 도련님으로 떠받들어 왔기 때문에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먹기 싫은 것을 꾸역꾸역 먹자니 다 먹기까지 삼십 분이 넘게 걸렸다. 서원은 조금 피곤한 얼굴로 그에게 보고하듯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잘했어. 내가 치울게.”
“……도련님이 치운다고요?”
“왜?”
서원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으나, 도겸은 뭐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냐는 듯 뻔뻔하게 되물었다.
“원래 그런 일은 잘 안 하시니까요. 거기 두세요. 제가 할게요.”
“저렇게 쌓여 있는데 두면 퍽이나 하겠다. 기회 줄 때 쉬어.”
“…….”
도겸의 촌철살인에 서원이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일주일 동안 끙끙 앓느라 제대로 집안일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도겸도 알기야 하겠지만, 이렇게 정돈되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게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서원이 그래도 제가 하겠다며 자리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자, 도겸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직장 상사가 명령하는 거라고 하면 쉴래?”
“……저 오늘 휴가 썼는데요.”
“휴가면 상사 말 좆 까라 하고 안 들어도 돼?”
“그건 아니지만…….”
서원이 대꾸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아니, 세상에 어느 상사가 집안일 해 줄 테니 쉬라고 명령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