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방문이 똑똑하고 노크가 울렸다. 도겸이 가운만 걸치고 문을 열자, 배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작은 약상자를 도겸에게 내밀었다.
“지시하신 약입니다.”
“수고했어. 가 봐.”
도겸은 약만 받고 곧장 문을 닫아 버렸다. 침대 위에 윤서원이 이불을 덮고 있다고 한들 헐벗고 있으니, 보여서 좋을 건 없었다.
약을 챙기고 다시 침대로 돌아오는데, 윤서원이 침대 위에서 불편하다는 듯 애벌레처럼 꾸물거렸다.
가만히 지켜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에 손을 올리곤 부스스 눈을 떴다.
“도련님……?”
“…….”
도겸은 가만히 그런 서원의 모습을 지켜봤다.
뒤척거리면서 이불이 조금 내려간 탓에 서원의 맨몸이 부분부분 드러나 있었는데, 보이는 부위마다 어젯밤에 짐승처럼 흘레붙었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얼마나 물고 뜯고 했던 건지, 자국이 안 남아 있는 곳이 없었다. 목덜미, 가슴은 양반이고 어째서인지 종아리와 발목에도 자국이 낭자하게 나 있었다.
게다가 그 아래 보이는 침대 상태는 더 가관이었다. 콘돔도 쓰지 않은 탓에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액체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러트가 오면 멀쩡한 사고를 할 수 없이 성욕으로만 잠식되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뭘 저렇게까지 자국을 남겼나 어이가 없어졌다.
“왜 그러시는…….”
도겸이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윤서원은 어리둥절해하며 덩달아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을 더 창백하게 물들였다. 이제야 어젯밤의 상황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도, 도련님……. 저, 어젯밤 일은……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뭔가, 잘못 먹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
서원은 어제 히트사이클이 찾아와 격정적인 밤을 보내게 된 게 저 때문이라고 탓을 할까 두려운지, 제 몸이 만신창이가 된 것보다도 그걸 걱정하고 있었다.
도겸은 서원이 일어나면 바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며 사후 피임약부터 먹일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비 맞은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떠는 서원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어쩌다 저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긴 했지만, 하마터면 모르는 새끼들과 하루를 보낼 뻔하지 않았나. 게다가 히트사이클이 윤서원의 과실로 함께 보낸 것으로 된다면, 그는 막대한 배상금을 내놓아야 했다. 아마도 윤서원이 평생 일해도 못 갚을 만한 그런 막대한 돈을.
아무래도 진정부터 시켜야겠다. 도겸은 사후 피임약을 침대 옆의 테이블에 올려놓곤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알아. 그 새끼들이 술에 타서 히트사이클 유도제를 먹였더군.”
어제, 윤서원이 히트사이클의 열에 흠뻑 심취해 있을 때 놈들의 얼굴을 몇 번 쥐어 터트렸더니 순순히 불었다. 술에 히트사이클 유도제를 풀었다고.
히트사이클 유도제만 해도 엄청나게 강한 약이건만, 약을 가루로 만들어 칵테일에 풀었다고 하니 얼마나 빨리 몸에 흡수됐을지.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
도겸은 오해하지 않으니 괜찮다고 대답하면서도, 다른 쪽으로 서원에게 한소리를 했다.
“그래서 내가 날파리 같은 놈이랑 상종도 하지 말랬잖아.”
“바, 밥만 먹으려고 내려간 거였는데……. 제가 도련님의 파트너인 걸 안다길래 반응만 해 주려고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네가 그걸 왜 하는데.”
“죄송합니다…….”
서원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하더니, 갑자기 눈물을 후두둑 흘렸다.
그 모습에 도겸은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황당했다.
윤서원은 제 행동에 도겸의 이미지가 실추되기라도 할까 봐 눈치를 봤다. 고작 파트너일 뿐인데 왜 그런 걸 신경 쓰는 건지. 제 이미지가 실추되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그렇지만 눈물을 흘리며 점점 작아지는 서원을 보고 있자니 더 뭐라고 할 수가 없어졌다. 그리고 우는 서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심장이 쥐어짜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실수한 것을 눈물로 무마하려고 하는 사람을 이따금 만날 때가 있다. 그런 놈을 마주할 때마다 동정보다는 짜증부터 들었는데 윤서원을 볼 때는 안 그랬다.
어떤 드라마에서도, 영화에서도 윤서원처럼 예쁘고 처연하게 우는 사람은 없어서 그런 걸까. 서원의 우는 모습에 심장 한구석이 쥐어짜지는 듯했고 냉정한 판단력을 잃게 됐다.
도겸은 두 팔로 윤서원을 끌어안아, 서원이 제 어깨에 얼굴을 묻도록 했다.
“어제 그 새끼들은 내가 처리했으니까, 더는 생각하지 마.”
“……흐윽.”
따스한 포옹에 서원이 조금 놀란 듯 멈칫거렸지만, 이내 도겸의 널따란 등에 손을 올리며 함께 끌어안았다. 서원이 더 깊이 품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도겸은 제가 왜 팔자에도 없던 위로를 하고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게다가 분명 어제 격정적인 러트를 함께 보내며 성적 욕구를 짐승처럼 다 풀어낸 것으로 기억하는데, 서원을 가만히 안고 있자니 또 그런 기분이 되는 듯했다.
