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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3/136)

<13화>

장시간 비행 끝에 돌아온 한국.

미국의 공항이나 한국의 공항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항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왠지 모를 안도와 편안함이 느껴졌다.

서원은 수하물로 부친 캐리어를 돌려받기 위해 레일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제 것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자, 서원의 캐리어가 레일 위에 나타났다. 반갑게 다가가 캐리어를 챙기는데, 먼저 캐리어를 받고 기다리던 배 비서가 은근슬쩍 서원에게 다가왔다.

“저, 서원 씨…….”

서원과 배 비서는 함께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종종 대화를 나누는 사이이긴 하지만, 이렇게 은밀하게 다가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

서원은 그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

“혹시 전무님이랑…… 싸우신 건 아니죠?”

“아…….”

배 비서가 한껏 눈치를 살피며 묻는 말에 서원이 작게 탄식했다. 평소에도 그리 말을 많이 나누는 편은 아니니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배 비서는 그 차이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서원과 도겸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여태까지 숱한 밤을 함께 보내 왔음에도 러트와 히트사이클은 둘에게 의미가 달랐다. 하마터면 임신이 가능한 상황이고 파트너 계약을 파기할 뻔하기까지 한 상황이어서 의미가 다른 게 아니라, 그 시기가 오면 완전히 이성을 잃은 날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도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서원은 그게 너무나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도겸도 러트가 왔으니 피차일반일 수도 있지만 서원은 아니었다. 저는 그를 좋아하니까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사랑할 수 있었지만, 도겸은 그게 아니지 않나.

설마, 그래서 파트너를 끊자고 한 건가?

계약을 위반한 건 둘째치고, 그 모습이 너무 보기 흉해서……. 그래서 그만두자고 했던 걸까?

짐승 같은 모습에 완전히 정이 떨어져 버리고, 그래서 더는 파트너라는 관계를 이어 갈 수 없었던 거라고 판단했다면…….

서원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지자, 배 비서가 놀란 얼굴을 하며 서원의 등을 감싸고 부축했다.

“아니, 서원 씨. 어디 아파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싸우지도 않았고요…….”

“그래요? 아……. 그럼 전무님이 왜 저러시지?”

서원이 아픈 게 아니라며 애써 표정을 풀어 보이자, 배 비서는 안심한 낯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예민하신데, 오늘은 더…….”

“거기서 뭐해.”

“어엇, 전무님…….”

배 비서는 한탄하듯 서원에게 호소하려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삼엄한 목소리에 퍼뜩 어깨를 떨며 어색하게 웃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도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원과 배 비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간 말도 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서원과 배 비서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봤다. 서원의 안색이 안 좋아진 탓에 배 비서가 부축해 주고 있는 모습은 퍽 사이가 가까워 보였다.

“윤서원. 이리 와.”

“…….”

도겸은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서원에게 말 한마디 걸지도 않았으면서, 갑자기 강아지 부르듯 했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만 생각하면 그의 곁에 가기 싫었으나, 방금까지 그가 제 히트사이클 때의 모습을 보고 완전히 정이 떨어진 게 아닌지 걱정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우습게도, 그가 저를 찾아 주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서원이 저를 부축하고 있던 배 비서의 곁을 떠나 도겸의 앞으로 가자, 그가 서원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 주며 말했다.

“허튼짓하지 말고 곧장 집으로 들어가. 병원 갈 거면 차 보내 줄 테니까 연락하고.”

“…….”

허튼짓이 뭐야……. 그리고 갑자기 병원 얘기가 왜 나오는 건지.

배 비서도 그렇고, 도겸 역시 제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본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라 산부인과를 가 보라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챙겨준 사후 피임약을 먹긴 했지만, 콘돔이나 미리 피임약을 먹는 것보다는 피임 확률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니까. 그러니까 작은 가능성도 놓치지 않고 병원을 가 보라고 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씁쓸했지만, 딱 거기까지인 관계였다. 서원은 기대감을 버리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

순순한 서원의 대답에 도겸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원을 내려다봤지만, 더 무언가를 말하지는 않았다.

* * *

“하아…….”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온 서원은 곧바로 침대에 엎어지듯 누웠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푹 잠들고 싶었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겨우 떠올리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 약 먹어야지…….”

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근육통이 오더니 속도 메스껍고 미열까지 올랐다. 얼마나 어지럽고 속이 안 좋은지, 이러다 길가를 걷다가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외국에서 막 돌아온 참이라 혹여 어떤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싶어 약국을 갔는데, 설명을 들은 약사는 뜬금없는 것을 물었다.

- 혹시 오메가이신가요?

- 네? 네. 맞는데요…….

- 혹시 그럼 최근에 처음으로 히트사이클을 러트와 함께 보내시진 않으셨나요?

- 어……. 맞아요.

해외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줄만 알았지, 갑자기 잠자리에 관한 문제를 물을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서원이 조금 민망한 눈치로 대답하는데, 약사는 이런 이유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듯 무감하게 대답했다.

- 아아. 그러면 그것 때문에 아픈 거예요. 페로몬이 크게 영향을 받는 시기거든요. 특히 노팅을 했다면 더 그렇고요.

