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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136)

<9화>

일어나니 창밖이 캄캄해져 있었다.

많이 피곤했었나? 분명 잠들기 전에는 점심이 좀 지난 시간이었는데, 일어나니 저녁이 돼 있었다.

자기 전에 점심을 챙겨 먹으라고 도겸이 말하긴 했는데, 그대로 잠든 탓에 일어나자마자 급격히 허기가 졌다.

“배고프네…….”

서원이 중얼거리며 마른 배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평소 같았으면 대충 룸서비스를 시켰겠지만, 오늘은 파티장에 음식이 있으니 가져다 먹어도 된다는 말을 들은 참이었다. 아마 룸서비스보다도 더 호화로운 음식이 있는 파티장에 있을 거였다.

“산책할 겸 다녀올까.”

서원은 평소 파티는 너무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가지 않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유달리 심심하기도 하고 산책도 할 겸 살짝 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다녀오면 별일 없으리라 생각하며, 서원은 조심스럽게 아래층에 있는 파티장으로 향했다.

파티장 중앙에는 길쭉한 테이블이 놓여 있고, 갖가지 음식들이 진열되어 있어 뷔페식으로 가져다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음식 하나하나가 공을 들인 것처럼 보였다.

파트너로서 도겸과 동행하며 웬만한 좋은 음식들은 다 먹어보긴 했지만, 제 돈 주고 사 먹긴 힘든 음식인 걸 알기에 매번 먹을 때마다 새로웠다.

서원이 그릇과 집게를 꺼내 이것저것 음식을 담고 있는데, 한 남성이 서원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음식을 담으려고 하는 것 같아 자연스레 지나치려고 하는데, 고개를 드니 체구가 저보다 훨씬 커다란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외국인이 똑바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안녕, 처음 보는 얼굴인데.

“…….”

- 혼자 온 건가? 이렇게 미인이 있었으면 기억했을 텐데.

그는 유창하게 영어로 말을 걸며 서원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는 비즈니스 자리니까 도겸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적당히 대꾸를 해 줬었는데, 그것을 본 도겸은 무척 화를 냈었다.

그러고는 도겸이 어떤 날파리가 달라붙어도 대꾸하지 말라고, 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하는 소리를 들은 전적이 있었다.

왜 사람을 날파리라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대꾸를 해 줬다가 또 한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서원이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남자가 서원의 팔뚝을 붙잡아 걸음을 세우게 했다. 억세게 붙잡는 손길에 절로 미간이 좁혀지고 옅은 신음이 흘렀다.

“아야…….”

- 어딜 가려고? 얘기 좀 하자니까?

- 야야, 건드리지 마. 저 녀석, 서도겸 파트너잖아.

이거 놓으라고 그의 손을 뿌리치기도 전에, 남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다른 외국인 남자가 서원을 보며 말했다.

도겸과 공식적인 석상을 함께하거나, 오늘처럼 파티가 있는 날 옆구리에 끼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래도 도겸이 있는 자리에는 늘 서원이 있었기에 도겸의 파트너라고 기억하는 사람이 종종 있긴 했다.

아예 제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무시하고 지나칠 거였다. 그런데 제가 도겸의 파트너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니. 상황이 난감하게 됐다.

서원이 미간을 좁히며 두 남자를 보는데, 방금까지 호감을 표현하던 남성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 서도겸의 파트너? 이 녀석이?

- 그래, 그 재수 없는 자식.

- 와우, 고자 새끼인 줄 알았는데 이런 녀석을 끼고 다녔단 말이야? 운도 좋은 놈이군.

두 남자는 도겸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는지, 도겸에 대해 악담을 퍼부었다.

호감을 표현하던 남성은 아쉬운 눈초리로 서원을 바라보더니, 뒤로 지나다니는 웨이터에게 다가갔다.

그는 등을 진 채 웨이터와 짤막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샴페인 한 잔을 가져와서는, 그것을 서원에게 내밀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 그럼 이거라도 받아. 예쁜이한테 주는 순수한 호의니까.

“…….”

서원은 말없이 그가 내민 샴페인을 바라봤다. 샴페인은 그냥 내가 받아도 되는 건데, 뭘 자기가 돈을 내기라도 한 것처럼 생색을 내는 건지 모르겠다.

진짜 멋없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도겸의 파트너인 걸 아는 두 사람이니 마냥 무시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듯했다. 끝까지 달라붙을 것 같은 사람들이기도 하고. 서원은 작게 숨을 내뱉곤 영어로 대답했다.

- 감사합니다.

- 드디어 대답을 해 주네. 말 못 하는 줄 알았잖아.

- …….

- 아, 눈빛이 무섭네. 건배 한 번만 해 주면 더는 말 안 걸게. 한잔하자.