혈기왕성한 사춘기도 아닌데, 윤서원과 가까이 있으면 왜인지 늘 그런 느낌을 받는다. 윤서원의 페로몬은 저를 자극하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지만 더 하면 안 되겠지. 상태가 불안정하기도 하고, 어제 노팅까지 했는데 더 하면 죽어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해선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래도 계약은 해지해야겠어.”
“흣, 네……?”
뜬금없는 도겸의 말에,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서원이 눈밭에 파묻혀 있던 토끼처럼 얼굴을 쏙 들었다. 얼굴을 떼어냈는데도 어깨가 축축한 것이 옷에 눈물 자국이 남은 듯했다.
하는 짓도 그런데 눈가까지 빨가니 정말 하얀 토끼 같다. 도겸은 쓸데없는 감상을 하며, 마저 말을 이었다.
“계약 내용을 어겼으니까. 내 과실이야.”
“아니……. 어, 어제는…… 제 히트사이클 때문에 휘말리신 거잖아요.”
“어제 그놈들이 약을 먹인 거지. 억제제를 먹였어야 했는데, 내 실수야.”
“…….”
“여기서 그만하는 게 맞아.”
이렇게 매력적인 페로몬을 가진 오메가와 파트너 관계를 맺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독 이목을 끄는 서원의 외모 탓인지, 윤서원을 되도록 호텔 방에 머물게 하고 공식적인 자리는 얼굴을 잘 비추지 않게 했음에도 서원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데리고 다니다 보면 어제와 같은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페로몬 파트너를 그만두게 된다면……. 윤서원은 비서를 시키는 게 좋으려나? 그냥 인연을 끊는 건 좀 아쉬운데. 윤서원만큼 말 잘 듣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학벌도…… 조금 아쉽긴 하지만, 한국에선 나쁘지 않은 편인 데다 성격도 차분하니 사무직을 시켜도 어울릴 것 같고.
어떤 직종이 어울릴지 잠깐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윤서원이 무서울 정도로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멎었던 눈물을 다시금 뚝뚝 떨어트리며 매달리듯 말했다.
“서로 실수한 거로…… 넘어가면 안 되나요?”
“…….”
“그 사람들이, 잘못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실수로 넘어가도 되지 않나요……?”
“윤서원, 무섭지도 않아? 내가 그때 못 봤으면 어떻게 될 뻔했는지 몰라서 그래?”
도겸은 너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엄하게 덧붙였다. 샴페인에 히트사이클 유도제를 타는 미친놈이 또 존재할까 싶으면서도, 제가 만나고 다니는 놈들은 대부분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는 이들이었으니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제가 파티장을 급하게 빠져나가는 윤서원을 보지 못했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서 더는 그럴 일이 없도록 파트너 관계를 끊으려는 건데…….
그런데 서원은 평소 겁도 많으면서 작게 대꾸했다.
“도련님이 와 주셨잖아요…….”
“…….”
“와 주셨으니까, 괜찮은 거 아닌가요…….”
서원은 어떻게 해서든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절대로 그만둬선 안 되는 사람처럼, 어떻게 보면 조금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손대면 톡 하고 깨질 것 같은, 금이 간 유리컵처럼 아슬아슬했다.
도대체…… 왜 계약 해지를 무서워하는 거지? 도겸이 먼저 제안한 파트너였고, 서원은 파트너를 그만둔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었다. 오히려 도겸의 과실로 파트너를 그만두게 된 거니 몇 배의 손해배상금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돈 문제도 아닐 텐데, 왜.
“……하.”
도겸은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작게 숨을 내뱉었다.
이리저리 걸리는 것들이 많긴 했으나, 서원의 말대로 이번 일을 없던 일로 치고 넘어가면 좋긴 했다. 막대한 배상금도 주지 않아도 되고, 어떻게 서원을 제 곁에 둘까 생각 중이었는데 그것도 안 생각해도 되고. 무엇보다 윤서원과의 잠자리는 썩 마음에 들었으니까.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파티에는 사람을 붙여 서원과 같이 있게 하면 되겠지. 아니면 정말 파트너로 끼고 같이 다니든지. 어머니가 윤서원을 아니꼽게 보기에 제 나름대로는 지켜 주겠다고 혼자 둔 거였는데, 다른 변수가 있을 줄은 몰랐다.
도겸은 제 사심 때문이 아니라 윤서원이 부탁해서 그런 거라고,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 없었던 일로 치고 넘어가. 대신, 다음부턴 사람 붙여줄 테니까 단독 행동할 때 꼭 나한테 보고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있어. 그리고 사후 피임약 준비해 놨으니까 챙겨 먹어.”
“……네.”
도겸이 약을 올려놓은 테이블을 눈짓으로 가리키자, 서원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겸은 왠지 모를 답답함에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며 윤서원을 바라봤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사후 피임약을 먹이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마땅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룸을 빠져나왔다.
미국 스케줄을 하나하나 진행하는 동안, 서로 마치 그날의 일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