- 아……. 그, 그렇지만 정작 그때는 괜찮았고, 미국에서 돌아온 오늘에서야 아픈데도요?

- 네, 간혹 그런 경우도 있어요. 긴장하고 있을 땐 안 아프다가 와르르 아플 때 있잖아요? 약은 일주일치 드릴 테니까, 먹고도 몸살이 계속 이어지면 그때는 병원을 가 보세요.

약사는 그 말과 함께 약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설명해 줬다.

약은 빈속에 먹어도 된다고 했었지. 서원은 약사의 설명을 떠올리며, 비척비척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컵 따랐다. 복용법대로 서원은 물과 함께 알약 두 알을 단번에 들이켰다.

꿀꺽꿀꺽…….

“하아…….”

유리컵을 내려놓은 서원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 내며 한숨을 내뱉었다. 약을 먹어도 효과가 바로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라 힘듦에 다시 침대에 눕고 싶었다.

그렇지만 약을 먹고 바로 누우면 안 될 것 같아, 서원은 식탁 의자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뭐가 이렇게 아파…….”

이런 게 처음이라, 혼자 남았을 때 아프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작게 푸념을 하며 무릎에 머리를 기대는데, 문득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온 감각이 쾌감으로 잠식된다는 히트사이클인 와중에도 도겸의 노팅은 아프게 느껴졌었다. 그것을 받아낸 것도 힘들었는데 몸살까지 앓아야 한다니…….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임신을 원해서 하는 행동이건만 서원은 사후 피임약까지 먹어야 했다. 연인이라면 이렇게 앓아누웠을 때 짝인 알파가 간호해 줄 텐데 보살펴 줄 사람 하나 없었다.

히트사이클이 온 것도, 그의 러트가 온 것도, 노팅도…… 전부 다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 것이고 계획에 없던 거니까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이러는 것도 이제 지친다…….”

보답 없는 짝사랑을 이어 가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가 생길 기회였는데도 사후 피임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이렇게 혼자 아파야 하는 것도.

거의 매일 같이 ‘그와 파트너를 계속 이어 가도 되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오늘은 자괴감까지 들도록 괴롭고 힘들었다.

잠깐 생각하던 서원은 무릎에 눈가를 비비며 눈물을 슬그머니 닦아 냈다. 도겸을 사랑하는 일은 늘 아프기만 한 것 같아서 조금 눈물이 났다.

* * *

“끄응…….”

서원이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꾸물거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날부터 시작된 몸살은 서원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약을 먹었음에도 일주일간 근육통과 메스꺼움, 미열로 인해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로 일을 나가는 것은 무리라서, 어쩔 수 없이 휴가를 썼다. 다행히 급하게 휴가를 쓴 건데도 안 된다고 하지 않아서 푹 쉴 수 있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몸이 안 좋긴 했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열도 많이 떨어지고 근육통도 덜했다. 내일이면 출근도 가능할 듯했다.

“밥…… 먹어야지.”

몸이 좋지 않은 탓인지 부쩍 입맛이 없었다. 그렇지만 어렸을 적부터 엄마가 ‘아플 때일수록 더 잘 챙겨 먹어야 한다.’라고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셨기 때문에 챙겨 먹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냉장고를 뒤적거리는데, 장을 보지 않은 탓에 먹을 만한 게 없었다. 그나마 쌀은 남아 있어서 흰 쌀죽을 하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쌀 컵으로 냄비에 쌀을 옮기는데, 별안간 현관문을 부서질 듯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쾅쾅쾅!

굉음과도 같은 소리에 서원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움츠렸다. 뭐지? 두려움에 숨을 죽이는데, 뒤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서원!”

“……도련님?”

도겸의 목소리였다.

웬 이상한 사람이 집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싶었는데, 도련님이라니. 한 번도 연락 없이 막무가내로 찾아온 적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놀라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의도치 않게 서원이 자리에 멈춰서서 기척을 죽이자, 바깥에서 도겸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문 부숴 버리기 전에 열어.”

“자, 잠시만요!”

갑자기 왜 문을 부순대? 아무리 튼튼한 우성 알파라고 해도 멀쩡한 현관문을 부숴 버릴 만큼 힘이 좋진 않겠지만, 사람을 부르든 돈을 쓰든 해서 충분히 하고도 남을 남자였다.

서원이 다급하게 현관문을 열자, 열린 틈새로 도겸의 험악한 얼굴이 보였다.

처음 보는 무서운 모습에 서원이 반사적으로 현관문을 다시 닫을 뻔했지만, 도겸은 현관문 틈새로 손을 끼워 넣고 억지로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모습에 서원이 당혹스러워하며 목소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여, 여기는 어쩐 일로…….”

“지금 장난쳐? 그날 일은 묻고 넘어가자면서, 뭐가 문제야?”

“네? 그게 무슨…….”

“연차 사유, 가족 여행이라면서. 네 어머니께 연락하니 그런 적 없다는데 뭐야. 그런 식으로 도망치려고 했어?”

“도, 도망이요……?”

뜬금없는 말에 서원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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