서원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겁에 질린 시늉을 하다가도 바로 건배를 요구했다. 무서운 척이라도 좀 하든지, 그의 태도가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행실을 봐서 건배 한 번 해 준다고 과연 떨어져 나가 줄지 모르겠지만, 서원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샴페인 한 잔 마신다고 취할 것도 아니고, 바로 앞에서 웨이터에게 잔을 받아왔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싶었다.

서원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환하게 건치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 건배.

짠, 잔을 맞추고 서원은 그 자리에서 샴페인 한두 모금을 마셨다. 왠지 술맛이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상대가 별로라서 그런 것 같았다.

서원이 미간을 좁히고 술잔을 바라보는데, 남자가 미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 그럼 좋은 시간 보내라고.

그는 약속대로 더 치근거리지 않겠다는 듯 자리를 비켜 줬다. 더 치근거릴 것 같은 인상이었는데, 다행이었다.

방해꾼이 사라진 서원은 음식을 두어 개만 더 담고, 인적이 드문 외진 자리로 가 먹었다. 고급 인사들이 먹도록 만든 요리들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다 맛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한두 입밖에 먹지 않았는데 속이 안 좋아졌다.

몸에 열이 오르고, 어지럽고, 속이 안 좋은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한두 개 먹고 체한 건가 싶었는데, 순간 코끝에 오메가 페로몬이 스쳤다.

제 몸에서 오메가 페로몬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서원은 페로몬조차 옅은 열성 오메가이기 때문에 페로몬이 이런 식으로 흘러나오는 날은 흔치 않았다.

히트사이클이 오려는 때를 제외하고는.

그렇지만 히트사이클이 오는 주기도 아니었고 징조도 없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먹는 것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순간 머리가 띵하고 울리며 몸이 휘청거렸다.

“윽…….”

어지럼증에 서원은 방금까지 앉아있던 소파 등받이를 붙잡았다.

이번에는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만취라도 한 것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웠다. 아무리 히트사이클이 예기치 않게 왔다고 하더라도, 이런 제 몸 상태는…… 비정상적이었다.

순간, 아까 음식을 담을 때 만났던 외국인 남성 일행이 서원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그놈들이 샴페인에 히트사이클 유도제라도 탔던 걸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급격히 몸 상태가 나빠질 리가 없었다. 눈앞에서 웨이터에게 받아왔으니 별일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제게 등을 보이던 그 짧은 순간이 갑자기 눈에 밟혔다. 능숙한 사람이라면 그 짧은 찰나에도 약을 탈 수 있었으리라.

어쩐지 도련님에 대한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순순히 보내는 게 이상하다 싶었더니만, 이런 비열한 짓을…….

그놈들을 잡아다가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알파들의 눈을 피해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벽을 한쪽 손으로 짚은 채 겨우겨우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걸어 룸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익숙한 덩치가 기다렸다는 듯이 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 예쁜아, 어딜 그렇게 가?

아까 마주했던 외국인 일행 둘이었다.

둘을 마주하자마자 서원은 어금니를 뿌드득 갈았다. 어렴풋이 저놈들이 샴페인에 약을 탄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으니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놈들이었지만, 약을 탄 술을 마신 탓에 이성이 바닥까지 내려간 상태였다. 서원은 흥분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눈으로 두 남자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 네놈들이…… 그랬지.

- 흐음, 뭘 말하는 걸까?

- 샴페인에 약 탄 거, 네놈들 짓이잖아.

- 아아, 우리가 대접한 샴페인 말하는 건가? 맛이 좋았지?

말하는 것만으로도 온 기력을 다 쓰는 것처럼 힘든데, 남자는 빈정거리며 놀리듯 말했다. 아무리 눈을 무섭게 뜨고 화를 내 봐야 무섭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알파가 오메가를 짓누르는 건 개미를 죽이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이고, 더군다나 앞의 두 알파는 오늘 파티에 초대된 귀한 인사들이었다.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들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도 그들은 알고 있을 터다.

서원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겨우 이성을 잡으려 노력하는데, 아까 처음 말을 걸었던 남성이 손을 들어 서원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 알파들 사이에 와서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모습이 유혹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 …….

- 서도겸이 어떤 오메가를 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얼마나 맛있길래 이 오메가만 끼고 다니는지 궁금하잖아?

눈앞의 남자가 빙긋 웃는 순간, 묵직한 알파 페로몬이 서원의 몸을 짓눌렀다.

안 그래도 서 있기 힘들었는데, 두 남자의 알파 페로몬이 제 몸을 짓누르기까지 하니 서원은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머리를 뒤덮는 뜨거운 열기에 눈앞은 점점 멀어지는 듯했고 귀는 웅웅거리며 울렸다. 제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히트사이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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